덕수궁 개요
입장료 : 성인(25세~64세) 1000원
만 24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
야간무료관람 : 수/토요일 [18시~21시]
덕수궁 관람시간 : 화~일요일 [9시~21시]
중명전 관람시간 : 화~일요일 [9시30~17시30분]
국립현대미술관 관람시간 : 화/목/금/일 [10시~18시], 수/토 [10시~21시]
휴관일 : 월요일
덕수궁 수문장 교대시간 :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
장소 : 대한문 앞 광장(약 20분 소요)
서울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덕수궁,
접근성이 좋아서 계절마다 꽃구경이나 휴식을 위해 부담 없이 찾아볼 수 있는 아담하고 친근한 궁궐,
그러나 덕수궁(德壽宮, 6만3천m2)은 조선의 오백 년 도읍지에 세워진 5대 궁궐 중 하나입니다.
5대 궁궐을 읊어 봅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그리고 덕수궁.
이 중에서 덕수궁은 가장 크기가 작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를 품고 있는 궁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고등학교가 자리 잡았던 경희궁은 철저하게 파괴당하여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반면
꼬마 궁궐같은 덕수궁은 살아남았기에 현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조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덕수궁에 대해 멸망한 나라 조선의 마지막 궁궐로서,
왕국을 제국으로 격상시키려 했던 고종의 몸부림이 어려있을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임진왜란으로 이미지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선조의 행적이 남아 있기도 한 궁궐이니
기분 좋게 즐거운 마음으로 둘러보기 힘든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덕수궁에는 새봄을 맞이하여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낮의 궁궐을 즐기려는 상춘객들의 발걸음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궁내에 심어져 있는 꽃들이 만개하고 말랑말랑하게 익은 태양으로부터 햇살이 분수처럼 쏟아지자 사람들의 얼굴에 하하호호 웃음꽃이 만발하였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조잘조잘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기분 업되어 궁궐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덕수궁은 작지만 아름답습니다.
덕수궁은 원래 왕실 저택이었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궁궐로 신분상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이 자리에는 정릉이 있었습니다. 세조가 남편(의경세자, 20세에 세상 하직)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 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이곳의 정릉을 성북구 쪽으로 옮기고 정릉이 있던 자리에 개인 사저를 마련하여 두 아들과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한 씨의 차남 자을산군이 보위(성종)에 오르며 어머니 한 씨와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 월산대군이 집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렇게 왕실 저택이었던 곳이 궁궐로 변신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찌질한 군주 1,2위를 다투는 선조가 전란을 피하여 의주로 도망갔다가 이순신의 기적 같은 활약에 힘입어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경복궁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왜놈 때문에요? 아닙니다. 일설에 의하면 도망간 임금에 대한 분노로 조선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합니다. 돌아갈 처소가 없어 난처한 입장이 된 선조는 급한 대로 왕실 저택 중에서 가장 큰 월산대군 후손의 저택과 주변 민가 몇 채를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고 '행궁'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선조는 창덕궁 어소 등을 중건했지만 진짜 궁궐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서 세상을 떴습니다. 뒤를 이어 집권한 광해군이 1608년 덕수궁에서 왕위에 오른 후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가면서 '시어소'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줍니다. 경운궁은 인목대비의 유폐와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규모가 축소됩니다. 1623년 이곳에서 즉위한 인조가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후 창덕궁,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운궁(慶運宮)은 궁궐로서의 소임을 마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3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덕수궁은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갔다가 1897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한이 서려있고 일제의 간섭이 극도로 점증하는 경복궁 권역이 아닌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덕수궁은 비로소 궁궐 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대한 제국)가 마지막으로 국운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쓴 곳이 바로 덕수궁이었습니다. 대한 제국의 정궁이 되었던 것입니다. 정치의 중심이 덕수궁으로 옮겨오자 대한 제국을 노리던 열강들이 주변으로 포진해 들어왔습니다. 러시아, 영국, 미국이 공사관을 덕수궁 주변으로 치고 들어오면서 궁궐은 갈갈이 찢겨집니다. 중명전은 그리하여 지금의 정동극장 뒤편으로 나 홀로 뎅그라니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1904년 함녕전 아궁이 수리 중 발생하였다는 큰 화재로 덕수궁 전각들이 처참하게 소실됩니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일이었으므로 대한 제국은 1905년에 다시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을 중건합니다. 1906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여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아관파천을 결행하였다가 덕수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감행하였다가 이후 일본으로부터 집요한 퇴위 압박을 받습니다. 견디지 못한 고종이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자 황위를 계승한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덕수(德壽)라는 호를 내리게 됩니다.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덕을 베풀며 장수하시라고. 그리고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명명하였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그 후 1919년 고종은 침전이었던 덕수궁 함녕전에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아마도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에게 덕수궁은 희원과 비운이 점철된 궁궐로 각인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돌이켜보면, 덕수궁은 (경복궁이 없었던) 1611~1615년에 조선의 정궁이었으며, 1897~1907년에는 대한 제국의 황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궁궐이라는 점에서 건축학적으로도 이채로운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한문과 주변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입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습니다. 조선 궁궐의 정문 이름에는 모두 화(化,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자 돌림을 사용하였습니다.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덕수궁 인화문(仁化門).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현재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둘째와 덕수궁 현대미술관 나들이 당시 교대식 광경을 보았네요.
보통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문을 냅니다. 그래서 경복궁의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돈화문도 남향으로 서 있습니다.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이 동쪽으로 나 있는 이유는 이는 창경궁과 종묘, 창덕궁이 붙어 있어 남쪽으로 문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덕수궁(경운궁)의 정문도 남쪽에 있었습니다. 즉, 지금 있는 대한문은 최초의 정문이 아닙니다.
지금의 문은 동문이었고 이름은 대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환구단 건립 등으로 궁의 동쪽이 새로운 중심으로 대두됩니다. 뿐만 아니라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어 궁궐의 정문으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대한(大韓)도 아니고 대한(大漢)이라니?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동향인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나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위치도 바꾼 것입니다. 잦은 도로 확장 때문인데, 원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지만 도로 확장을 위하여 1971년 20여m 뒤쪽으로 이동시킨 것입니다. 문 앞에 소광장을 설치한 게 아니라 도로 확장을 위해 뒤로 물린 것이군요...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졌으며 공포가 화려합니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입니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계단 측면을 막아 댄 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습니다. 대한문을 지나면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입니다.
서울의 5대 궁궐에는 입구를 들어서면 다리가 있습니다. 돈화문을 지나면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홍화문을 지나면 창경궁 옥천교, 흥례문을 지나면 경복궁 영제교, 대한문을 지나면 덕수궁 금천교(禁川橋), 흥화문을 지나면 경희궁 금천교(禁川橋)가 그것입니다.
다리 위엔 귀틀석(교면을 구성하는 갓돌)과 청판석을 교대로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습니다. 가운데 있는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양 옆 신하들의 길보다 높게 시공되어 있습니다.
다리 윗 부분 동, 서 가장자리엔 각각 2개의 돌로 된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봉오리를 얹었습니다. 다른 궁궐의 금천교와 달리 서수(瑞獸, 상스러운 짐승) 조각을 포함한 어떤 장식도 없습니다. 아랫부분에는 홍예(무지개 모양) 아치 2개가 있습니다. 아치를 받치는 선단석은 전부 금천 바닥 밑에 있어 밖에선 볼 수 없습니다.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길이 금천입니다.
금천은 현재 정동이라는 동네이름의 기원이 되었던 ‘정릉동천(貞陵洞川)’으로부터 끌어들인 물줄기입니다. 두 개의 물줄기가 대한문 근처에서 만나 합류한 물줄기를 약간 틀어 덕수궁 경내로 흐르게 하여 금천으로 삼은 것입니다. 금천으로 흐르는 물은 다시 지금의 서울시청 앞에서 창동천과 만나 청계천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인화문이 정문이던 시절에도 정릉동천을 금천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경우는 정동 길을 따라 흐르는 정릉동천 물줄기를 덕수궁 경내로 끌어들여 사용한 것입니다.
1986년 일제가 흙으로 파 묻었던 금천교를 발굴하여 복원하였지만 흉내만 낸 탓으로 웅덩이처럼 뎅그라니 남아 있습니다. 축대의 측면은 돌로 쌓았고 바닥은 시멘트로 땜빵하였는데 최근에 자갈을 깔아 보기 싫지 않게 한 것입니다.
궁궐의 정문 다음에 개천을 두는 것은 풍수지리적인 이유 또는 궁궐을 외부와 구별짓는 경계로 삼기 위함입니다. 일본의 오사카 성이나 나고야 성 같이 적의 침투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파놓은 해자의 초극소 판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하지만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의중에 따르면 해자의 개념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왕을 알현하려 입궁한 신하는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어(洗心) 충(忠)의 의미를 되새기고, 다리를 건너 궐 밖으로 나가는 임금은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어(洗心) 백성들을 어여삐 보아야 한다."
현재 물이 흐르는 곳은 창경궁 옥천교가 유일합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란 어구를 새긴 이 비석을 하마비라고 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다 말에서 내려 궁궐에 들어가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인데, 아마 다른 곳에 있던 것을 금천교 옆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하마비는 관료들이 궁궐에 들어갈 때 가마나 말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서 반드시 내려야 하는 지점을 나타낸 비석이므로 궐 밖에 있어야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명문(光明門)
금천교를 건너 직진하면 광명문이 나옵니다.
광명문은 고종이 기거하던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건립되었습니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건축물이군요. 1904년 함녕전의 화재로 궁궐 내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지만 광명문은 살아 남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덕수궁이 크게 훼손되면서 광명문 좌우에 있던 행각이 철거되었고, 1930년대에는 광명문의 거주지가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후(해방 이후), 광명문 안에다 자격루(물시계)와 홍천사명 동종을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과거 덕수궁에 가서 자격루와 동종이 뜬금없이 문 안에 모셔진 것을 보고 뜨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관리부재 상태에 있던 광명문은 덕수궁 권역을 복원하면서 2018년 12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019년 3월 1일 함녕전 남쪽 원위치로 이전 공사를 마치고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그럼 과거의 모습은요? 이전 그 자리에는 뜬금없는 세종대왕 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철거된 동상은 어디갔나요? 어린이 대공원으로 가셨나? 아참, 이젠 새롭게 제작한 거대한 세종대왕상(김영원 작가 작품)이 광화문통에 세워져 있죠. 그런 걸 보면, '역사 바로 세우기'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이곳 광명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行閣)은 일제가 철거한 이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아서 문만 홀로 뎅그라니 남아있는 형국이 그런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자리를 찾은 것은 여간 대견스럽지 않습니다.
건축적으로 문은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됩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문(門)이란 독립적인 구조물이라기보다는 담·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 존재할 때 그 기능이 발휘된다는 의미입니다.
“문과 창을 뚫어 만들어야만 그 방으로서 유용하다.”
이 말은 노자(老子) 할아방이 남긴 건데, 여기서도 방이라는 영역이 벽과 문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관계의 미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방의 안팎을 경계짓는 벽에 난 문을 방문, 집의 안팎을 구획하는 담에 난 것을 대문이라 합니다.
개념을 확장시켜봅니다.
마을의 경계에 세워진 문을 이문(里門)이라 하고, 도시의 경계를 형성하는 성벽에 뚫은 것을 성문(城門)이라 합니다. 따라서, 문의 성격과 명칭은 그것에 연속된 경계요소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의 광명문은?
연속된 경계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아서 불완전한 처지에 있습니다.
잡상(雜像)이란 기와지붕 위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올린 작은 장식 기와입니다.
궁궐의 재앙을 막아주기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과 토신들을 형상화시켜 놓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액운을 막아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밤마다 당나라 태종의 꿈에 나타나는 귀신이 기와를 던지며 괴롭히자 문관과 무관을 내세워 궐문을 지키게 했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유럽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가고일과 비슷한 용도로 설치한 것이 이채롭고, 인간이란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론적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동서고금, 피부색 관계없이 인간이란 서로 연결되는 것인 모양입니다. 잡상 아래, 기와의 맨 끝부분에 똥그란 눈을 뜬 형태의 구조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토수(吐首)라고 하는데, 지붕 네 귀의 추녀 끝에 끼는 장식 기와입니다.
함녕전
사진(행각) 왼쪽 편에 약간 단차가 높아 보이는 문이 있는데 이것은 덕홍전의 융안문(외삼문)으로 솟을대문입니다. 반면에 함녕전의 치중문(외삼문)은 평대문으로 행각과 같은 높이로 시공되어 있습니다.
솟을대문인 융안문(隆安門)의 경우, 고종 때 서예가 빼어났던 문신 강찬(姜贊 1849~?)이 편액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편액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기서 '융안'은 융성(隆)하고 평안(安)하라는 뜻입니다.
조선의 궁궐은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미학적 측면에서 중국의 자금성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궁궐과 건축은 너무 화려하여 쉽게 질릴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경복궁에 비하면 덕수궁은 수수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 행각의 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 건물로서,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생활공간)이었습니다.
보물 제820호.
광무 8년(1904) 아궁이 수리공사 중 화재가 발생하여, 지금 있는 건물은 그해 12월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이곳은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합니다.
함녕전의 규모는 정면 9칸·측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평면이 ㄱ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위쪽에 여러 가지 조각을 장식해 놓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침전에는 잡상을 설치하지 않는데 이곳 함녕전은 지붕 모서리 부분에 잡상(조각)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침전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겠네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한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며 구름과 덩굴문양으로 꾸몄습니다.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만들었고, 네 면 모든 칸에 벽을 두르지 않고 창을 달아 놓았습니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과 장식적인 굴뚝을 설치하였습니다.
‘함녕(咸寧)’은 ‘모두(咸)가 평안하다(寧)’라는 뜻.
주역(周易)의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일월오봉병 앞에 놓인 것은 다리가 X자로 접히는 이동식 어좌 용교의(龍交椅)입니다. 용교의 아래엔 왕의 평상 용평상을 받치고 왕의 돗자리 용문석을 깔았습니다. 모두 산뜻하고 색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오봉병부터 용문석까지 모두, 무형문화재급 장인들이 힘을 합쳐 재연한 작품들입니다.
덕홍전
덕홍전은 1906년 다시 짓고 1912년 고쳐지어 현존 덕수궁 전각 중에 제일 연륜이 짧습니다.
우리 전통 궁궐 목조전각 양식인 듯하면서도 네모 납작하게 깎아 각진 기둥이나 어칸 출입문 등이 여느 전각과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꾸민 익공식이면서 지붕선이 반듯한 맞배지붕이 아니라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을 얹은 것도 전형적인 조합은 아닙니다.
덕홍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한옥이며, 측면 칸 폭이 짧아서 전체 평면이 정사각형에 가깝게 보입니다. 한국의 전통 구조에서 보기 드문 구조로 지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내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고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문양으로 쓰였던 봉황과 오얏나무 꽃무늬가 금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자주색 전구는 오얏나무 열매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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