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은 누구인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은 1860년 8월 29일 러시아의 툴라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러시아 연대 사령관이었고 어머니는 화가였습니다.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예술적 재능을 일찍 인정받은 그녀는 14세에 개인 아카데미 그림 수업을 받았습니다. 1886년 가족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을 때 베레프킨은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Repin) 밑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888년 사냥을 하던 중 실수로 오른손에 총을 맞았고 오랜 회복 기간 후에도 불구가 되었습니다. 끈질긴 연습을 통해 마침내 오른손으로 그림과 그림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이후 "러시아의 렘브란트"라는 명성을 얻을 정도로 사실주의 회화의 완성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1891년, 그녀에게 운명이 다가옵니다. 4살 연하의 Alexej von Jawlensky(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를 만났는데, 그에게 깊이 매료된 베레프킨은 그와 함께 뮌헨까지 동행합니다. 야블렌스키 역시 레핀에게서 미술수업을 받던 화가지망생이었습니다. 베레프킨은 야블렌스키와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결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헤어질 때 위자료를 받았다고 한..) 야블렌스키를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작업을 제쳐둘 정도로 헌신(?)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블렌스키 작품의 상당부분이 베레프킨의 아이디어였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예술 교류의 중심지가 된 살롱을 시작했습니다. 그림그리는 일에 손을 놓았지만 미술에 관한 일은 계속한 듯합니다. 그러나 야블렌스키와 좋은 사이가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1902년 Jawlensky가 하녀와 외도하여 아들을 낳으면서 두 사람간의 위기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녀는 정신회복을 위해 프랑스 여행을 했으며 47세가 된 1906년에 야블렌스키를 지원하기위해 그만두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녀와 Jawlensky는 1908년에 무르나우 마을에 거주하며 Kandinsky, Münter와 함께 여러 기간 동안 작업했습니다. 그들은 "뮌헨 신인 예술가 협회(NKVM, Neue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Wassily Kandinsky와 Franz Marc가 이 그룹에서 멀어지고 표현주의 화풍의 하나인 "Blauer Reiter(청기사파)"를 결성했을 때, Werefkin도 1913년에 이 그룹과 함께 전시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Jawlensky와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아티스트 그룹 "Großer Bär(빅 베어)"에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Jawlensky는 결국 그녀에게 위자료를 지불하고 아들과 함께 떠나갑니다. 스위스로 이주한 지 2년 후였습니다.
스위스에서 미술활동을 계속하던 Marianne von Werefkin은 1938년 2월 6일 Ascona(아스코나)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그녀 사후에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작품(자화상)


33세에 그린 <세일러 복장을 한 자화상>은 베레프킨의 초기 러시아 사실주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녀는 긴 붓을 잡은 채 선원의 블라우스를 입은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Werefkin은 1896년 Alexej von Jawlensky(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와 함께 독일로 이주할 때까지 그녀의 스튜디오가 있던 현대 리투아니아의 가족 Blagodat Estate에 거주하였습니다. 일련의 성공적인 전시회가 끝난 후 1893년에 Werefkin은 모국인 러시아에서 예술 경력을 시작하였습니다.
Werefkin은 유화에 대한 숙달과 주제 및 내면의 본질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인해 '러시아 렘브란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선원의 블라우스를 입은 자화상과 같은 초기 작품은 Werefkin의 성숙한 표현주의 페르소나가 등장한 예술적 유산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화가로서 뒤늦은 출발 (1906년이후)




작품 제목은 '자포자기한' 또는 '버려진'이라고 뽑았는데 그림의 유형은 초상화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저 남자는 누구일까요? 정보가 없네요.그리고 남자의 제스처가 무얼 뜻하는 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의자에 손을 걸치고 맥이 빠진 모습이 자포자기한 사람의 모습인것 같기는 합니다.






<Red City>는 파괴된 도시의 폐허를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도시는 호수 위의 언덕에 위치해 있고, 몇 그루의 까맣게 탄 나무가 이전의 삶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아래쪽 가장자리 오른편에는 훼손되어 2/3 정도 남아있는 교회 탑이 보이고 날개를 펼친 세 마리의 새가 그 위로 날아갑니다. 보이나요? 아주 작게 그려졌는데.. 교회탑 위를 나는 게 아니고 호수 건너편을 선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암튼 교회 지붕이 파괴되었습니다. 3개의 가느다란 고딕 양식의 창문이 있는데 이전의 화려한 교회 창문은 파괴되었고 그을음으로 검은 교회 내부가 드러났습니다.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옛 종탑의 벽체에 나 있는 세 개의 창은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얼굴형상으로 비칩니다. 이러한 모티프는 그림의 왼쪽에 있는 집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전 주거용 건물의 대부분은 비석, 반석 또는 묘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화가가 상징적 효과를 노린 듯합니다. 계곡에는 맞은편과 이쪽 강둑에는 높이 솟아오른 산맥이 있으며 이쪽 산 정상에는 두 개의 탑이 있는 성터가 보입니다.
그림에서는 빨강과 파랑이 갑자기 만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비되는 색의 거대한 충돌은 그림에서나 가능한 불일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사하로프(Aleksandr Sakharov, 1886~1963)는 프랑스로 이주한 러시아의 무용가, 교사, 안무가였습니다. 알렉산드르는 20세기 초 가장 혁신적인 솔로이스트 댄서 중 한 명이었으며, 파리의 아카데미 드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화가로서 수학했습니다.
알렉산드르 사하로프는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무용으로 유명하여 당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치던 무용수였습니다. 위 작품을 그리게 된 동기는 그녀의 양성적인 외모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설마 그런 이유를 내세워서 작품을 그리진 않았을텐데 암튼, 1909년 Jawlensky와 Marianne von Werefkin 등의 화가들이 그녀의 그림를 그렸고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베레프킨은 사하로프를 모델로 세운 뒤 야블렌스키와 동시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알렉산드르 사하로프의 초상을 그린 야블렌스키의 작품이 있으니 비교하여 감상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앞에서 베레프킨이 야블렌스키의 미술창작활동을 지원하려고 자신의 화가작업을 중단했던 이력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베레프킨의 작품이 야블렌스키의 작품보다 더 좋게 보입니다. 베레프킨이 야블렌스키와 관계를 지속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면 베레프킨은 화가로서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야블렌스키와의 결별이 미술애호가들에게는 이득이 된 걸까요?






<귀환(Returning Home)>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소포와 아기를 짊어지고 도시 밤거리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흐릿한 가로등 불빛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작품은 베레프킨이 다리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그녀의 오빠와 함께 머물던 러시아(지금은 리투아니아)의 코브노(Kovno) 시를 묘사한 것입니다.
Werefkin은 Kovno 시의 매력을 발견하고 일기장에 우울한 제비꽃과 빛의 흐릿함을 기록하면서 "예술가를 위한 보물창고"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도시 주민들의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피사체의 내면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윤곽을 뚜렷이 하고 평평한 색상을 사용했던 프랑스의 클루아조니즘(Cloissonism) 또는 종합주의(Synthetism)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 작품의 침울한 분위기는 당시 유럽 예술의 전형을 이루던 것인데 이는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영향을 받은 때문입니다. 우울하고 불안한 분위기와 함께 색채를 표현적으로 사용하는 후기 인상파의 결합은 이 시기에 북유럽 도시에서 동시에 출현한 표현주의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Werefkin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모티브인 검은 옷차림의 구부정한 여성의 모습을 발견하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귀환>은 여러 면에서 그녀의 성숙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초기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은 1909년 바실리 칸딘스키 등과 공동 창립한 그룹인 NKVM(신 뮌헨 예술가협회, Neue Künstvereinigung Munchen)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Werefkin은 자신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대담한 색상과 톤을 사용합니다. 배경은 강렬한 파란색과 녹색으로 채색하였고, 자신의 피부, 모자, 옷에는 선명한 갈색, 빨간색, 노란색을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캔버스의 특정 영역에 걸쳐 획을 반복하여 구축된 추상적인 패턴과 함께 넓고 느슨한 붓놀림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혁신적인 붓터치 기법을 존경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한편, 역동적이고 감성적인 색상 사용은 고갱의 작품과 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Werefkin의 NKVM 회원 자격에 대해 Adrienne Kochman은 "드라크루아, 반 고흐, 고갱의 작품을 떠올리며 미래의 '감정적' 예술 추구에 초점을 맞춘 토론을 주도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자화상보다 감정적 내용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베레프킨의 색채 사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은 거의 없습니다. 이 자화상은 그녀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이며 뮌헨 학파 표현주의의 핵심 사례로 간주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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