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클림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둘째 딸의 방에 걸린 "Kiss"를 보았던 때였습니다. 누구나 다 한 번쯤 보았을 법한 그 작품,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그림말입니다. 몇 년 전 함평에서 황금박쥐 조각품을 제작 전시하였을 때, 도민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비난이 가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 금값이 하늘을 치솟자 완전 대박 났다고 떠받드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클림트가 돈을 좀 더 써서 진짜 금가루를 처바른 작품을 남겼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뚱딴지같은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도 했었죠.
클림트의 아버지는 귀금속 세공사였고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아, 그렇다면 나중에 클림트가 금을 이용해서 번쩍거리는 작품을 남긴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가요?
아마도요... 그런데 부모가 모두 직업을 가졌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클림트는 14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래도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눈여겨 본 친척의 도움으로 비엔나 국립 응용미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림트는 그림과 수공예적인 장식 수업을 받으며 직업화가의 길에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졸업한 뒤에는 동생(역시 화가)과 함께 공공건물 벽화 그리는 일을 했고, 각종 건축물과 공공시설에 장식화를 그리면서 건축 장식 미술의 대가로 인정받습니다. 그는 화가로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도입한 인물로 등극합니다. 1897년에는 전통미술에 대항한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反) 아카데미즘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는 1890년~1910년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예술입니다.
클림트는 귀금속 세공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유산과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시켜 화려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또한 상징주의 영향으로 마치 환상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풍경을 화폭에 구현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클림트는 찬란한 황금빛을 사용하여 성, 사랑, 죽음을 주제로 무수한 명작을 남긴 20세기 최고의 오스트리아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살아가겠지만요. 그러나 클림트 아저씨는 오늘도 비엔나 벨베데레 상궁의 널따란 전시실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미술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는 애제자 에곤 쉴레가 병사하기 직전인 1918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유행성 독감까지 걸려 56살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초상화
클림트는 스스로 자신이 추남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서구의 화가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자화상을 무수하게 그려제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화상을 한 장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개하는 이 드로잉은 그의 제자인 에곤 실레가 그린 클림트의 초상화입니다.
어떤가요?
완전 닮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인물의 특징을 아주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당연하죠. 실레 역시 불세출의 미술천재였으니...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Joseph Pembauer(요제프 펨바우어)를 그린 것입니다.
클림트의 전매특허인 황금빛 프레임을 살펴봅니다.
오른쪽 상단에서 그리스 음악의 신 아폴로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초상화의 주인공 펨바우어의 음악 경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프레임 주위엔 시계 방향으로 장식적인 이오니아 기둥, 물고기, 로프 고리에 매달린 주걱이 이어집니다. 이 주걱은 뮌헨의 유명한 카페의 상표였던 이니셜 G S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그 옆으로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인물의 머리가 있고 좌측 수직부에는 그려진 것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상단에는 몇 개의 원과 별이 그려져 있습니다. 금빛 장식의 아이템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초상화, 성공적인 남성 피아니스트에게 어울리는 장식적 요소입니다.
주인공인 Pembauer는 엄숙하면서도 지적인 표정을 짓고 있네요.
클림트는 그를 과도한 감정 표현 없이, 침착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묘사한 느낌이 듭니다.
아르누보 스타일로 그려진 여성(Mrs Heymann)의 초상화입니다. 파마머리처럼 뽀글거리는 헤어스타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래 곱슬인 걸까요? 아님 파마 한 것인가요?
1896~1898년 사이에 클림트는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습니다만 이 그림은 특정 유화와 연결성이 없습니다. 클림트는 1898년 3월 첫 번째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전시했고, 아르누보 운동의 기관지 Ver Sacrum(Sacred Spring)에 게재했습니다.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에서 클림트(Klimt)는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기 위해 여분의 빨간색 하이라이트와 함께 검은색 파스텔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검정 파스텔 크레용을 정교하게 사용한 것은 풍부한 색조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배경은 회색으로 조심스럽게 해치 되어 주변 인테리어는 최소한의 모습만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연한 구도입니다. 초상화니까 인물을 부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클림트는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가 사망하자 에른스트 딸의 후견인이 됩니다.
이 작품은 그의 조카딸 헬레네를 그린 것입니다. 작품의 배경과 헬레네의 의상이 각기 베이지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해 냅니다. 마치 조카에 대한 클림트의 마음이 투영된 듯합니다. 헬레네의 또렷한 눈빛과 곧은 허리는 이 소녀의 성정이 '당차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아이였을 수도 있죠. 화가는 누구보다 아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품위 있고 매력이 넘치는 여성의 초상화입니다.
클림트와는 어떤 관계?
글쎄요. 일단 클림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클림트와 어떤 사이였는지 확인하는 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Baroness Sonja Knips(소냐 닙스 남작)는 산업재벌 Anton Knips의 아내였습니다. Knips는 1898년 소냐에게 Josef Hoffmann을 소개합니다. 그는 오토 바그너(Otto Wagner) 스튜디오에 고용된 모라비아 출신 젊은 건축가였습니다. 클림트, 닙스, 호프만은 빈 분리파 동지였습니다. 소냐 닙스는 결성 당시부터 비엔나 분리파와 그가 좋아하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의 중요한 후원자였습니다.
초상화 속의 젊은 여성 소냐 닙스는 목에 주름이 많은 정교한 핑크색 케이크를 입고 있습니다. 그녀가 왼팔로 의자를 움켜쥐고 앞으로 앉은 자세에서는 경계심과 약간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1898년 그녀가 클림트를 위해 앉았지만 이미 Sonja Knips는 결혼하기 전 몇 년 동안 클림트를 알고 있었고 로맨스가 중단되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클림트의 여성편력은 은인자중 하면서 매우 화려하게 구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898년, 그리스의 산업가 Nikolaus Dumba는 당시 유행하던 화가 세 사람인 Hans Makart(1840~1884), Franz Matsch와 Gustav Klimt에게 그림과 가구로 호화로운 아파트의 방 3개를 장식하도록 의뢰했습니다. 여기에는 클림트가 이전에 다루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고려 사항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계약에 따라 개인 고객을 위해 문 위의 패널에 들어갈 두 개의 그림을 제작해야 했습니다.
클림트에게 음악실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방의 나머지 부분의 장식과 관련하여 그림을 구상한 방법을 보여주는 수채화가 남아 있습니다. 캔버스 중 하나인 <Music II>는 초기 그림을 연상시키는 알레고리적 작업이라면, 다른 하나인 <Schubert at the Piano>는 매우 혁신적입니다. 아마도 Dumba는 Schubert(슈베르트)가 그림의 주제가 되도록 요청했을 것이며, 슈베르트는 클림트도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였습니다.
음악가에 대한 클림트의 묘사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현대 의상을 입은 구경꾼의 묘사입니다. 옆모습으로 그려진 슈베르트 얼굴도 낯설게 느껴지는군요. 좀 기름져 보인다고나 할까? 암튼, 촛불이 주는 미묘한 조명은 그림의 요소를 녹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촛불로 인하여 공간은 보이지 않고 슈베르트의 옆모습만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여성은 클림트의 정부 중 한 명인 마리 짐머만(Marie Zimmermann)인데 그녀는 클림트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그림은 가운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관객을 직접 응시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부르크 극장을 위한 클림트의 첫 벽화 중 하나인 카를로스 역의 배우 요제프 르윈스키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Gertha Felssovanyi(게르타 펠소바니)의 초상화>는 수직 기법을 통해 동일한 스타일로 묘사됩니다. 여성의 작고 검은 눈은 스모키 한 짙은 색으로 묘사되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녀의 뺨은 오렌지 색조로 채워져 창백한 피부색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여성의 짙은 곱슬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이마 표면을 부드럽게 덮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에서 롱 드레스는 작품의 아름다운 요소로 작동합니다. 여성은 흰색과 회색 음영이 짝을 이루는 밝은 라벤더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패턴이 있는 보라색 스트립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드레스의 접힌 부분을 암시해 줍니다. 캔버스에 드레스를 그려 넣을 때 옷감을 둘러싸는 얇은 소재와 함께 주름진 팔 소매를 칠하려면 엄청난 양의 디테일과 정확성을 동시 투입해야 합니다. 클림트는 얇은 소재를 투명 기법으로 표현하여 드레스의 풍성함을 더했습니다. 작품제작 시 꽤나 고생했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인물 초상화가 등장했습니다.
에밀리 프뢰게는 호색한의 기질이 다분하였던 클림트의 마지막을 지킨 유일한 연인이자 정신적 동반자였습니다.
사후에 클림트 묘지옆에 안장된 여인이기도 합니다. 초상화가 그녀의 사진과 똑같죠?
프뢰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작품 <The Kiss>에 소개하였습니다.
클림트가 프뢰게의 어머니 초상화도 그렸군요.
그런데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프뢰게는 왜 어머니 성을 쓰고 있을까요?
앞에 잠깐 등장한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환경을 조성한 최초의 협력 사례는 사진작가 휴고 헤네베르그(Hugo Henneberg, 1863~1918)를 위해 지어진 빌라의 큰 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빌라는 비엔나 외곽의 반 시골 고원인 호헤 바르테(Hohe Warte)에 지어진 호프만(Hoffmann)이 설계한 4명의 예술가 거주지 중 하나입니다. Villa Henneberg의 이중 높이 홀을 위한 Hoffmann의 디자인은 Henneberg의 아내 Marie의 초상화를 의뢰받은 Klimt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었습니다. 초상화로서는 특이한 정사각형 형식(Klimt가 풍경 이외의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음)도 의도된 설정이었습니다.
<Hermine Gallia의 초상화>는 1903년 탈퇴 전시회에 출품하였지만 이듬해에야 완성되었습니다. 작품모델은 칼 비트겐슈타인(Karl Wittgenstein)의 딸 중 하나인 헤르미네 갈리아(Hermine Gallia, née Hamburger. 1870~1936)인데 그녀는 1893년 정부 고문인 삼촌 모리츠 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Emilie Floge(에밀레 플뢰게)가 만든 것과 유사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클림트가 드레스와 배경에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사용한 최초의 초상화입니다. 육각형과 삼각형으로 구성된 다이아몬드는 바닥을 표시하고 Hermine(헤르미네) 드레스의 train은 체커 보드(chequerboard) 효과를 보여줍니다.
Hermine Gallia의 포즈는 Klimt의 다른 여성 포즈와 상당히 다릅니다.
그녀는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약간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깍지 낀 손과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는 듯한 모습이 마치 질문을 하려는 표정같이 보입니다.
저명하고 부유한 비엔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Margaret "Gretl" Stonborough Wittgenstein(1882~1958)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누이이자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의 자매였습니다. 마르가레트를 그린 이 초상화는 결혼을 앞둔 그녀를 위하여 아버지가 선물로 주문한 것입니다.(스톤보로-비트겐슈타인과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다른 구성원은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습니다)
미모와 지성, 재력을 모두 겸비한 마르가레트는 독립심이 강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신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꽃무늬 자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그림에서 마르가레트의 본모습을 찾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이 그림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클림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다락방에 처박아 두었으며 새 보금자리로 떠날 때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초상화는 1960년에 그녀의 아들 토마스에 의해 판매되었으며 현재는 뮌헨의 Neue Pinakothek 갤러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Portrait of Fritza Riedler(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는 오스트리아 기계 엔지니어 Alois Riedler의 아내 초상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기 초상화 중의 하나입니다. Fritza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세속적 후광'이 받쳐주는 창백한 오 드 닐(Eau de Nil, 이집트에 사로잡힌 유럽의 밝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비엔나 중산층의 부와 지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림에서 Fritza는 소용돌이, 곡선 및 원으로 구성된 흰색과 금색 패턴의 직물 형태로 제작된 소파에 약간 기대어 있지만 똑바로 앉은 자세로 있습니다. 이 그림의 디자인 패턴이 작품에 질감을 더하고 관객의 관심을 끈다고 여긴 클림트는 고전적인 모자이크 스타일로 계속 그림을 그립니다.
패턴을 강조하기 위해 작품의 배경은 따뜻한 오렌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기본 배경 조각은 밝은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벽 위쪽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한편 밝은 패턴으로 작은 정사각형 상자를 추가하였습니다. Klimt는 조각의 왼쪽에 두 가지 다른 색상으로 벽의 질감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밝은 오렌지색 물결 모양을 그림의 왼쪽 상단에 삽입하여 아래의 청동 질감 영역과 짝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청동 부분은 스펀지 기법을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작품에 소박한 느낌이 더해졌습니다. 여성의 러플이 긴 드레스는 라벤더 카펫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걸작은 클림트의 아르누보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밝은 색상과 청동색 재료가 일련의 패턴 및 질감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인물은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여서인지
억센 인상을 살짝 풍깁니다.
Fritza Riedler의 초상화는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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