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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덕수궁 / 5 - 고종의 길과 덕수궁 돌담길

hittite22 2025. 4. 20.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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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 이어서)

 

 

 

 

덕수궁 내 연지(연못)

 

 

궁궐을 나와서 외곽에 떨어져 있는 중명전에 다시 가보려 정동극장을 지나 골목을 찾아드니 코로나19로 관람을 불허한다는 안내판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2021년 당시)

 

중명전 입구 안내판
중명전 전경

 

입구 창살 사이로 바라본 중명전 전경.

저곳은 을사 5적이 대한 제국을 일본에 넘겨준 치욕스러운 장소입니다.

 

 

고종의 길

 

 

고종의 길 코스 안내 
선원전에 있는 ①출입문(고종의 길이 시작되 문)을 지나 고종의 길을 따라 걸으시면 구 러시아 공사관(현 정동공원)이 나옵니다.(구 러시아공사관 방향 ②출입문에서도 자유롭게 입출입 가능)

관람안내
화요일 ~일요일(월요일 비공개) 9:00~ 18:00(입장마감은 17:30입니다)
⇒ 동절기(11월~2월) : 09:00 ~ 17:30 (입장마감 17:00)
⇒ 하절기(3월~10월) : 09:00 ~ 18:00 (입장마감 17:30)

입장료는 없습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의 현재모습 [탑만 남았습니다]
고종의 길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입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당시 머물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관파천 하였을 때 마냥 러시아 공사관 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미국 공사관 북쪽을 지나 영국 공사관까지 이어졌던 이 길은 1892년 미국 공사에 의해 미국 공사관의 이면 도로로 개설되었습니다. 2011년 미국과 토지 교환을 통해 해당 영역이 우리나라 소유가 되었고, 서울시에서는 미국 공사관의 측량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1896년의 도면과 1900년대 초 촬영한 옛 사진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고종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고종의 길은 그야말로 길만 뎅그라니 복구해 놓은 것뿐

 

폭 3m, 길이 120m의 오붓한 돌담길을 걸으며 아픈 역사를 곱씹어 봅니다.

고종의 길로 이어지는 골목은 선원전 복원 사업으로 인해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림막에 조선 저축은행 중역 사택 전경 등 과거 흑백사진이 붙어 있어 이곳의 예전 풍경(물론 고종 이전의 원래 풍경은 망실되었음)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선원전 복원 대상이 되는 공간은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고..
멀리 덕수궁 측 고종의 길 출입구가 보입니다.

 

군데군데 경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문화재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원 대상인 선원전 터
이 길을 걸으며 고종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그리고 이 길을 걸으며 오갈 때마다 고종은 얼마나 쪽팔렸을까요?

 

2016년 발표된 자료. 지금은 얼마나 갖추어졌을까요?
덕수궁 복원 조감도


덕수궁 복원 조감도입니다.

구 러시아 공사관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 보이고, 선원전 영역을 찾아볼 수 있으며 2023년 복원된 대한제국의 영빈관인 돈덕전의 위치도 나옵니다. 그리고 미영러 외교관저가 다 드러나 보입니다.

 

2023년 복원된 돈덕전 전경

 

덕수궁 돌담길

 

학창 시절, 데이트하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커플이 깨진다는 속설이 떠돌았습니다. 학창시절 애인이 없었던 연고로 여학생과 같이 걸어보진 못했지만.. 그런 속설이 나돌던 근원은 돌담길 자체가 일주하지 못하도록 도중에 끊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하나의 근거 혹은 실제에 근접하는 속설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바에 따라, 현재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변한 서울 가정법원이 덕수궁 돌담길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돌담길을 완주할 수 있는 통로가 뚫렸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재임할 때 그런 성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덕수궁 돌담길 검기를 시도한 2021년 저에게는 박원순 시장도, 학창시절 덕수궁 돌담길의 속설도 모두모두 다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좋은 현상인가요?

 

 

새로 오픈된 돌담길. 중간중간 쉴 수 있는 벤치도 갖추었습니다.
알림 표지판

 

영국 공사관에 조차하였던 공간을 양국의 합의하에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표지판을 설치한 박시장은 저세상에서 잘 있나 모르겠군요.

 

암튼, 이 길을 막아 놓은 연고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선남선녀들이 덕수궁 돌담길 걷기를 주저하였었는지 영국 정부와 영국 외교관들은 알고 있었을까요? 궁금하면 오배건..

이라고 개그 멘트를 허공에다 날려봅니다.

 

길은 반반하고 말끔합니다.
붉은 벽돌 건물은 영국 대사관입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한 바퀴 다 돌 수 없었던 것은

영국대사관저가 있는 부분(구간)이 막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는 자신들이 끊임없이 설득하여 영국대사관저 앞을 개방하는 데 성공하여 일주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자화자찬하였습니다. 서울시의 설명에 따르면 2014년부터 덕수궁 돌담길을 잇는 사업을 추진해 왔고, 2016년 8월 영국 대사관 후문 쪽 100m 구간을 반환받아 먼저 개방했으며, 영국 대사관과 협의 후 남은 구간을 연결했다는 것입니다. 반세기를 웃돌아 꼬박 59년 만에 덕수궁 둘레길 전 구간이 이어진 셈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미국대사관저를 지나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위 사진으로 보는 영국대사관저 앞에서 덕수궁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국 대사관과 협의하여 남은 구간을 연결했다'는 문장을 Jtbc가 유행시킨 '팩트체크'로 알아보면, 덕수궁 안쪽으로 길어 터서 돌담길을 완전 잇는 데 성공했다고 해석됩니다.

아래 이어지는 사진이 그 증거가 되겠습니다.

 

일부 구간은 덕수궁 내부로 뚫려 있습니다.

 

고로, 전체 둘레길은 100% 둘레길이 아니라 일부 안길도 포함된 둘레길이 되어버렸습니다.

덕수궁 내부를 볼수 있으니 이것도 괜찮네요.

 

개방한 길은 흙을 돋우고 야자 매트를 깔았으며, 덕수궁 방문객과 동선을 분리하기 위해 끝자락에 목재 난간 설치한 것이 보입니다. 목재 난간을 벗어나면 세실극장을 지나 세종대로 방면으로 이어지는 돌담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담장 안쪽의 오래된 회화(槐花)나무. 속이 뻥 뚫려도 살아서 잎을 냅니다.
이 나무(회화나무)는 중국과 한국이 원산지입니다.
덕수궁 내부통로 구간에서는 정관헌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개방된 구간을 걸어보면 느끼시겠지만 영국대사관과 합의는 부분 개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부 구간은 덕수궁 안쪽 가장자리로 보행로를 터서 돌담길이 아닌 구간(담장 안길)으로 돌담길을 억지 이어 맞춤하였으니 말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정관헌을 돌아 왼쪽으로 나가야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이어 걸을 수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서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행선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왠지 부러워 보였는데 따라 해 보니 씁쓸함이 배어 나왔습니다.

 

넘겨다 본 덕수궁 내부
시청과 영국대사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
세실극장
영국대사관

 

이번에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덕수궁 돌담길의 백미는 새로 개방된 구간이 아닌 이전부터 통행되던 덕수궁 오른쪽 담장길입니다. 덕수궁 담장 안팎의 오래된 나무들이 계절마다 빛깔을 바꾸는 그 길을 걷다 보면 서울 시립미술관에 못 미쳐서 왼쪽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서울시 서소문 분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건물 13층의 정동 전망대가 서울 시에서 가장 고궁 사진 찍기 좋은 View를 간직한 곳입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덕수궁 돌담길의 복원구간을 걸어 서울 시청광장 쪽으로 나오면 왼쪽으로 영국대사관 입구가 있고 그 옆길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이어집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은 담장이 없어 그냥 길을 따라 들어가면 성당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제일 먼저 만나는 건축물은 성당이 아닌 경운궁 양이재입니다.

 

경운궁을 고쳐지을 때인 1905년에 세운 전각이었던 양이재는 당시에 함희당(咸喜堂)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싼 일곽은 홍원(紅園)이라 불렸습니다. 홍원 일대는 1906~1910년까지 대한 제국의 황족과 귀족 자제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대한성공회는 1921년부터 이곳을 임대해 쓰다가 그 후 사들였는데, 현재 양이재는 대한성공회의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뒤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양이재 전경
양이재의 처마

 

서울은 그 이전 조선 개국으로 왕도 한양이었던 시대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국가시책에 따라 종교적 색채가 존재하지 않았던 도시였습니다. 비록 조선이 숭상한 유교가 유학의 종교적 관점을 부각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전까지 숭배해왔던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이를테면 불교가 극락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유학(유교)는 인본주의 철학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묘와 사직단 시설이 한양에 있었다고 하나 종교적 건축물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 서양 종교(천주교와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서울에 랜드마크적 성격을 가지는 종교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자타가 인정하는 명동성당이 천주교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98년이었습니다. 명동성당 건립 30년 후인 1921년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들어서고 다시 5년 후인 1926년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건축됩니다.

 

이정표
서울주교좌성당 전경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한국 성공회의 중심 성당입니다.

1891년 초대 조선교구장 고요한 주교가 세운 한옥성당(장림 성당)으로 시작했으며, 영국 건축가 아서 딕슨(Arther Dixon)의 로마네스크 성당 설계에 따라 1922년 조마가 주교가 착공하여 1926년에 미완성 축성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원래 설계도 전체를 찾아 남은 부분을 확장하여 완공하였고, 현재 성당은 전형적인 서양 건축양식에 한국의 전통미를 조화시킨 역사적 건축물로 인정받아 서울시 유형문화재(제3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분주한 도심 속에 기도와 예배의 공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그리스도교 전례 영성과 더불어 교화 일치운동과 문화행사, 그리고 사회정의 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제공]

 

사제관
사제관의 소박한 화단

 

사제관 앞에 조그마한 화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 화단 아래로는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있습니다. 사제관으로 향하다가 화단 사이에서 뜻밖의 표지석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6월 민주항쟁 10주년 기념석. 알고 보면 80년 서울의 봄 세대인데..

 

서울주교좌성당의 안뜰 주차장

 

서울주교좌성당은 대한성공회의 모태와 같은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0년대에 시공된 이 성당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십자가 형태의 화강암과 벽돌로 지어진 국내에서 유일한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만 주목할 것은 아닙니다. 기와지붕 등 한국 전통 건축양식을 도입하여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냄으로써 바로 옆의 덕수궁과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배려한 건축 철학이 내재된 성당이기도 합니다.

 

 

유럽의 건축은 로마네스크(Romanneque), 고딕(Gothic), 르네상스(Renaissance), 바로크(Baroque)의 네 가지 양식에서 시작됩니다. 시대별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 순으로 건축이 발전되어왔습니다.

여기서 로마네스크(Romanesque)는 로마(Roman)와 양식을 의미하는 Esque의 합성어입니다. 보통 6세기에서 11세기경 유럽 중세의 건축양식을 의미하며, 로마 지역에서 유행했던 건축양식과 매우 유사한 느낌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대체적으로 건물이 투박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며, 현재에도 유럽 각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외관에서 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식 반원형의 구조물입니다. 종탑과 같이 건축물 구조에서 높게 뻗어 나온 지붕 등이 반원형을 이루며, 창문과 문 역시 아치형을 그리고 있습니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은 원통형 볼트와 교체 볼트로 구성되어 그리스 로마의 신전 등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으로 구성됩니다.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물은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 영국의 런던탑 등이 있으며 한국에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천주교 전주교구 전등 성당, 천주교 원주교구 횡성성당 등이 있습니다.

 

 

그럼 유럽 각국별로 분화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1)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특징은 "라틴 크로스 평면, 화강석 재료, 트랜셉트와 동쪽 외진 성직자 영역의 반원형 Chapel"이며

2)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은 "크고 작은 육면체 덩어리를 덧붙여 기하학적 구성을 이루고 붉은 벽돌을 섞어서 장식 효과를 내며"

3)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은 "깜빠닐레(Campaile)로 볼 수 있는 첨탑을 붙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의 내부를 보면 "다발 기둥 없이 단일 기둥 열을 세웠고, 석조 볼트(Vault)가 아니라 목조 트러스트(Truss)로 천장을 짰으며, Nave Wall의 창 구성을 삼분법이 아닌 이분법을 적용한 점"으로 보아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이 지배적으로 반영되었습니다.

 

 

이 성당 건물에 융합된 전통 건축의 요소로는 처마 장식, 창살 문양,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상(Stained Glass Color), 지붕 기와 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처마의 경우 길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랐지만 처마와 만나는 몸통 부분에 지지 부재를 전통가옥의 공포 구조에서 빌려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살의 분할도 한옥의 창살 형태를 적용했습니다. 성당 지붕의 윗부분은 서양식 빨강 기와를 채택하였으나 낮은 지붕에는 한국 전통기와를 얹었습니다. 또한 중간 벽에 반쪽만 돌출된 지붕들은 모임지붕을 하고 있어 동서양의 지붕과 기와가 공존하는 그림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예수 그리스도. 식스팩이네요.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을 도입한 것은 처음 건축 계획 수립 때부터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습니다. 서울주교좌성당의 최우선 과제는 '덕수궁과의 조화'로 이는 설계 초기부터 정해진 일종의 기본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그 원칙의 기준에 의해 채택된 것이 둥근 아치 형태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습니다. 선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단아한 형태를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은 한국적 특성과 조화를 갖추는데 손색이 없었습니다.

지붕은 돔 형식 대신 주황색 기와를 올렸으며, 천장과 아치형을 취해 로마네스크 양식을 충실히 따른 창문은 동서양의 조화라는 미학적 가치를 달성하고 있습니다.

베란다부의 아치는 수긍이 가지만 벽돌로 채워진 부분에 아치구조를 배치한 이유는 뭘까?

 

일반적으로 성공회 서울 대성당을 가리켜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국의 전통건축 양식과 가장 잘 혼합된 근대건축이라고 평가합니다. 구교로 일컬어지는 천주교 건물은 고딕 양식(Gothic Style)이 주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와는 다른 성공회가 서울 대성당을 건립하려고 했을 때 고딕은 건축양식으로 선택사항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순교 추모비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역사를 돌이켜 보면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가 추방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순교자도 많았습니다. 성당 정면 왼쪽 아래 푸른 바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한국전쟁 중 죽은 여섯 순교자(한국인 신부 3명, 영국인 신부 2명, 아일랜드인 수녀 1명)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멀리서 보았을 땐 영국인 동상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보니 한국인입니다.
김마가 사제. 신심이 깊어 보입니다.
십자가가 푸른 바위에 박혀있습니다.
심플하지만 강한 인상을 줍니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꽤 높습니다.

 

성공회 서울 주교 대성당을 둘러보고 다시 덕수궁 돌담길 찾아서 길을 따라 걸어 나오니 시청 앞 대로가 이어지고, 일제가 건설한 (구) 시청 건물과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 쌓아 올린 신청사 모습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신청사는 DDP와 함께 오세훈 시장이 1차 재직하던 시기에 착공된 건축물입니다.

정면에서 볼 땐 그런대로 보아줄 만하지만, 측면 view는 영 아니올시다여서 한번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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