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드가는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는 사실주의자라고 불리기를 선호했으며 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드가는 뛰어난 데생 화가였으며 특히 무용수들의 무대나 목욕하는 여성 누드화에서 볼 수 있듯이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능숙했다. 드가는 발레 무용수들이나 목욕하는 여성들 외에도 경주마와 기수들, 초상화도 그렸다. 그의 초상화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외로움을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from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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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은행가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거의 마흔이 될 때까지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될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1876년 동생 르네의 파산 때문에 상속받았던 유산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립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박물관에 갔다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가업을 잇기 위해 부모님의 뜻을 따라 소르본 법대 진학을 압둔 상황에서 자신이 배우고 싶었던 그림공부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좋은 미술학교였던 '보자르'에서 그림공부를 했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당시에 발명된 문명의 이기 '카메라'에 관심이 많아서 '사진기로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 듯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한편으로 경마, 발레, 카페 등 근대화된 삶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고, 그중에서도 일상에서 소외된 세탁부, 재봉사 등 노동자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노동자 그룹에 속했던 발레와 무용수들의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무희들의 화가'라 불립니다.
에드가 드가가 발레리나의 그림을 많이 그린 이유는 발레 애호가로서가 아니라 삶의 이면을 성찰하는 관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당시 무용수들은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서’ 춤을 추었던 최하층민들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발레리나와 성격이 달랐고, 일종의 3D 직업군의 종사자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워 보이는 발레의 이면에 감추어진 청춘들의 고단한 삶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공연하는 모습 이외에 발레 수업을 받는 모습이나 발레리나들이 토슈즈를 벗고 쉬는 모습, 리허설하는 장면 등 무대 뒤의 풍경도 그림으로 많이 남겼습니다.
이처럼 발레리나들과 밀착된 작업을 하였지만 스캔들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프랑스 화가인데.. 아마 그것은 유년시절 바람난 어머니로 인하여 아버지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내면에 짙게 드리웠던 탓이었습니다. 따라서 발레리나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고된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그로 하여금 발레그림을 천착하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른 인상파화가와 구별되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작품의 특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드가는 고전회화에 관심이 많아서 구도, 화면의 조형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 자주 관찰되는 스냅사진처럼 인물이 화면의 중심에서 빗나가게 묘사된 것은 드가의 구도 계산에 의한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구도연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라면 세잔과 함께 드가를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드가는 실내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인상파 화가 중에서 카유보트나 르누아르도 실내풍경을 다수 그렸지만 드가의 실내풍경화는 본격적인 연구의 결과물로서, 이를테면 태양의 자연광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비쳤을 때 색의 변화를 어떻게 하면 잘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드가는 폴로 경기나 승마 그림도 그렸지만 절대적으로 발레리나 작품의 수효가 많습니다. 심지어, 드가의 유일한 청동조각작품도 발레리나였습니다. 무희들의 생활상을 많이 그렸던 것은 무희들의 움직임과 광선, 시각의 다양한 변화 등이 그의 관심을 끌게 한 때문이었습니다.
4. 드가는 유화 이외에 파스텔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당대에 툴루즈 로트렉이 석판화 작업을 많이 하였다면 드가는 파스텔화를 자주 그렸습니다. 파스텔의 부드럽고 불투명한 색조는 유화의 색상조합과 매우 비슷하지만 섬세하게 다루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재료였습니다. 드가는 파스텔화를 통해 유화 제작을 위한 습작을 많이 남겼습니다.
5. 드가는 대상에 따라 작품의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했는데, 초상화는 인상주의 화풍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전적인 기법에 충실하여 그렸습니다. 폴로 경기나 경마, 사냥 그림은 말이 등장하기 때문인지 거칠고 대담한 붓터치로 다이내믹한 느낌과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발레리나 그림들에서는 화사하고 세련된 색이 사용되지만 실내 풍경들이기 때문에 명암의 변화는 말 그림 보다 더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누드화는 빛에 의한 피부색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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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경력 초기에 드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약 40개의 자화상을 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드가가 École des Beaux-Arts(에콜 드 보자르 = 미술대학)에서 받던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이탈리아 장기 체류를 시작한 1855-56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제작된 자화상들은 렘브란트(Rembrandt), 앵그르(Ingres), 들라클루아(Delacroix)의 자화상에 대한 Degas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은 인상주의의 전성기 이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훌륭한 사례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비교적 작은 사이즈(26 x 19cm)로, 작가의 어린 시절 자아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이 자화상은 부드러운 모자를 쓴 젊은 에드가 드가가 45도의 각도로 주시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시선은 내성적이며, 느슨한 붓놀림으로 빛과 그림자를 어우러지게 하여 얼굴 윤곽과 모자의 질감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색상 팔레트는 흙빛을 강조하여 차분하며, 주황색 목도리가 구성에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이 미완성된 자화상은 30대가 채 되지 않은 중산층의 세련된 남자를 보여줍니다. 그는 장갑과 실크 모자를 착용하고,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인물화
드가는 1857-58년 로마에 두 번째로 머물 때 사용한 노트에 이 작품의 스케치를 그렸습니다. 원래는 생각에 잠긴 여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구상되었지만, 1860-62년경에 상상의 중동 도시 풍경, 분홍색 꽃, 두 마리의 붉은 황새를 추가하면서 이 그림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었습니다.
드가의 친척인 '벨레리 가족'의 초상화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 그린 것입니다. 중산층의 가정이지만 분위기는 아내의 차가운 표정과 남편의 반쯤 등을 돌린 자세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두 딸의 서로 다른 시선도 아빠와 엄마에 대해 가지는 감정을 대비적으로 표현해 낸 듯합니다.
이 초상화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마치 가정의 내부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느낌마저 일어납니다. 중앙에는 품위 있게 서 있는 아내가 어두운 드레스를 두르고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녀의 어린 두 딸은 흰색 앞치마를 입고 나란히 포즈를 취하는데, 왼쪽의 소녀는 엄마가 손을 얹혀 위로나 안도감을 얻는 듯 하지만, 앉아 있는 소녀는 시선을 돌리고 있어 엄마와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한편, 오른쪽에는 남편이자 아이들 아빠가 책상 뒤에 앉아 있는데, 세 사람의 여성 그룹과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는 어딘가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이 초상화는 가족의 모습을 묘사한 것을 뛰어넘어 개인의 성격과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 내에서의 상호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작품입니다.
드가의 초기 화풍은 고전적인 회화에 기초를 두었는데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에드가 드가가 마네를 만난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모사하는 중에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집니다.
눈에 띄는 꽃다발과 중앙에서 벗어난 인물이 오른쪽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는 드가가 일상적인 풍경 속의 개인을 포착하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 모델은 작가의 미술학교 친구인 폴 발팽송(Paul Valpinçon)의 아내일 것입니다. 드가는 시골집인 메닐-위베르(Ménil-Hubert)로의 나들이를 좋아했습니다. 만발한 꽃다발을 구성하는 달리아, 아스테르, 가일라디아 등으로 보아 아마도 는 늦여름에 방문했을 때 그린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드가의 여동생 테레즈는 1863년 나폴리에서 사촌 에드몬도 모르빌리(Edmondo Morbilli)와 결혼했습니다. 2년 후, 드가는 이 부부의 흥미로운 이중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들은 촉각과 복장으로 하나가 되었지만(그녀의 손은 그의 어깨에 얹혀 있고, 넥타이는 그녀의 앙상블과 같은 색조) 그림에서 뚜렷한 긴장감이 뿜어져 나옵니다. 에드몬도는 구성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며 아내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테레즈의 당혹스럽고 날카로운 시선은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분열된 배경은 부부를 더욱 갈라놓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상화의 전통적인 요소와 현대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 사진의 시각적 요소를 결합한 결과, 날카로운 유사성이 탄생했습니다. 드가는 가족 초상화를 판매하지 않았고, 1927년까지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에 촬영된 엑스레이에 따르면 드가는 그림의 손과 벽에 있는 일부 액자의 위치를 변경했으며 액자 바닥과 탁자 위의 종이 사이의 벽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때 이 작품의 모델이 화가 쥘 피노(Jules Finot)로 알려졌었지만 여러 드로잉 연구 결과 드가의 친구인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초상화로 확인되었습니다. Tissot 뒤 벽에 있는 작은 그림은 작센 선제후인 Frederick Wise의 Cranach 초상화 중 하나입니다.
유행을 선도하던 화가 제임스 티소는 1860년대와 1870년대 초에 드가의 친구이자 멘토였습니다. 스튜디오에 포즈를 취하고, 옆에는 실크 햇과 새틴 안감이 있는 케이프를 걸친 티소는 드가와 공유했던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는 캔버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국적인 일본식 그림, 현대의 여유로운 풍경, 그리고 이젤 뒤에는 16세기 또는 17세기 베네치아의 주제가 있습니다. 중앙에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현자 프리드리히(Frederick)의 초상화를 본떠 만든 사본이 있는데, 이전에 루카스 크라나흐 더 엘더(Lucas Cranach the Elder)가 그린 작품으로, 이는 북부 르네상스 예술에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조세핀 고젤린(또는 고젤린)은 파리 오페라의 무용수였고 나중에는 짐나즈(Gymnase) 극장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드가는 그녀를 여러 차례 모델로 사용했는데, 그의 작품 <Classe de danse(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발레리나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이 초상화에서 그녀는 전신을 감싸는 검은색 평상복을 입고 탈의실에 앉아 있습니다. 엄숙한 표정과 팔을 옆으로 꽉 쥔 절제된 태도는 카리스마 넘치는 미인이라는 그녀의 명성을 잘 드러내는 듯합니다.
그러나 초상화를 의뢰한 고젤린은 이러한 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드가는 1869년 파리 살롱(Portrait de Mme G...)에 이를 전시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은 수집가 가드너 부인에게 들어갑니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Isabella Stewart Gardner)는 인상주의 작품 수집가는 아니었지만 드가 작품에는 예외였는데, 이는 역사적 그림에 대한 그의 진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1893년 시카고 세계 콜럼버스 박람회에서 그의 그림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가드너 부인은 이 초상화 외에도 발레 무용수의 그림과 다른 그림 4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옆동네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드가의 작품인데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드가와 일생 동안 친분을 유지하였던 절친입니다. 1869년 드가는 마네가 그의 아내 쉬잔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쉬고 있는 장면을 그려 선물했으며, 마네는 답례로 자신이 그린 과일 정물화를 드가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드가의 그림을 본 마네는 피아노를 치는 아내 쉬잔의 모습을 칼로 잘라내 버렸습니다. 드가의 인간에 대한 냉소적 관찰력이 마네 부인의 초상에 분명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마네 화실에 마실 갔던 드가가 반토막 난 자신의 작품을 보았는데, 드가는 격노하여 당장 그 그림을 들고 화실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화실 벽에 걸어둔, 마네의 과일 정물화를 떼어내 편지와 함께 부쳤습니다.
“마네 선생, 당신의 ‘자두’를 돌려드리겠소.”
드가는 까다로운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일생 동안 솔로로 지냈으며 인상파 동료들에게는 ‘독선적인 선배’로 통했습니다. 그러나 마네는 이런 드가의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것은 드가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신의 작품 훼손에 화를 내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드가는 마네의 예술성을 인정하고 화가로서의 마네를 존경했습니다.
서양애들, 재미있습니다.
The Rape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Interior>는 드가의 작품 중 수수께끼로 여겨지는 유화입니다. 옷을 차려입은 남자와 부분적으로 옷이 벗겨진 듯한 여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두 사람 사이에 불 밝히는 등불이 긴장감을 불러 넣고 있습니다. Degas는 1897 년 이 작품에 대하여 "mon tableau de genre(내 장르의 그림)"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그의 작품 중에서 이 그림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화가의 아버지인 오귀스트 드가는 이탈리아 음악에 대한 대단한 애호가이자 유명한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로렌초 파간스는 당시 파리에서 유명한 스페인 가수였는데, 드가와 마네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 음악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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