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미술관 순례

구로다 기념관

hittite22 2025. 2. 19. 14:53
728x90

 

 

 

구로다 기념관 전경



 

 

1. 도쿄 구로다 기념관 개요

- 정식명칭 : 東京国立博物館 黒田記念館(KURODA Memorial Hall)

1) 주요 전시정책

- 국립박물관 소속 구로다 기념관으로 운영.

- 구로다의 업적과 대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어 정기적으로 구로다의 그림, 소묘 등을 중심으로 한 전시.

2) 건축

- 2000년, 오카다 신이치로 (岡田信一郞)

3) 입장료 

- 무료.

4) 개관일

- 화요일~일요일 :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5) 휴관일

- 월요일(공휴일에는 개관, 그다음 날 휴관)

 

2. 위치

구로다기념관 위치

 

 

(들어가며)

 

 

동경에 많은 미술관이 산재해 있지만 우에노에 중요한 미술관이 많이 포진해 있다. 가장 핫한 국립서양미술관을 필두로 하여, 도쿄도 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도쿄예술대학 미술관, 모리미술관 그리고 구로다 기념관이 있다. 이 중에서 도쿄예술대학 미술관과 구로다 기념관은 무료 관람이다. 와우~

히타이트가 방문한 당시에 도쿄도 미술관에서는 독일 루트비히 미술관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고,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피카소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히타이트가 평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화가라서 스킵했고 루트비히 미술관 특별전은 독일 쾰른에서 해당 미술관을 찐하게 관람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역시 패스하였다. 그리하여 국립서양미술관 상설전과 도쿄예술대학 미술관을 둘째 날 방문하였고 여행의 마지막 날 우에노공원 산책을 하면서 사찰과 신사를 둘러본 다음 구로다 기념관을 찾게 되었다. 도쿄 예술 대학 미술관은 학생들 작품이라 크게 소개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구로다 미술관은 볼 만했다. 

 

구로다 기념관 안내 포스터

 

우에노 공원 국립 서양미술관을 관람한 다음 위로 올라가면 도쿄 국립 박물관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다 보면 구로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포스터가 나온다. 구로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舞妓(Maiko Girl)>가 인쇄된 포스터는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관람료 Free라는 표기가 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찾았다. 한글 표기도 있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건물, 구로다 기념관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름드리나무가 운치를 더하여주는 이 고전적인 건물은 그다지 왕래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히타이트는 구로다 미술관 관람 결정한 것이 패착이었나 하는  의구심까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람들 발길이 뜸한 것은 이유가 있다.

히타이트는 머리를 굴려본다. 일단 자국의 국민에게 무료로 상설전시하는 갤러리라 하면, 웬만한 도쿄 시민들은 다 보고 갔다고 판단하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객들은? 우순 순위가 있으니 아주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라며 구로다 미술관이 관람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외국인이 구로다 미술관을 방문하면, 조용하고 쾌적한 공간에서 힐링과 함께 전시 공간을 나 혼자 향유하는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히타이트가 사유한 결론은, 미술작품 감상에 안성맞춤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호사 누리는 기분을 느끼며 힐링을 시도해볼  꽤 괜찮은 장소라 판단했다.

 

내부 계단

 

사람이 없어서 동선을 찾는데 좀 헤맸다. 그러자니 깔끔하고 단정한 정장차림의 남성 안내인이 히타이트에게 다가와서 이리저리로 가면 작품감상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일본어로.. 아마도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촌뜨기 같은 방문객이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구로다 세이키 (黒田清輝, 1866~1924)

 

'이 냥반이 구로다이구나.'

히타이트는 단지 그림감상할 선택지 중의 하나로 방문했을 뿐이라서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전무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냥반 구로다 세이키는 서양화가 겸 정치인으로 일본에 서양의 미술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일본 근대미술의 아버지’ 혹은 ‘일본 근대미술사의 빛나는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이라고 한다.

 

오 그렇군.

구로다는 1866년 가고시마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서 10대 초반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였으며, 1884년 법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도중에 학업을 포기하고 인상주의 화가 '라파엘 콜랭(Raphael Collin) 스튜디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오 그렇군.

1893년, 9년간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구로다는 일본식 인상주의 화풍인 외광파(外光派)를 들여와 일본 서양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구로다를 중심으로 한 외광파 그룹은 기성 서양화 흐름에 도전하는 ‘신파(新派)’로 불리며 급격하게 성장했고 마침내 화단의 주도권을 잡았다.

오 그랬군.

구로다는 1896년 메이지 미술회의에서 ‘구파(舊派)’와 결별해 '백마회(白馬會)'를 결성하고, 그 해 개설된 동경미술학교의 서양화과 교수로 취임함으로써 메이지 중기 이후 일본 서양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지(智), 감(感), 정(情)> 3부작을 출품하여 은메달을 받았으며, 또한 1907년에 창설된 문부성 미술전람회와 그 후신인 제국미술원 전람회의 심사위원을 거쳐 1913년 국민 미술협회가 창립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에는 제국미술원 원장에 취임하고, 1923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 등 말년까지 미술계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럼, 한국과의 관계는?

일제강점기 때, 미술을 배우러 간 한국의 유학생들은 대부분 동경미술학교에 다녔다고 보면 된다. 그곳에 구로다 세이키가 교수로 있었으므로 한국(당시는 조선) 유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동경 미술학교 졸업생 중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그룹에 속하는 두 사람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있었다. 김관호는 1915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시 수석을 차지했다. 이들은 한국(조선)으로 돌아와 미술계의 요직에 앉아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심사위원으로 미술계를 이끌었으니 근대 한국미술에 끼친 구로다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감상

 

 

 

일반 전시실에는 구로다의 인물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유리 액자로 끼워져 있어 사진 찍기에 불편했다. 뮤지엄이나 갤러리에 가서 그림 감상할 때,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나쁜 것이 유리 액자와 조명이다. 그런 경우 사진을 찍으면 유리에 비친 그림자나 빛(조명)의 간섭으로 작품 자체의 촬영이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감수하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 감상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婦人肖像(Portrait of a Woman), oil on canvas, 65.8 x 50.4 cm.

 

유리에 조명이 반사되는 경우 내가 습득한 사진 촬영하는 방법은 조명 빛이 작품의 가장자리에 비치도록 사진 찍는 위치 선정을 잘 한 다음, 조명의 영향을 최소화시킬 목적으로 줌을 사용하여 끌어당겨진, 온전한 화면만을 담는 것이다. 일종의 편법인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사진촬영이 가능해지지만 줌인하여 확대사진을 담을 때는 선명도가 저하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리하여 히타이트는 액자를 포함하여 찍은 사진, 즉 조명의 간섭현상으로 인물화를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한 사진들은 과감하게 버렸다. 

 

豚屋 (Pork Butcher’s Shop), 1891, oil on canvas, 36.5 x 30cm

 

뜨개질 하는 여인, 1890년경, 62.5 × 47.5cm
自画像(Self-portrait), 1915, oil on canvas, 38.5 x 32.5 cm
Paint Box
黒田清輝의 遺品(kuroda Seiki's Easel, Chair, and Paint Box)

 

H형의 이젤은 구로다가 그의 아뜰리에(Atelier)에서 사용한 미술도구로 추정되며, Paint Box는 삼각 다리가 붙어있어 야외에서 사용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다.

 

婦人肖像(Portrait of a Woman), 1897, oil on wood panel, 32.5 x 24.0 cm
일반 전시실 풍경

 

일반 전시실의 작품은 크기가 고만고만하고 인물화 위주여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전부 유리 액자로 끼워져 있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히타이트의 머릿속에서 구로다 기념관을 찾은 것이 패착이었을까라는 생각이 움터 나올 즈음 건너편에 있는 특별 전시실을 찾았는데 그곳엔 관람객이 많이 모여 있었다.

 

<智・感・情> 구로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특별 전시실 정면 벽체에 걸린 누드화 3부작

 

바로 이 3연작 누드화 때문일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뭔지 딱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특별 전시실은 일반 전시실과 퀄리티와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으로 들어가자마자 정면으로 한 벽면을 가득 채울 기세의 작품 3점이 눈에 들어왔다. 걸려있는 누드화는 모두 거웃묘사가 부실했는데 구로다가 메이지 30(1897)년, 제2회 하쿠바 회전(白馬会展)에 <지・감・정>의 제목으로 출품한 3부작이라 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 후, 세 작품 모두 가필되어 파리 박람회에 <나부 습작>으로 출품하여 은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OMG!

 

智 (Wisdom ), 1899, Oil on canvas, 180.6 x 99.8 cm
感 (Impression ), 1899, Oil on canvas, 180.6 x 99.8 cm
情(Sentiment), 1899, Oil on canvas, 180.6 x 99.8 cm
특별 전시실 풍경
読書(Reading), 1891, oil on canvas, 98.2 x 78.8 cm

 

서양인을 모델로 그린 작품 <독서>.

서양화가 구로다 세이키가 유학생일 때, 프랑스 남동쪽 60km 지점에 있는 그레이 수르 루앙에 머물면서 그곳 주민 마리아 빌로라는 여성을 1890~1891년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1891년 프랑스 연예실가협회(芸実家協会) 주최의 살롱에서 입선하여 프랑스 화단 데뷔를 완수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한다.

読書(Reading) - detai

 

기념비적 작품이었다니 예를 갖추고 살펴보는 히타이트!

작품은 鎧戸(외부 셔터)가 있는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는 여성의 전신을 담고 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이마와 머리카락에 닿아 실크처럼 부드럽게 살랑댄다. 모델이 된 마리아 빌로(Maria Billault)는 마을 농가의 딸로, 당시 구로다와 연애 중이었다. 오~ 이런... 마리아는 구로다의 또 다른 작품 <婦人像(厨房)>에도 등장한다.

 

舞妓(Maiko Girl), 1893, Oil on canvas, 80.4 x 65.3 cm
마이코코(Maiko Girl) - detail

 

이건, 유혹의 시선이 강하게 빛을 발하는 인상이다.

히타이트는 우선 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그렇게 수신했다. 

 

메이지 26년, 유럽에서 귀국한 구로다는 古都 교토의 거리와 舞妓(Maiko Girl)의 가련한 모습에 신선한 감동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교토의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가모가와(鴨川)의 흐름에 면한 실내는 외광파 다운 밝은 빛으로 가득하고, 창문에 자리 잡은 舞妓(Maiko Girl)의 얼굴에는 앳된 소녀의 모습이 남아있지만 동시에 늠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호숫가에서(湖畔, Lakeside), 쿠로다 세이키(Kuroda Seiki), 69 x 84.7cm

 

<湖畔(Lakeside)>은 메이지 30년 여름, 구로다가 테루코(照子) 부인과 함께 피서 차 하코네(箱根)에 머물렀을 때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연애하던 백인 여성과는 쫑났었던 모양이네.

 

암튼, 구로다는 이 작품에서 파도가 온화한 호수 면을 배경으로 시원한 유카타(浴衣, 목욕 전후에 입는 기모노와 비슷한 옷) 차림의 아내를 화폭에 정갈하게 담아냈다. 산이 만들어내는 느긋한 능선, 파도가 온화한 호수 면과 함께 습기가 있는 공기까지 그려낸 것처럼 보인다.

 

평론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일본의 여름 고지의 칙칙한 풍경, 습윤한 대기를 담백한 색조와 평활한 필치로 그려낸 <湖畔(Lakeside)>은 작품 <지・감・정>과 함께 구로다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테루코 부인은 작품 제작할 당시의 상념을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내가 23살 때였는데, 호숫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남편을 보러 갔더니 거기에 있던 돌에 걸터앉아 주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더니 옳거니 내일부터는 그 모습을 그려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비와 안개가 심한 날이 있어 결국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말투가 쩐다. 

남편을 극 존칭하여 말하는 일본 여성의 이질감이 글 안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느낌이다.히타이트는 엉뚱하게도 작품 감상이 아닌 글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 The End -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