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예전 지도가 아직도 인터넷에서 활보하고 있습니다. 원래 위치로 이전하기 전의 광명문이 왼쪽 하단에 보이고 덕홍전 앞 원래 광명문이 세워진 위치에는 생뚱맞게 세종대왕상이 서 있습니다.
중화문


중화문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으로 드나드는 정문입니다. 중화문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공포양식은 중화전과 같은 다포양식(조선 후기의 수법)으로 지어졌습니다. 다포식이란 처마의 하중을 받으며 장식도 겸하는 공포를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세 개씩 배치한 방식을 말합니다.

1902년 건립된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같이 원래 2층 건물이었으나 화재 후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되면서 1904년 격을 맞추어 단층으로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고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문은 높이가 같은 세 칸을 나란히 배치시킨 평삼문(平三門)으로, 기둥을 높게 하여 정전 남문으로서 위엄을 살리고 있습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습니다.

그물 같은 차단막을 설치한 것은 단청을 새들의 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대 같으면 나일론으로 만들 수 있지만 조선시대였으니 구리로 만들었다는 것에 오배건을 겁니다.
중화전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으로, 보물 8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앞면 5칸, 옆면 4칸에 지붕은 옆에서 볼 때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처마 아래 공포는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화려한 다포식입니다.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습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중건되면서 단층으로 지어졌습니다.(1906년).

조선은 어째서 2층 이상의 건축물을 짓지 않았을까요?
중국 눈치를 보느라 못 지은 것일까요? 황제국으로 칭하였으면 새로운 궁궐의 메인 건축물은 3층 정도로 지어 위엄을 떨칠 만도 하지만 그러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그만한 건축비를 감당할 만큼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화재 후 중건할 때 2층이었던 정전을 왕국의 정전보다 못한 단층으로 지었던 것이겠지요. 제국이라 칭하였던 '거사'는 어쩌면 고종의 독단이자 몸부림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궁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 정전 안의 옥좌입니다.
중화전 내부 뒤쪽에는 옥좌가 놓이고 그 뒤로 일월오봉도가 서 있으며, 천장은 보개를 단 닫집으로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여기서 '닫집'이란 궁궐이나 절간에서 옥좌나 불상을 감싸는 작은 집, 또는 옥좌나 불상 위를 장식하는 덮개를 말합니다. 전각의 실내 기둥은 바깥 기둥보다 높게 세우기 때문에 고주(高柱)라고 부르고 바깥 기둥은 평주(平柱)라 합니다.
중화전의 어좌와 어좌를 둘러싼 나무병풍인 곡병(曲屛)은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가치의 핵심입니다. 이 어좌와 곡병은 현존하는 유물 중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산으로 평가받습니다.


위에 소개한 사진처럼 일반 병풍보다 폭을 넓게 하여 두 폭으로 만든 병풍을 곡병이라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머리맡이나 방구석을 가리거나 치장하기 위하여 친다고 합니다. 중화전 어좌 뒤를 두르고 있는 곡병(曲屛)은 나무병풍으로, 9개의 용두(龍頭, 용머리 모양의 장식 기와)를 가지고 있고, 청판(廳板, 곡병의 면을 이루는 판)에는 용, 모란, 초엽 등 다양한 문양이 투각 되어 있습니다. 투각(透刻)은 조각 기법의 중 하나로 재료의 면을 도려내거나 깎아서 원하는 무늬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중화전의 내부 공간은 텅 비어 있고 어좌만 놓여져 있습니다. 뭔가 밀랍인형 같은 현대 기술이 접목된 볼거리를 만들어두면 더 애정이 가는 공간으로 변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 보았습니다. 좌석 폭이 넓어서 한 사람의 밀랍인형을 올려놓으면 좀 썰렁해 보이기도 하겠네요..^^

어좌가 올라가 있는 좌탑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안쪽 중앙에 고주 넷을 세워 황제가 앉는 어좌를 놓고 그 위에 닫집을 얹어 꾸몄으며 우물천장 중앙에는 움푹 들어간 감입천장을 만들어 쌍룡으로 장식했습니다. 당가(어좌와 좌탑을 둘러싼 조형물)의 천장에는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두 마리의 황금룡이 꿈틀대며 마주 보는 모습으로 용트림하고 있습니다. 천장의 가운데 틀을 위로 올린 다음 그 내부에 구름 속에서 노닐고 있는 쌍룡을 조각해 넣은 것인데, 두 마리의 용은 통통하고 기름진 모습을 하고 있어 중국 내음이 묻어나옵니다.
용문양은 발톱의 개수에 따라 칠조룡, 오조룡이라는 용어로 구분하여 칭하고 있습니다.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 천장에 새겨져 있는 용은 오조용입니다.
왕의 직계가족 중에서 왕과 왕비는 오조룡(五爪龍),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룡(三爪龍)의 보를 사용하였다고 전해 집니다.

중화전 내부 바닥은 전체적으로 전돌을 깔아놓았습니다.
다만 황제의 통로(어도)는 마루를 놓았습니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대한 제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장소이므로 용문양을 새긴 천장과, 용문양의 답도, 그리고 황제를 뜻하는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위 사진으로 보니 창틀을 통해 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네요. 그럼, 경복궁의 창호색은? 확인해 봐야겠네요.
암튼, 이곳은 힘이 약했던 아니 거의 없었던 고종과 순종입장에서는,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자주국가로 살아남기 희망했던 대한제국 황제로서 몸부림을 처댔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중화전 내부에는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인 것을 살표보았습니다.
이제 중화전에서 내려다보는 돌마당을 바라다보면,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이 분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중화전은 임금이 하례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덕수궁의 중심 건물입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 집무실과 국회의사당의 기능이 합쳐진 혹은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이 정전 외부에는 용도에 조금 미흡하게 난간이 없는 상하단 월대를 두었습니다.

월대 가운데에 놓인 계단 중에서 한 단의 윗면 수평 부분을 디딤단(답단 踏段), 앞면 수직 부분을 챌면(축면 蹴面), 계단 측면을 막아 댄 돌을 소맷돌, 또는 옆막이돌, 계단을 몇 개로 구획 짓는 돌을 경계석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가마를 탄 채 위로 통과하는 가운데 판석을 답도(踏道)라고 부릅니다.

조선 궁궐의 계단은 디딤단을 제외한 모든 곳에 문양과 조각상이 가득해 전통 장식미술의 보고라고 할 만합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의 경우 궁궐 정전 중에 유일하게 계단 양쪽 소맷돌 위에도 격식을 갖춰 난간을 세웠습니다.



2단으로 구성된 상하단 월대에는 돌난간이 없어 단순한 느낌이지만 월대 중앙의 해태와 답도에 새겨진 두 마리의 용이 황실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대 궁궐 중 다른 세 정전의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해태(해치라고도 함)는 뿔을 하나 가진 상상의 동물로 영물로 여겼으며 불에 약한 조선 궁궐을 수호하는 방화의 수호자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되어 석상이나 청동상의 건립이 활발하지 않았던 탓인지 해태 상과 답도에 새겨진 용의 부조가 조각하기 어려운 화강석의 재질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섬세함이 떨어지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상단의 답도는 매우 조악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드므>란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그 안에 물을 담아 놓으면 불귀신(火魔)이 왔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으며 화재가 나면 실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기로 볼 때, 실제로 대화재가 일어났던 1904년 중화전의 화재를 막을 만큼 소용이 컸다고 보기는 힘들듯싶습니다.

월대 위에 정전의 주춧돌과 기둥을 세우는 기단이 있고 이곳의 동서 모서리부에 커다란 청동 향로같이 생긴 항아리가 놓여 있습니다. 정(鼎)이라고 불리는 이 기기는 원래 고기, 물고기, 곡물을 취사하는 토기로서 출현했지만, 동시에 종묘에 조상신을 모실 때 제물을 익히기 위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기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청동기인 정(鼎)은 국가의 군주나 대신 등의 권력의 상징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왕권의 상징으로서의 정(鼎)은 다리가 세 개 있어야 안정되기 때문에 삼정(三鼎)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중화전 둘레에 행각이 복원되면 저 공간에 공간감이 많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석어당(昔御堂)
기존 조선(대한 제국)의 궁궐 건축물 중에서 인상적인 매력을 품고 있는 석어당, 아울러 쌍둥이같이 붙어 있는 즉조당과 준명당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덕수궁은 한국에서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궁궐이기도 합니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서 건축물들을 생각 없이 건성으로 훑고 지나가더라도 특이하게 도드라지는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덕수궁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 할 수 있는 석어당입니다. 언뜻 보아도 느낌이 다르게 와닿은 건물인데요, 저 같은 경우 일본 교토의 은각사에서 받은 느낌과 유사한 인상을 석어당 건물에서 받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단청을 칠하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또한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목조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 집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모두 불타자 선조가 머문 곳이고,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독약으로 죽이고 영창대군의 친모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장소이기도 합니다. 폭정을 일삼던 광해군이 결국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된 후 인목대비에게 끌려와 석고대죄하던 곳도 석어당이었습니다.
원래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으나,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역대 국왕들은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이곳에서 선조(宣祖)를 추모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역사의 교훈을 뼈에 새기지 않고 추모만 하였던 것일까요? 결국 조선은 일본에 먹히게 되고 말았으니 석어당이 후대의 국왕들에게 교훈을 뼈저리게 내려주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석어당 내부관람은 매해 봄철에 덕수궁 전각 내부관람 행사를 시행합니다.
공지가 뜨면 선착순 접수하여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대개 3월 말에서 4월 초 살구꽃이 개화할 때쯤 행사가 진행되니 참고하여 기회를 잡으시면 됩니다.

왕비와의 사이에 아들(후사)을 두지 못한 선조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후궁인 공빈 김 씨 소생 광해군을 서둘러 세자에 책봉한 뒤 자신은 평양과 의주로 도망가고 광해군에게는 민심 수습과 군량, 무기 조달을 시키는 조정 분할을 단행했습니다. 선조는 참...
반면에 광해군은 기대 이상으로 역할 수행을 잘하여 세자 자리를 굳혔습니다. 하지만 임란 후 선조가 임시 행궁(시어소/時御所) 내 석어당에서 나라를 다스리던 1600년 왕비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2년 뒤 33살 연하인 18세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아들이고 이어서 적자(嫡子) 영창대군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선조는 궁궐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성질이 급했는지 석어당 거주 15년 만인 1608년 떡을 먹다 기도가 막혀 뒈지고(승하), 어부지리로 광해군이 석어당 바로 옆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기도가 막힌 상태에서 말은 할 수 있었는지 선조는 승하하기 직전 중신들에게 어린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즉위 5년째이던 1613년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를 처형하고 여덟 살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한 후 이듬해 증살(蒸殺, 밀실에 가두고 불을 때어 죽임)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마지막 세력인 인목대비(김 씨)는 1615년 이곳 석어당에 감금하고 1618년 '서궁(西宮)'이라는 이름으로 격하, 유폐시킵니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 씨가 석어당 감금 생활한 내용을 알아보면 절절하기 그지없습니다.
쓰레기를 버릴 만한 빈터가 없어 악취가 가득했고 구더기가 방 안과 밥 지어먹는 솥 위에까지 끼어 물로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생필품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나인들이 여러 차례 불을 질러 목숨의 위협도 느꼈습니다. 인목대비를 수발들던 측근 나인 또는 딸 정명 공주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습니다.
"쌀을 일 바가지가 없어 소쿠리로 쌀을 일었다. 나인들은 솜도 없이 칠팔 년 겨울을 지냈다. 햇솜이 없어 추워 벌벌 떨었는데 우연히 면화씨가 섞여 들어왔다. 그것을 심어 씨를 냈더니 두세 해 때는 많이 피어 솜옷을 지어 입었다. 사계절이 지나도록 햇나물을 얻어먹을 길이 없었는데 짐승의 똥에 들어 있던 가지, 외(참외), 동화 씨를 심어 나물 상을 차려먹을 수 있었다."
아, 이 대목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인목대비는 친정아버지와 아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딸자식이 있어 목숨을 모질게 부지했었나 봅니다.
세상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 현대사에서 진보-보수 정권이 엎치락 뒤치락하듯 세상은 다시 뒤집힙니다.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계모이긴 했지만 왕실 법도로는 엄연한 어머니를 유폐시킨 광해군의 폐륜은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이 됐습니다.
반정이 성공한 이튿날 능양군(인조)은 석어당 앞마당에 자리를 깔고 인목대비에게 절하며 "혼란 중에 겨를이 없어 이제야 와서 황공하옵니다"라며 죄를 빌었습니다. 이른바 왕실 큰 어른으로부터 반정의 정통성을 승인받는 절차를 밟자, 인목대비는 능양군에게 옥새를 넘긴 뒤 바로 왼쪽 별당, 훗날의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루 뒤 강화도로 유배돼 떠나는 열한 살 연상 광해군을 석어당 앞마당에 꿇어 앉혀
"내 부모를 형살하고, 내 종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품 안의 어린 자식을 빼앗아 죽이고, 나를 유폐해 곤욕을 주는 폐륜의 죄"
를 문책하여 석어당 8년의 한을 풉니다.

인조가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 뒤 270여 년 동안 경운궁은 궁궐로서 기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 뒤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각들을 지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경운궁은 행궁, 별궁에서 정궁(正宮)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그 출발점이 되는 건축물인 석어당은 그러므로 매우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1904년 대화재로 불타자마자 고종은 즉조당과 함께 석어당을 맨 먼저 복원키로 하고 이듬해인 1905년 8월 완공시킵니다. 그렇게 중요한 궁궐 전각인데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곳이어서 그때를 잊지 않으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요? 선조가 개차반에 버금가는 왕이었지만 그래도 왕은 왕이니 생각이라는 것도 있기는 했겠지요.

멀리서 전체 건물을 다시 한번 화면에 잡아 보았습니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세련되고 고상한 아름다움이 석어당 건물에서 듬뿍 묻어 나옵니다. (진짜 자금성은 규모만 컸지 세부사항의 마감은 너무 엉성합니다..)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태양에게서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오는 봄날, 상춘객 사이를 걸어가 검정 기와지붕 아래로 짙은 갈색 문살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는 전통 한옥의 색감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보시면, 괜히 마음에 들뜨고 괜히 기분이 상승하는 느낌을 얻게 되실 겁니다.
자, 건축물을 한번 살펴보시지요.
2층 처마 끝(중앙에서 정면으로 향하는 부분)의 곡선이 보이시나요?
2층 처마 끝은 정확히 직선을 유지하지 않고 중앙의 끝단이 살짝 올라간 느낌을 줍니다. 중건하면서 당시의 건축미가 반영된 것인지 애초부터 그리 설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건축학적으로 어떤 기술이 개입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지붕의 각도와 높이는 날씨의 영향을 고려하여 설계하는 것이니 말이죠. 암튼 저에게는 곡선이 주는 아름다움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마릴린 먼로가 환풍구 앞에서 치마를 잡으려 해도 상승기류에 올라가는 치맛자락 같은 환시가 일어나는 듯하기도 합니다.

선조가 피란에서 돌아와 석어당에 들었던 환도(還都) 사건의 삼주갑(三週甲/ 180년)이 도래하자 후대의 영조대왕은 배례를 올리기 위해 석어당을 찾습니다. 세손 정조를 데리고 온 영조는 두 전각에 석어와 즉조라는 이름을 내리고 편액을 친필로 작성하여 달았습니다. 여기서 석어는 옛날(昔)에 임금(선조)이 머물렀던 임어(臨御)의 집, 즉조는 조상(祖)들(광해군과 인조)이 즉위(卽)한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층에 걸려있는 현판은 중건 후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왕의 고문에 대비할만한 재상)이던 김성근이 썼고, 1층 내부에 있는 편액은 고종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2층의 현판을 정 중앙에 배치하려면 6칸 건물이기 때문에 중앙 기둥에다 현판을 걸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군요. 기둥은 튀어나와 있어 그곳에 현판을 달면 모양새가 경박스러워질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현판을 약간 비껴 나게 걸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성근은 도승지, 이조판서를 지낸 근대 명필이었지만 일본 제국에 협력하여 자작 작위를 받는 친일파로 변절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편액은 살아남았군요.



고종이 쓴 1층에 걸려있는 편액입니다. 고종 현판을 보면 '석(昔)'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있습니다. 이는 1905년(을사년) 7월 어느 날에 썼다는 뜻입니다.

이 나무는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입니다.
꽃이 피는 시기는 3월 말이라 하니 매해 신춘의 도래를 알리는 봄꽃입니다.
궁에서 보기 드문 2층 목조건축물인 석어당 앞에서 활짝 핀 살구꽃은 덕수궁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힐만한 곳입니다.

추녀와 귀공포가 드러나 보이는 사진인데 2층과 1층의 귀공포 형상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도 저는 석어당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빈티지(Vintage)라 하면 보통 이해하는 의미로는 '오래되고 개성 있는'이라는 뜻인데 원래 이 단어는 '포도가 풍작인 해에 정평이 난 양조장에서 양질의 포도로 만든 품격 있는 와인에 붙여주던 라벨'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석어당 건축에게 이 빈티지(Vintage) 라벨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불경스러운 상상인가요? 저는 기울어가는 제국에서, 그것도 대화재로 새 궁궐을 급조해야 하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상하고 매력 넘치는 한옥을 지어 올린 조상의 솜씨에 경의를 표합니다.

석어당의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건축미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단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화장하지 않은 생얼을 좋아하는 저의 취향 때문에 석어당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석어당 나무기둥과 같은 색깔의 재킷을 입은 젊은 여성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뉘신지 모르지만...



이 사진을 보니 소나무마저 석어당을 애정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 않나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준명당과 즉조당


준명당 &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현대 한국인의 소행이로군요. 의미를 찾는 노력도 불필요~?
즉조당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습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 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으로 구성됩니다.

준명당(浚眀堂)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1897년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었습니다. 앞면이 6칸인데 중의 3칸은 대청마루, 왼쪽으로 1칸, 오른쪽으로 2칸의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습니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준명당을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조선 중기에 준명당을 건축하면서 먼저 있던 즉조당 이미지에 맞췄거나 아니면 대화재를 전후해 새로 지을 때 연결복도를 통하여 일치시켰을 듯합니다. 하지만 준명당은 정면 여섯 칸으로 즉조당보다 한 칸 적어서 세 칸 툇마루를 들이되 두 칸만 대청으로 꾸미고 양쪽으로 방을 세 칸 들였습니다. 역시 전면 구조가 비대칭이고요. 복도와 연결되는 맨 오른쪽 칸도 한 단 높인 누마루로 즉조당과 대칭을 이룹니다.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은 이런 세세한 내용까지 알아둘 필요성은 없을 듯합니다.

준명은 다스려(浚) 밝힌다(明),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밝은 명(明) 자를 이루는 왼쪽 글자를 눈여겨보시면 날 日(일)이 아닌 눈 目(목)이 사용되었습니다. '밝게 보라'는 뜻을 강조하는 의미로 이렇게 편액 글씨에 애용되는 글자라고 합니다.

신하와 사신을 접견하던 준명당과 임금의 집무처였던 즉조당은 다락집 복도(雲閣)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화재 후 중건되었기 때문인지 두 건물이 애초부터 하나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고종은 모두 네 딸을 뒀지만 예순에 나인 양귀비에게서 얻은 덕혜옹주만 빼고 모두 한 살에 죽었습니다. 공주가 아닌 옹주로 칭했던 것은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준명당에 유치원을 꾸릴 만큼 덕혜옹주를 애지중지했다고 합니다. 영친왕처럼 일본에 빼앗기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고 1919년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덕혜옹주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다 1925년 강제로 일본으로 가 1931년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와 정략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더니 조현증(정신분열)으로 발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혼도 하였구요. 1962년 귀국 후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고종과 고종 관련 인물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불행한 말년을 맞이하였군요.

선조와 고종이 잠시 머물렀고, 인조와 순종이 즉위식을 한 즉조당,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한 준명당까지 덕수궁 내에 있는 전각은 저마다 사연을 안고 오랜 시간을 인고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잊혀가는 대한 제국의 역사적 공간으로 혹은 문화의 공간으로, 때론 휴식의 공간으로 일상에 지친 우리를 말없이 품어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즉조당(卽祚堂)은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 임금이 거처하던 궁전)로 사용하였습니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는 즉조당이라 불렸습니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은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습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습니다.


즉조당은 선조가 1593년부터 석어당과 함께 임시 행궁 시어소(時御所)로 썼던 곳으로 440년 전쯤부터 역사에 등장한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반면 준명당은 을미사변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1897년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덕수궁)으로 이어한 그 해 지은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며 인조 즉위 후 다른 건물들은 모두 원 주인에게 돌려주면서도 석어당과 함께 두 채만 남겨뒀을 만큼 중시했습니다.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1902년 중화전을 짓기 전까지 태극전 또는 중화전의 이름으로 정궁이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선조 이후 수백 년 동안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았다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후 석어당, 함녕전과 함께 맨 먼저 원형대로 복건 하였습니다.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왼쪽엔 온돌방 오른쪽엔 마루방을 두고 있습니다. 처마 아래의 지붕을 받치는 공포(栱包,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部材)는 기둥 위에만 꾸민 익공식입니다. 높은 돌기단은 긴 댓돌을 바른 켜쌓기로 높게 쌓고 윗면에 네모난 전돌을 깔았으며 대청에 맞춰 기단 앞쪽에 석 줄 계단을 놓았습니다. 단청을 하였지만 궁궐 건축물 치고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습니다. 즉조당 현판 아래의 넓은 공간이 대청마루입니다. 그런데 대청이 중앙 세 칸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한 칸 치우쳐 있어 정면이 비대칭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맨 오른쪽 한 칸과 대청 왼쪽 두 칸에 방을 들였고 맨 왼쪽 한 칸은 왼쪽 연결 복도와 높이를 맞추려고 기단을 한 단 높인 누마루입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제로 물러난 뒤 즉조당은 엄비, 엄귀비, 엄상궁으로 불리는 순헌황귀비(1854~1911)의 거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엄비는 다섯 살에 궁녀로 입궁해 명성황후를 수발하는 상궁이 됐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은 뒤 황후가 시샘하는 탓에 궁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10년 뒤 을미사변으로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곧바로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입궁해 보필합니다.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을 자신의 가마에 태워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엄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도 고종을 모시다 마흔세 살에 왕자를 잉태해 이듬해 덕수궁에서 영친왕 이은을 낳으면서 후궁에 책봉됩니다. 고종이 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엄상궁은 1903년 황귀비(皇貴妃)라는 독특한 이름과 지위를 얻으며 사실상 왕비 또는 황후의 역할을 했습니다.
엄황귀비는 용모가 빼어나진 않았지만 당찬 여장부로, 고종이 유일하게 믿고 기댄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고종이라는 남자는 단지 외모만으로 여성을 취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동행할 수 있는 자질을 먼저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엄황귀비는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요구사항을 잘 깨달아 여성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들여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전신 명신여학교를 세웠고 재정난에 빠진 양정의숙을 도와줬을 뿐 아니라 궁녀들도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시해당하기 전 명성황후가 시샘했던 이유의 일단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엄황귀비는 불탄 종로 상점 재건축 비용을 대주고 종로의 거지들을 보살핀 자선가이기도 했습니다.


한갓 궁녀의 신분에서 왕의 아내가 되기까지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여인으로 보이지만 정서적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아들인 황태자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가는 인간적 시련을 겪으며 한일합방 이듬해 1911년 즉조당에서 쉰여덟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 측이 내세운 사인은 장티푸스였지만 열네 살 영친왕이 일본에서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 숨을 거뒀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대청 양쪽으로 들인 세 칸 방 어딘가에서 그녀는 망국의 황태자일 수밖에 없었던 가여운(?) 아들을 그리다 숨져 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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