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미술관 순례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MOMAT) (2)-전쟁 속 일본 화가들

hittite22 2025. 2. 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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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 이어서)

 

작품감상

 

 

 

 

野田英夫(Noda Hideo), Circus, 1937, oil on canvas, 101 x 86.5cm

 

"얘네들, 가족사진인 줄 알았더니 서커스단원들이네.."

"히타이트, 상상도 참.." 

"근데, 무대가 일본이 아닌 모양이다."

"히타이트, 그런데 이 양반도 30세에 죽었어. 유독 화가들 중에 요절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뭐, 우연이겠지."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이력이 특이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인데 일본에서 중등 교육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노다 히데오 씨,

그에게 인물화 작법이란 옆에 묻고 바라보는 풍경, 즉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던 걸까?

野田英夫(Noda Hideo), Circus, 1937 [detail]

 

<서커스>는 세 사람이 각기 고립되어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얼굴의 표정, 방향, 몸짓에는 어떠한 연대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화면 중앙을 종단하는 열린 공간이 등장인물을 3개의 블록으로 구획하고 있는 형국이다.

 

Henry Sugimoto, Our Bus, 1943, oil on canvas

 

"뭐지? 이 작품.. 뒤에 보이는 막사들은 포로수용소 삘이 나는데?"

"맞아, 히타이트.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래."

"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국 종자들이라서?"

"그런 거겠지, 아마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2년에 내린 행정 명령 9066에 따른 조치일 거야."

 

'작품 <Our Bus> 속 트럭 측면부에 씌어 있는 WRA. 이게 함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거군.'

히타이트는 작품 속에 쓰인 글자에 주목했다. WRA는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서해안에 일본계 미국인을 억류(수용) 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던 戰時輾住局(War Relocation Authority)의 약자였다. 실제로 이 작품은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헨리 스기모토(Henry Sugimoto)가 아칸소주의 제롬 수용소에 수감 중일 때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石垣栄太郎(Ishigaki Eitaro), The Noose, 1931, oil on canvas

 

"그런데 히타이트, The Noose가 무얼 의미하지?"

"응, 람시스. 그건 올가미란 뜻인데 이 작품에서는 '교수형'을 의미한다네."

"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 미국 내 일인들은 참 많은 차별과 폭력을 견뎌야 했구나"

"당연한 일이겠지." 

 

石垣栄太郎(Ishigaki Eitaro), The Noose, 1931 [detail]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 차별과 폭력이 심하게 발생했던 모양이야."

"그래. 이 캔버스는 꼭 흑인작품의 황색버전을 보는 느낌이네"

 

国吉康雄(Kuniyoshi Yasuo), Dusk in Autumn(가을 석양), 1929, oil on canvas, 143 x 102cm

 

"쿠니요시 야스오, 화가의 내력이 재미있군."

"왜? 히타이트."

"190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그 이유가 영어를 배워 일본에서 통역사로 일하기 위함이었다고."

"오~ 그런데 통역사는 안 되고 화가가 된 거로군."

"미국에 가서 진로를 바꾼 모양이야. 그러고 나서 미국 여성 Katherine Schmidt(캐서린 스미스)하고 결혼했고."

"그렇군."

"그런데 캐서린 스미스는 미국시민권 자격이 없는 일본남자와 결혼하면서 시민권을 상실했다네. 그들은 1932년 이혼하였다는데 이유는 모르겠군."

"그래, 뭐 우리가 그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거지." 

 

国吉康雄(Kuniyoshi Yasuo), Eagle's Rest, 1941, casein on board, 30.5 x 50.8 cm

 

< Eagle's Rest>는 쿠니요시 야스오가 미국 체재 중에 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히타이트의 시각에선 어떻게 대표작으로 꼽히는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해설에 따르면 작품은 독특한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징적 동물 묘사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野田英夫(Noda Hideo), City, 1934 oil on canvas

 

"노다 히데오(1908~1939), 미국 출생의 일본계 2세 화가네.."

"히타이트, 노다는 쿠니요시보다 더 특이한 이력인데?

"왜, 뭐가?"

"공산당 계열의 혁명적 작가 집단 ‘존 리드 클럽’에 참여한 인물이었어."

"존 리드? 사람이름 아닌가?"

"맞아, 히타이트. 이 클럽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혁명가인 존 리드(John Reed)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는 러시아 혁명에 관여함으로써 당시 좌파 인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나 봐.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클럽 회원이었으며, 막심 고리키, 로맹 롤랑, 루쉰 등이 명예회원이었고.. 당시 노다는 ‘스코츠보로 사건’(1931년 일어난 흑인 소년에 대한 날조 재판 사건)을 소재로 한 <스코츠보로의 소년들>을 발표해 주목받았는데 그런 활약이 인정되어 클럽회원으로 받아준 모양이야."

"이력이 특이하긴 하네.."

 

빨래를 내거는 여성 너머로 USA 국회의사당이 서 있다

 

노다의 대표작 <City>는 도시 사람들의 애환을 담아낸 작품이다.

화면 좌우의 남녀를 비롯해 다양한 도시인들의 스토리 혹은 삶의 풍경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한 여인이 숨어서 젖을 꺼내 아기에게 물리고 있다.

 

이 그림 제작 당시, 노다는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록펠러 센터 벽화 제작에 조수로 참여했다고 한다.

'오, 그래? 디에고 리베라와 연결되어 있었다니 좌파가 확실하네, 인정!'

실제로 노다 히데오는 디에고 리베라가 아끼던 제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디에고의 또 다른 조수 한 명을 기억해야 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잭슨 폴록이었다고 한다.

 

淸水登之(Shimizu Toshi), Chinatown, 1928, oil on canvas, 130.5 × 163cm

 

1930년대의 미국은 대공황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상 탓인지 당시 미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생활 장면을 기록하고 사회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사진과 그림이 등장했다. 이 대열에 꼽사리 낀 일본화가들도 있었다. 조금 격식을 갖춰 표현하면 격동하는 사회 속에서 시민의 포용과 배제의 역사를 탐구해 온 일본계 미국인 예술가들의 작품, 특히 인종적 소수자의 관점은 미국과 일본의 미술사에 독특한 흔적을 남겼고 그중 하나가 시미즈 토시의 <차이나타운>이다.

 

淸水登之(Shimizu Toshi), Chinatown, 1928 [detail]

 

히타이트가 감상하기로 박스형 건물이 반복되는 배경으로 그려진 <뉴욕 차이나타운>에는 무대 같은 화려함과 함께 어딘가 현실에서 느끼는 일말의 외로움이 배어 나오고 있는 듯했다. 여기에는 도치기현 출신으로 20세 때 도미하여 막일(노동)을 하면서 그림을 배웠던,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 시미즈 토시의 냉철한 시선이 담겨 있다.

 

여행객들도 한몫한다.
전시실 풍경 1
전시실 풍경 2
4층 계단에서 발견한 Drawing 작품
건물 벽체에 그려진, 그리드와 선의 배열로 채워진 벽화다.
묘한 아름다움도 느껴진다.

 

루위트(LeWitt)는 1960년대부터 뉴욕을 거점으로 미니멀 아트, 컨셉츄얼 아트의 대표적 작가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평생에 걸쳐 무려 1200점 이상의 월드로잉을 제작했다고 한다.

 

Sol LeWitt, Wall Drawing #769

 

도쿄 근대 국립 미술관의 3층 <建物を思う部屋(건물을 생각하는 방)>에 채워져 있는 Wall Drawing #769!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오픈된 방의 상단 부분이 노출되어 있어 밖에서도 쉽게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고

히타이트는 3층으로 내려간 후 그곳을 찾아가서 감상할 수 있었다.

 

Suda Kunitaro, Walking Eagle, 1940, oil on canvas

 

"히타이트, 이 작품도 일종의 전쟁미술이라고 봐야겠지?"

"그래. 일본의 근현대는 미국과 연결된 지점이 많고, 그건 다시 전쟁으로 펼쳐지는 그림이야."

 

1938년 일본제국주의가 시행한 국가 총동원법은 모든 일본 시민에게 전쟁 노력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 것이었고, 예술가들까지 전쟁 그림 제작에 매달려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1951년 연합국은 살아남은 이 장르의 주요 작품 153편을 징발하여 미국으로 이관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협상에 의해 미국 정부는 "무기한 대출" 형식으로 그림을 본국(일본)으로 송환시켜 주었다.

 

Walking Eagle - detai

 

"독수리 묘사에 엄청 감정이입한 느낌이 드네."

"좀 그렇지?"

 

스다 쿠니다로(Suda Kunitaro)의 작품 <걷는 독수리>는 살아남은 전쟁미술의 하나로,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은유하고 있다.

 

松本竣介(Matsumoto Shunsuke), Bridge in Y-City, 1943, oil o canvas, 73 x 61cm

 

마츠모토 슌스케는 일본의 서양 화가로 도시 풍경을 지적인 화풍으로 그렸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8개월 전인 1941년 4월, 그는 겁도 없이 군부에 의한 미술 간섭에 항의하여 미술 잡지 <미즈오>437호에 <살아가는 화가>라는 문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藤田嗣治(Fujita Tsuguharu), Battle on the Banks of the Khalkha, Nomonhan, 1941, oil on canva

 

전쟁미술이 이어진다. 1941년 후지타 쓰구하루(Tsuguharu Fujita)가 그린 <칼하 강변 전투, 노몬한(Nomonhan)>은 1939년 7월 만주와 몽골 국경에서 일본군이 소련 탱크를 공격하는 전투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藤田 嗣治(Fujita Tsuguharu, 1886~1968)는 일본 도쿄에서 육군 군의 총감 자리까지 오른 후지타 쓰구아키라의 아들로 태어난 일본계 프랑스인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 출신으로 서양에서 가장 높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화가라고 할 수 있다.

 

Battle on the Banks of the Khalkha, Nomonhan [detail-전차]

 

후지타 쓰구하루, 그는 초기에 일본 전통 스타일로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파리 유학 후에는 모던 아트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과 어울리며 그룹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었다. 특히 고양이와 여체를 잘 그렸으며, 매끄러운 화면에 세필로 그린 감각적인 필치로 유명하였다.

 

Battle on the Banks of the Khalkha, Nomonhan [detail-보병]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일본으로 돌아와 서구 미술을 일본 화단에 유입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육군 미술 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전쟁화 작업을 수행했다. 위의 작품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러한 전쟁화 제작으로 인하여 전범으로 몰리며 일본 화단과 등지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1955년 프랑스로 귀화하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Fujita Tsuguharu는 일본의 미술과 서양 미술을 창의적으로 결합한 화가로, 일본 미술의 국제적 위상제고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었다.

음, 한국에는 누가 있나?

 

小磯良平(Koiso Ryohei), Capture of Kampar, 1944, oil on canvas

 

고이소 료혜이의 작품 <Kampar 공략>는 Desperate Charge of Lieutenant Kurata(구라타/倉田 중위의 분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宮本三郞(Miyamoto Saburo), Meeting of Generals Homma and Wainwright, 1944, oil on canvas, 190 x 250 cm

 

미야모토 사브로의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필리핀 바탄에서 일본군의 本間雅晴 (Masaharu Homma) 대장과 미군의 Jonathan M. Wainwright(조나단 와인라이트) 소장의 항복 협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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