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한 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에는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조금 다른 건물과 서구 건축기술로 건설된 된 건축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근대화된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자주독립국가를 유지하려 했던 일환이었습니다. 이제 중국에서 벗어나 서구 사회 구성원들과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려 한 한 남자이자 군주, 고종이 벌인 일이었죠.
그는 서양 재정고문의 제언을 받아들여 전통 한옥의 조선 궁궐 안에 일본 천황조차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서구식 석조전을 건설키로 결단 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백 년 궁궐에 새로운 옷 - 근대의 건축 - 이 덧입혀지게 됩니다.
그의 마음으로 들어가 귀 기울여 봅니다.
아마도 황제는 서구 열강과 접촉이 잦아지다 보니 그들의 기술과 문화를 접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그들과 만나는 장소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신생 제국의 기초를 다져나가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다른 측면으로는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벗어나서 서구와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속마음의 일단이 표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석조전(石造殿) 일원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J.R Harding)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하였습니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를 설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에 서관을 증축하면서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습니다. 서관은 의석조(疑石造)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입니다.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의 일환으로 기존 석조전은 일본 화가의 그림을 전시하고 이왕가 미술관이란 타이틀로 조선의 미술을 전시할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석조전 (동관)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현존하는 궁궐 건축물 중에서 가장 큼)로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외관은 '열주식(列柱式)'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는 '로코코 풍'으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입니다.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을 단 현관과 베란다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에 드러나보이듯이 여러 개의 기둥이 늘어서 있는 '열주'형식이 도드라지고, 엄격한 비례와 좌우대칭이 정확한 '신고전주의 양식'을 채용하였습니다. 돌출된 정면 현관의 석주는 둥근 형태로, 좌우 회랑의 석주는 사각으로 설계하여 변화를 주었습니다. 진짜 변화를 준건지 좌우 회랑이라 쉽게 제작한 것을 적용한 건지.. 판단은 관람자가 하는 걸로.
신고전주의는 18세기 중엽 폼페이 발굴 등 고고학적인 연구로 유행된 양식으로서, 서구의 고전인 그리스·로마시대의 건축방식에 다시 눈을 돌린 것으로 보면 됩니다. 이 양식은 직선과 사각형에 기초를 두고 세로로 홈이 파인 그리스·로마의 기둥 장식이나 조각들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기둥이 구조적인 역할을 하였던 그리스·로마에 비하여 신고전주의는 기둥이나 조각을 건물 외벽이나 실내 장식용으로 응용하였던 점이 달랐습니다. 덕수궁의 석조전 이외에 일제에 의해 세워진 구 서울역 건물도 신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한 것입니다.
덕수궁 석조전은 구한말 총 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하였고,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사바틴이 나오네요. 기억이 필요한 인물입니다. 이 건축물은 석조전이라 이름하지만 회랑과 외부 기둥, 보를 제외하면 철근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벽체는 벽돌을 쌓아 올렸습니다. 유형적으로 볼 때,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인데,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 여러 곳에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세워진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 후 각 대학이 본관 건물을 지을 때 교범처럼 본뜬 건축물이 바로 덕수궁 석조전입니다.
대한 제국의 고종황제는 제국을 선포한 후,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 용도로 이 석조전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정치문화적으로 중국에 예속되었던 속국과 다름없는 조선의 임금으로서 제국을 표방한 것은 대담한 결정이었습니다. 궁궐 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사신들과 교류하려 하였던 것도 매우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비록 임금 한 사람의 노력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의 고뇌에 찬 몸부림이 절절히 느껴지는 공간이 바로 이 석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 가까운 공사기간이 소요되었지만 완공된 1910년에 나라가 망하면서 정작 원래 의도했던 용도로 사용되지 못한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고종은 주로 함녕전에 거하였고, 나라가 망한 뒤 일본으로 강제 유학 갔던 영친왕이 귀국할 때마다 숙소로 쓰인 것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했으니까 말입니다.
전체 3층 건물 중 지층은 시종들의 대기장소로, 1층은 황제의 접견실,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2014년 복원공사를 마친 다음 10월 13일에 석조전 대한 제국 역사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덕수궁에 들어가 보면 건축물들이 가까이 배치되어 있고 담장(행각)이 없어 조망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받으신 분이 있다면 그것은 일제의 만행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중화전을 둘러싸는 행각이 있었지만 1930년대 덕수궁의 공원화 계획으로 석조전 앞에 잔디 분수정원을 가꾸면서 행각을 헐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 세월이 지나 중화전 복원이 이루어지면 지금의 조망권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석조전 우측의 잔디공원 끝머리에 심어져 있는 가지가 요란한 나무 두 그루는 왼쪽의 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쪽에 심어진 것과 같은 종류로 여겨집니다. 7월이 꽃이 피는 배롱나무입니다.
외관의 기둥은 이오니아식 양식(Lonic Order)을 차용하였습니다. 이오니아 양식이란 BC 7세기 초부터 소아시아 에게해 연안에 거주하던 이오니아인들 사이에 발달한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석조전 기둥은 오리엔트 세계의 영향을 받아 여성적인 경쾌함과 우아함이 담겨 있습니다.
이오니아식 석주라 기둥이 가늘다고 하지만 이쑤시개보다는 훨씬 굵습니다.
두 사람이 팔을 뻗어 잡으면 충분히 잡힐듯합니다.
이오니아식 기둥은 그리스 3대 양식인 도리스식(Doric Order), 이오니아식(Ionic Order), 코린트식(Corinthian Order)의 하나로서 기둥이 높고 가늘어서 여성적인 우아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도리아 양식(doric order)은 도리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여 주로 적용하였던 짧고 간결한 형태의 남성적인 미가 돋보이는 기둥이며, 코린트식은 엔터블러쳐(entablature, 지붕과 기둥이 만나는 부위)와 기둥 몸체가 만나는 부분인 기둥머리(주두, capital) 모양을 나뭇잎 무늬로 장식한 것이 특징입니다.
덕수궁 석조전의 정면 열주를 구성하는 이오니아식 기둥들을 보면 주두는 소용돌이 모양의 볼류트(volute) 장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기둥의 볼류트 장식 각도는 45도로 세워져 정면과 측면에서 공히 소용돌이 장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키백과에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이오니아식 기둥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가장자리에 위치한 기둥머리는 45도 각도로 볼류트 장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식 양식(앞에서 언급한 3가지)들은 원주(기둥)가 모두 엔타시스 양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엔타시스 양식이란 기둥을 만들 때 홈이 파지고, 기둥 중간부분이 약간 부풀어 오른 것(배흘림 양식)을 뜻하는데, 그리스 양식은 모두 아주 미세하게라도 엔타시스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석조전의 이오니아식 기둥은 가냘프게 보이지만 여러 개가 합심하여 삼각형의 지붕을 굳건하게 받치고 있습니다. 삼각형의 박공지붕인 페디먼트에는 대한 제국을 상징하는 오얏나무 꽃잎이 새겨져 있습니다.
박공(牔栱, gable)은 경사진 지붕 한 쌍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삼각형의 공간을 가리킵니다. 박공지붕은 보의 좌우에 2개의 장방형 사면을 붙인 것과 같은 모양의 지붕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박공이란 지붕에 불어오는 바람을 잡는다는 뜻의 박풍(牔風)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얏나무 꽃잎이 부조된 삼각형 박공은 정면 현관과 양측면으로 후면을 제외한 3곳 현관에 모두 시공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8세기 유럽 궁전 건축을 모방한 '신고전주의 양식'에 해당합니다.
1층 창문은 삼각형 박공과 블라켓을 내었으며, 2층 창문은 심플하게 상부에 돌출 석재만 내었습니다. 1층 창문도 기하학적 문양과 박공 양단에 블라켓을 달은 것과 블라켓이 없는 박공과 민무늬인 창문 2가지로 차별되게 시공되어 있습니다. 창문과 창문 사이에 등이 달려있는 것과 없는 2가지의 유형도 보입니다.
서양의 고전주의 건축에는 베란다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석조전에 베란다가 반영된 것은 18세기 유럽국가(영국, 프랑스)들이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총독관저를 시공할 때 더운 열대성 기후에 맞게 변형된 양식을 조선에도 적용한 결과입니다. 조선의 기후와 풍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던 건축가가 당시 아시아에서 유행하던 콜로니얼 양식을 원용하였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옥상에는 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좌대를 세운 후 고깔모자 같은 항아리 장식이 이오니아식 석주 기둥마다 올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유골이나 차(茶) 단지로 쓰던 뚜껑 달린 항아리(urn)가 정원이나 건축, 실내장식에 응용된 경우와 유사합니다. 건축용어로 건물 최상부에 얹은 장식 혹은 지붕이나 담 등 꼭대기 장식 부분을 통칭하여 피니얼(finial)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연질이라 가공이 쉬운 구리로 꼭대기 장식을 세련되게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축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궁궐 내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목표로 하는 건축물의 조망에 동참합니다. 저처럼 감상하는 또 다른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이러한 행위는 미술관 안에서 그림을 요모조모 따져보는 즐거움과 다른 재미를 마음에게 선사하는 일입니다.
연결통로
석조전(동관)과 현대미술관(석조전 서관)을 연결하는 통로는 2층구조입니다.
현재 관람객에게 개방은 하지 않는 듯합니다.
연결통로 측에서 석조전 동관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모서리에 위치한 이오니아식 기둥의 볼류트가 45도 각도로 설치되어 있고, 옥상에는 항아리 형의 장식이 보입니다.
현대미술관(석조전 서관)과 연결통로 부위 모습입니다.
현대미술관의 코린트식 기둥이 보입니다.
석조전 서관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하여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때문에 석조전 동관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돌출된 현관에 설치한 열주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지어진 것 같지만 중앙 현관의 상부에는 삼각형 박공이 없고 좌우 건물 전면부에 열주나 베란다가 설치되지 않은 외관을 하고 있습니다. 미술관 내부는 3 등분되어 있는데 중앙 로비를 겸하는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내력을 살펴보니,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다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과천 이전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덕수궁 분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경우 정면 현관의 6개 기둥과 양 측면의 기둥을 코린트식으로 설계하여 전체적으로 단조로운 건물에 미적 장치를 부여한 느낌이 듭니다.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은 그리스 도시 코린트에서 온 이름으로 화려함과 장식적 특징이 도드라집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넘치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코린트 양식을 적용한 사례는 드물었고, 나중에 헬레니즘 시기에 유행하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과 장식을 좋아했던 로마 후예들 사이에 퍼져 나갔던 양식입니다. 주두(기둥머리)는 이오니아 양식의 소용돌이(Volute)에 아칸서스 나뭇잎을 합친 문양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아테네 조각가 칼리마쿠스가 코린트에서 열린 한 연회에서 잎으로 둘러싸인 술잔 받침을 보고 고안했다고 전해집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옆 잔디밭에 오얏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색깔이 어울리게 이쁩니다.
오얏나무는 4월에 흰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벚꽃과 같네요), 열매는 7월에 붉은빛을 띤 자주색으로 익고, 과육은 연노란색을 띠게 된다고 합니다.
유럽식 정원
석조전의 정원 역시 석조전과 같은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세워졌습니다.
석조전과 석조전 서관 앞에 널따랗게 만든 장방형 잔디밭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식 정원입니다. 착공 6년 만에 석조전 구조 공사를 끝낸 1906년 조성했습니다. 이를 테면 지면을 낮게 파고 계단으로 내려서게 한 서양식 성큰 가든(Sunken garden/ 침강원)입니다.
분수대가 들어선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물개 분수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저 물개는 일본 홋카이도 지역에 출몰하는 녀석들이라고 합니다.
분수대는 일제가 1937년 덕수궁 서관을 지으면서 뒤늦게 들였다고 합니다.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드느라 여러 전각을 맘대로 옮기고 부수고 고치던 때여서 분수대로 공원 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분수대를 하필 물개상으로 꾸민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전쟁을 일으킨 뒤 물자가 딸리자 포탄 만드는 데 쓰려고 청동 물개상 일부를 뜯어가 망가뜨렸고 지금 물개상은 1984년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984년에 다시 만들었다?
분수대 물개 조각상 논란
서울신문 2010년 7월 27일 기사에 따르면,
재미 큐레이터 선승혜(40·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한국·일본미술 담당)씨는 2010년 7월 26일 석조전 분수의 물개 조각상은 193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조각공예부문 심사위원이었던 일본 도쿄미술학교 쓰다 시노부 교수가 디자인했으며, 1940년 1~8월 사이에 설치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현편으로, 물개가 있는 사진은 1934년에 찍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선 씨는 논문 ‘한국 근대의 양식(洋式) 취미-석조전 정원과 쓰다 시노부의 분수조각’에서 이왕직(일제 강점기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 분수를 개·보수하면서 쓰다 교수에게 새 조각상을 의뢰한 공문을 입수해서 공개한 바 있습니다. 1938년 7월 16일 작성된 공문은 분수 디자인의 사진과 크기를 보내면 오사카 주조소에 제작을 의뢰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의도로 조각상을 의뢰했는지 혹은 어떤 지시에 의해 조각상이 기존의 거북에서 물개로 대체되었는지 설명이 나와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정하기로는 거북은 왕의 도장인 어새의 손잡이에 조각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거북조각상이 물개상으로 바뀐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의도하였든 아니하였든 결과적으로 조선 왕조를 부인하고 권위를 크게 훼손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상 복구할 계획이 발표된 적은 없는 듯싶습니다.
배롱나무는 매끈하고 깨끗한 수피가 겉과 속 다르지 않은 선비의 청렴을 닮았다 해서 집이나 정자, 향교에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매끈한 나뭇가지를 간질이듯 긁어주면 간지럼 타듯 흔들거리므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불렀습니다.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오랫동안 지지 않아 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일각문과 꽃담
덕수궁 안의 석어당-즉조당과 정관헌 사이 담장에 나 있는 문을 일컬어 일각문(一脚門)으로 부릅니다. 건물이 많아서 담을 쌓아 구분할 때 담 사이에 내는 출입문을 통칭하여 중문(中門)이라 하는데 이 중문 중에서 아주 작은 것이 일각문인 것입니다. 정관헌의 앞마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 위에서부터 창신문· 유현문· 용덕문· 석류문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함녕전과 덕홍전의 담장에서 석어당 쪽으로 남단, 중앙, 상단에 각각 일각문이 있습니다. 중앙의 일각문은 유현문으로, 벽돌로 쌓고 통로를 아치형으로 연 단문(團門)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유현(惟賢)은 어진 사람만 출입하는 문을 의미하며 서경(書經)에서 따온 것입니다. 남단의 일각문은 석류문이고, 북단 일각문(창신문)으로 들어서면 정관헌이 나옵니다.
좌우로 꽃담이 이어진 유현문은 벽돌로 쌓아 아치형으로 문을 내고, 그 위에 기와를 얹는 형태로 경복궁의 꽃담에 비해 소박하지만 전통과 근현대의 조화를 고스란히 담은 명품입니다.
벽돌, 돌 등으로 아름답게 문양을 만들어 쌓거나 무늬와 색채를 써서 미장 바름을 한 담장을 꽃담이라고 합니다. 위 사진에서 기와 아랫부분에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여러 색깔의 전돌을 깔아 쌓은 부분을 꽃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담은 아래에서부터 기단, 몸체, 지붕으로 구성됩니다.
기단은 담장의 기저부를 이루는 토대로 화강석을 반듯하게 다듬어 놓은 장대석을 한 단 또는 두 단으로 쌓거나, 같은 크기로 작게 잘라 놓은 사괴석을 여러 단으로 쌓아 조성합니다. 몸체에는 주로 전돌이 사용되는데, 전돌은 담장의 높이를 형성하는 구조체이면서 꽃담의 문양을 표현하는 장식재로도 사용됩니다. 꽃담의 상부는 한옥과 마찬가지로 기와 잇기로 마감하거나, 벽돌을 두툼한 두 겁 벽돌로 얹어서 지붕을 형성합니다. 꽃담의 지붕은 담장 몸체에 우수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며 담장 안쪽 한옥과의 일체감 있는 경관을 형성합니다.
정관헌(靜觀軒)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습니다. 궁궐 후원의 언덕 위에 세운 휴식용 건물입니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이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로마네스크)을 혼합하여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바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에서 1년 과정을 수료하고 러시아 해군 양성소에 입교하여 항해사가 된 후 블라디보스톡의 극동함대에 임관하였습니다. 1883년 24세 때, 조선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P.G. Mollendorff)에게 토목기사로 고용되어 벽돌 만드는 가마를 지었습니다. 이후 제물포에 정착하여 인천 항해 관사(1883), 인천항 부두(1884),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1888), 러시아 공사관(1890), 독립문(1897), 경복궁 관문각(1892) 그리고 덕수궁 정관헌 등 많은 서구식 건물을 설계하였습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직후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러시아로 귀국하였으나 20여 년간 조선에서 30~40대를 보낸 탓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시베리아와 우랄지방을 방랑하다가 1921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건축은 1920년대에 등장한 인도차이나 양식(20세기 초 토착 건축과 서양 건축의 절충 양식)의 시초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용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정관헌에서 고종은 ‘양탕국’ 혹은 ‘가배’라고 불리던 커피를 즐겨 마셨으며,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외빈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전통 양식이 가미된 서양식 정자로 지어진 대한제국 카페 1호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때는 이곳에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처음에는 카페로 세운 건축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증거로 석조 기둥 사이가 벽체로 채워진 초기 정관헌 사진이 논문에 제시된 바 있습니다.
경운궁 내 정관헌은 침전인 함녕전과 편전인 덕홍전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록 궁궐의 북쪽 후미진 곳에 자리 잡았지만, 언덕 위에 있는 까닭에 그 이름의 뜻처럼 휴게 시설로 사용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관헌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1) 궁궐 내에 지어진 다른 서양식 건축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건축 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2) 정관헌이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정관헌의 건물 구조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직사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내부 공간은 중심부의 내진과 바깥쪽 둘레인 외진으로 구분하였고, 지붕은 얇은 동판을 간결하게 이어 시공하였습니다. 지붕 합각의 꼭짓점에는
물고기 모양 일본식 철물, 현어(懸魚)를 달았고 그 아래 원형 비늘 살창도 일본식이라고 합니다. 일제가 1930년대 지붕을 고칠 때 덧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내부구조는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 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입니다.
처마를 지지하는 기둥의 화려한 장식과 처마 안쪽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은 이 건물이 서양식 건축양식을 도입한 것을 증명해 줍니다.
지붕 아래 바깥쪽으로는 얇은 동판을 이어 붙여 차양으로 삼고 그 아래를 목조 기둥인 외진주(外陣柱)로 받쳐 컬로니얼 양식 베란다를 만들었습니다. 기둥에는 길게 여덟 줄 플루팅(fluting)을 새겼습니다. 화려한 기둥머리 목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로 댄 낙양 장식과 함께 정관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 바로 눈에 확 들어옵니다.
주두 위에는 연홍빛 꽃병 받침(사진에는 숨겨져 있음) 위에 연초록 꽃병을 얹고 꽃 박쥐 구름 문양을 선으로 새기거나 그려 도안화한 초화 무늬를 넣었습니다. 꽃병마다 꽂힌 꽃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각기 모란, 국화, 매화로 변화를 줬고 꽃봉오리를 머금은 모습이나 활짝 핀 정도도 조금씩 달라 다양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화병을 불교에서 보배롭고 상서로운 병이라는 뜻에서 보병, 길상병, 여의병이라고 부르듯 궁궐 장식에서도 비슷한 의미를 지닐 듯합니다.
베란다 나무 기둥의 머리에는 이오니아식 문양과 아칸서스 잎의 조각, 그리고 가운데에 분홍빛 꽃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위에는 이국적인 꽃병도 놓여 있습니다. 이오니아식의 볼류트와 함께 아칸서스 나뭇잎을 조각해 놓은 것은 고대 건축의 3가지 양식에 추가된 컴파지트(복합식) 양식에 해당됩니다.
정관헌과 같이 서양 건물에 설치된 베란다는, 유럽 국가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고온다습한 기후에 적응하려고 그들의 건축 양식을 새롭게 변형한 형태라고 합니다. 대한 제국기의 서양 건축물에 베란다가 등장하는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베란다 건축 양식이 청나라를 거쳐 조선에 도입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를 볼 때,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은 상당히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설계사였거나 모방의 달인이었을 거라는 심증이 굳어집니다.
내진주는 석조 기둥처럼 보이지만 콘크리트를 갈아낸 인조석입니다. 노르만과 영국에서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인데요, 커다란 주두에 비해 기둥이 너무 짧아 둔해 보입니다.
1930년대 사진을 보면 원래 이곳은 트인 공간이 아니라 벽돌 벽체를 세워 가운데 어칸에 판문을 내고 문 위에 정관헌이라는 편액도 걸려 있었습니다. 그 뒤 벽돌 벽체는 헐어내 내진주로 처리하고 바닥은 마루에서 콘크리트로, 지붕 장식은 일본식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문을 냈던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지요. 기둥머리 주두가 덕수궁 뒤쪽 성공회 성당 주두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나중에 내진주를 세우면서 성공회 양식을 참고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정관헌 안쪽의 벽돌 벽체를 보면, 화강암 기단 위에 적벽돌을 쌓고 모서리는 회색 전벽돌로 처리해 요철 모양(quoin)을 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거칠게 다듬은 대리석 마감 기법(rustification)을 벽돌로 흉내 낸 것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근대 건축물에 즐겨 썼던 양식이라고 합니다. 사바틴이 중국 건축현장에서 배웠던 것을 들여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 정관헌 건축양식에 대하여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정관헌의 처마를 지지하는 베란다의 나무기둥은 콤퍼지트 양식[composite order]을, 내부 기둥(인조석, 시멘트 물 씻기 기법으로 돌처럼 보이게 만들었음.)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붕은 한국 전통의 건축양식인 팔작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목재기둥 사이의 철제 난간은 소나무, 사슴, 덩굴무늬 등 상스러운 동식물 문양을 투각하였고 목재기둥 윗부분에는 박쥐문양을 집어넣는 등 한국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였습니다. 박쥐문양을 넣은 것은 박쥐의 한자 이름 편복(蝙蝠)의 蝠이 중국 발음으로 복 福자와 같아서 상스럽게 여긴 것인데 러시아 건축가가 이런 것을 감안하였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인조석 기둥과 철제난간 사이의 베란다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유럽 국가들(영국, 프랑스 등)이 고온다습한 동남아 식민지 경영을 통하여 새로 도입하게 된 건축 스타일(콜로니얼 스타일)입니다. 정관헌은 아시아 지역의 가장 북단에 설치된 콜로니얼 스타일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암튼 건축양식으로 풀이해 볼 때, 정관헌은 요즘 말로 융합적 사고로 직조된 이색적인 건축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같이 새로운 것에 혹하는 종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물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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