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세상을 하직한 한국의 유명 영화감독이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정통 영화공부를 하여 주류에 진입한 감독이 아니라서 아웃사이더로 떠돌았고 해외 영화제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었죠. 홍상수 감독과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길을 걸었던, 그쪽 방면의 선구자쯤 되는 인물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말년이 안 좋았습니다. 리투아니아쪽인가 러시아인근 북유럽과 동유럽의 경계지점에 있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도망가다시피 잠입하였다가 코로나19로 객사를 하고 말았죠. 왜 그가 그곳으로 잠입해 들어갔었나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여성편력 아니 여배우 성폭행 + 진짜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해외를 낭인처럼 떠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영화를 찍는 여배우와 잠자리 가지는 걸 통과의례처럼 여겼던 기인이었다는 사실도 폭로되었죠.
근데 그가 그리 행하였던 것은 예술가들 세계에서 전통적으로 이어내려 오는 한 가닥, 또는 줄기 중 하나에 그런 유형이 존재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 유형의 인물이 아닙니까? 물론 클림트는 여성을 폭행하는 일은 안 했지만 자기가 그리는 여인과 거의 대부분 관계를 맺었다고 공공연히 알려져 왔습니다. 아, 왜 그럴까요? 화가들은 인간개조 혹은 영혼 구원의 고차원적 관점에서 해부·해석하면 바닥에서 기는 종족이란 말입니까?
그런 궁금증을 품으면서 클림트의 여성 인물화 감상을 이어갑니다.
연인 추정 인물화 1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 Bauer)
'우먼 인 골드'라고 불린 이 초상화는 '키스'처럼 화려한 무늬의 금박 및 은박으로 장식돼 있다. 클림트가 깊이 꽂혔다는 모자이크 문양 분위기도 강하다.
'키스'에서처럼, 남성성을 상징하는 사각형, 여성성을 상징하는 동그라미도 반복된다. 이를 토대로 세인들은 클림트와 아델레가 연인이었다고 추론하기도 한다.
출처 : [미술로 보는 세상] 클림트가 남긴 또 한 명의 여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Adele Bloch Bauer)>는 클림트가 유일하게 두 장의 초상화를 그렸던 여인입니다.
(아,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의 보물',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우며, '영화 우먼 인 골드'의 소재가 되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려면 비엔나 벨베데레가 아닌 뉴욕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림 소유주의 이동경과를 추적한 영화 '우먼 인 골드'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재판을 통하여 소유권을 획득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amann, 1916~2011)이 컬렉터 로널드 로드에게 매각하면서 최종 종착지가 비엔나에서 뉴욕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유명 화장품 회사 에스티 로더 창업주의 아들이자 슈퍼 컬렉터인 로널드 로더(Ronald S. Lauder)는 동유럽 유대계 출신으로 독일-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2001년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아트 딜러인 서지 사바스키와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건너편에 빈 분리파 작품들로 뮤지엄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2006년 5월, <Adele Bloch-Bauer I>을 1억 3500만 달러(약 1416억)에 구입하여 이 뮤지엄의 심장으로 삼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은행가의 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여성입니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18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초상화를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던 클림트에게 의뢰했습니다. (아델레는 정략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았는데 하나는 세 살 때 죽고 둘은 낳자마자 죽었습니다. 본인도 마흔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수막염으로 죽었습니다.)
클림트는 아델레의 유명세와 재력에 걸맞는 아주 화려한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인 '금'을 사용해서 그림을 장식했고, 온통 금박으로 장식된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꼬박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작품 속에서 사실적으로 표현된 부분은 아델레의 얼굴과 손, 어깨 부분이 전부이고, 그림의 면적으로 계산하면 1/12이 안되기 때문에 장식적인 무늬와 패턴의 범위가 매우 넓어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클림트는 아델레의 개성적인 면모를 표현하는 꽤 신경을 썼는데, 섬세하면서도 여린 인상과 강한 자존심이 돋보이는 표정과 손의 처리가 그렇습니다. 아델레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있는 포즈를 취한 것은 자신의 오른손에 장애(사고로 인한)가 있어 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아온 그녀였지만, 숨기고 싶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상처를 자신의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준 것입니다.
그림속의 아델레가 착용한 화려한 보석, 금팔찌, 드레스는 모두 남편이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화려한 장신구 또한 이 초상화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중요한 후원자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 Bauer)의 두 번째 초상화입니다. Adele Bloch Bauer는 비엔나의 부유한 기업가 Ferdinand Bloch Bauer의 아내였습니다. 1912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비엔나의 문화 엘리트 내에서 Bloch Bauer의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우뚝 솟은 모습이 추상적인 패턴 블록의 보석 톤 배경 앞에 그려져 있습니다.
1938년, 나치는 Bloch-Bauer 가족 컬렉션(현재 New York의 Neue Galerie 컬렉션에 있는 Adele Bloch Bauer I 포함)의 다른 작품과 함께 이 초상화를 소유했습니다. 2006년, 수년간의 법적 협상 끝에 작품은 Bloch-Bauer 상속인에게 반환되었으며 이후 다른 컬렉션(개인)에 판매되었습니다.
아델레를 모델로 그린 초상화는 두 점이지만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디트1> 또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를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연인 추정 인물화 2 - Serena Pulitzer Lederer(세레나 레더러) & 딸 엘리자베스
아름답고 세련된 Serena Pulitzer Lederer(세레나 퓰리쳐 레더러)는 세기 전환기 비엔나 사회의 스타였을 뿐 아니라 베스트 드레서로 불릴 정도로 감각이 뛰어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자 사업가인 아우구스트 레더러(August Lederer)가 의뢰한 이 초상화를 위해 클림트는 부드럽고 구불구불한 붓놀림으로 흰색 드레스의 세레나를 표현했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레더러는 클림트를 후원한 컬렉터이자 뮤즈였고 연인이었습니다. 저의 뇌리에 존재하는 기록자는 자연스럽게 '연인'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습니다.
1918년 클림트가 사망하자 레더러는 그의 작품을 모두 구매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집권한 이후 유대인 레더러가족은 위험에 처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절반의 유대인 증명서로 추방을 면했다고 합니다. 세레나의 딸 엘리자베스는 클림트를 삼촌으로 불렀는데 세레나는 당시 딸 엘리자베스의 생부가 클림트라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 발언에 대해서는 유대인 학살을 면하기 위한 트릭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퀘스천. 클림트도 유대계 아닌가?) 암튼, 레더러는 나치의 압제에서 살아남았으나 클림트 컬렉션은 부다페스트로 도피하던 1940년 나치에게 압류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치 게슈타포는 전쟁 막바지에 퇴각하면서 클림트 컬렉션이 연합군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버립니다. 오 마이갓뜨!
이 작품은 1914년 엘리자베트 바흐오펜 에히트가 24살 때 그의 어머니 세레나 레더러의 주문에 의해 그린 것입니다. 레더러 가문은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후원자들 중 하나여서 클림트는 그의 가족을 위해 여러 점의 작품을 그렸고 레더러 가문은 15점의 그림을 소장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모델 Elisabeth Bachofen-Echt는 August와 Klimt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인 Serena Lederer의 딸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컬렉션에는 클림트 15개의 캔버스를 포함되었으며, 그중에는 1899년 작 <세레나의 초상화>와 1915년 작 그녀의 어머니 <샬롯 퓰리처(Charlotte Pulitzer)>의 그림이 포함됩니다. 샬롯 퓰리쳐는 저명한 저술상의 창시자인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의 아내였습니다.
1914년, 엘리자베스가 20세였을 때 클림트는 2년 후에 완성할 초상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거의 모든 클림트의 후기 초상화에서 그는 서 있는 포즈를 선택하고 배경을 두 개의 평면으로 나누기 위해 "수평선" 접근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Bachofen-Echt 초상화에서는 경계선이 낮아서 풍경 설정의 환상이 감소되지만 Klimt의 풍경에서와 같이 수평 및 수직 평면은 두 개의 완벽하게 평평한 색상 밴드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연인추정 인물화 3 - 마리 침머만(Marie Zimmermann)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이 클림트의 연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몸은 클림트의 양식화된 미학의 전형적인 꽃과 기하학적 모티브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내성과 깊은 생각이 뒤섞인 듯합니다. 작품의 구성은 길쭉하며, 중앙 인물은 캔버스 높이를 거의 채웁니다. 배경은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 어둡고 음울한 톤으로, 여성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불길한 두개골과 같은 얼굴이 점점이 찍혀 있어, 아마도 삶과 모성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작품의 모델은 미찌(Mizzi) 라는 애칭으로 불린 마리 침머만(Marie Zimmermann)입니다. 슈베르트를 그린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클림트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클림트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하여 양육비까지 지급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와 지내던 아터호숫가의 여름 별장에서도 미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하지 마라’ 혹은 ‘엽서가 아닌 편지를 보내라’라고 주의환기시키며 에밀리에게 들키지 않으려 용썼다고 합니다.
마리 침머만은 18세에 클림트의 모델이 되었고, 바로 클림트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미찌(Mizzi)는 클림트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애정 어린 수많은 엽서와 편지를 미찌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위 작품 <희망 Ⅰ>은 임신한 미찌를 모델로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에 해골과 죽음의 그림자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는 미찌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오토가 한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자 클림트가 불안과 절망에 빠진 미찌를 표현하며 그림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니, 그럼 그림을 그린 후에 다시 수정한 작품이란 말인가요?
… 1903년에 완성된 〈희망 Ⅰ〉의 기묘한 분위기, 죽음처럼 어두운 배경 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체의 임산부는 미찌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처음에는 그림의 제목처럼 배경은 이보다 한결 환한 분위기였다. 오토가 죽은 후 클림트는 그림의 배경을 병과 광기, 죽음의 상징들로 바꾸었다. 말간 얼굴을 가진 만삭의 임산부 뒤로 왼쪽부터 미친 사람의 얼굴, 해골, 그리고 병든 여자의 얼굴이 차례로 보인다.
4년 후에 그린 〈희망 Ⅱ〉 역시 탄생과 죽음을 오버랩한 무거운 분위기다. 1910년에 완성된 〈어머니와 두 아이〉의 모델도 미찌일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미찌가 낳은 둘째 아이 오토는 이미 죽은 후였다.…
<클림트>중에서
연인추정 인물화 4 - Emilie Flöge(에밀리 프뢰게)
클림트 곁에서 27년간 함께 했던 여인은 에밀리 프뢰게였습니다.
이들이 오랜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숨겨진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게 중요한 사항인데, 에밀리의 언니 헬렌(Helene)이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결혼했기에 두 사람은 친척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에른스트가 일찍 사망하면서 클림트가 그의 조카들을 돌봐주게 되고 그 그룹에 에밀리가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인생을 동행하는 관계가 형성된 겁니다. 이때 클림트는 제수 헬렌의 보호자가 되었고 에밀리는 클림트의 뮤즈가 되는 인생의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 이전, 1891년에 에른스트가 처제인 에밀리(18세일 때)를 클림트에게 소개하여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도 하구요.
위 작품은 클림트가 에밀리를 만났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던 작품입니다.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에밀리는 재봉사로 큰언니의 의상학교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재단사와 재봉사 포함 1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 성공합니다. 그녀가 클림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모델의 드레스 대부분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안 비밀이죠. 한편, 프뢰게 자매가 패션 살롱을 운영할 때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이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 '유겐스틸(jugendstil, Youth Systle)'로 살롱을 설계한 바 있습니다. 요제프 호프만을 기억하십니까? 소냐 닙스, 클림트와 친분이 있던 빈 분리파 회원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네들은 서로 일과 사적인 인연으로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관계망을 형성하였던 겁니다.
아마도 이러한 친척관계라는 쉽게 끊어버릴 수 없는 배경이 깔려있었기에 에밀리와 클림트는 오래된 연인처럼 잠자리 한번 가지지 아니하고도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관계가 근저에 깔려 있었기에 노골적으로 '애인하자'라며 들이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김수현이나 김새론같이 사회에서 만난 사이라면 쉽게 연인관계로 친분의 선을 넘는 '들이댐'이 가능했겠죠. 아, 물론 에밀리 프뢰게라는 여성의 인품이나 성격이 클림트를 옆에서 바라보며 감싸 안아준 고상함을 지탱한 동력이었고 그리하여 그들 관계의 인연이 지속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으니 서양사람들이 세월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을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하고 음미하고 감정이입하는 거겠지요.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플라토닉 러브를 한 것뿐인데 그게 무슨 남는 장사였을까 싶습니다. 허접한 하수의 눈으로 볼 때 그런 생각도 든다는 말이죠.
“사랑 그 자체가 쓰라린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고통이라오. 헛된 사랑에 빠질 때마다 내 가슴은 쓰라린 비애로 무너져 내리지. 이 감정을 나처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다시없을 거요.” ?<클림트-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편지> 中에서(1895년 2월 16일)
호색한 기질이 다분하였던 클림트는 생전 여인과의 스캔들이 거의 폭로되지 않았지만 사후 그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아이들만 열손가락을 훌쩍 뛰어넘었다 하니 말 다했습니다.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사생아 어머니가 아이들을 대신하여 상속울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안은 아닙니다. 암튼, 그런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떠돌 만큼 클림트의 여성편력이 유명했지만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뱉은 일갈은 '에밀리를 데려와'였습니다. 독신남 클림트의 유산 중 절반 가까이는 에밀리 프뢰게에게 상속되었고 나머지는 누나, 여동생, 남동생에게 각각 분배되었습니다. 그래선지 비엔나 사람들과 후세인들은 에밀리를 클림트의 유일한 연인이자 정신적 동반자였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에밀리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오스트리아의 대화가가 품었던 수많은 여인 중에서 유일하게 클림트 묘지옆에 안장됩니다.
클림트의 여인들(정리)
클림트는 여성들에 대해 이분법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직업 모델들은 매우 관능적이고 때로 외설적인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했으며 이들 가운데 여러 여인과 성관계를 갖고, 심지어 자식을 두기도 했습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클림트가 죽자 14건 이상의 유자녀 양육비 청구소송이 제기되었고 이 가운데 4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기록에서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델과 가진 관계는 오로지 육체적인 사랑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그 이상을 원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 지체가 높은 사교계 여성들과는 정신적인 사랑을 꿈꾸고 실천하였습니다. 그가 구원의 여인상을 보았던 사람과는 결코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분법적으로 여성을 대했다는 점에서 클림트는 분열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랑의 대상으로 삼았던 전자를 대표하는 여인이 미치 침머만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여인이 에밀리 프뢰겔이었습니다.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미치는 그가 생전에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한 아들을 둘씩이나 낳았습니다. 반면, 평생 클림트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편지를 4백여통이나 받았던 에밀리는 클림트의 임종을 부인 자격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유형에서 벗어나는 여성, 아델레 블로흐-바우어가 있습니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을 서 주었고, 또 그와 정신적인 사랑만을 나눈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델레는 1881년경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18살 많은, 유태계의 부유한 설탕 제조업자이자 금융업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와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페르디난트의 사업 근거지인 프라하 근교와 빈에서 생활할 때, 당시 빈의 스타 화가로 떠오른 클림트와 컬렉터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때(1899년)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화 주문을 받으면서 아델레와 클림트는 특별한 관계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델레의 나이가 18살, 클림트의 나이는 37살이었습니다. 당시 한 평론가는 그녀가 “매우 영리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은 아니었다”라고 기록하였으나 클림트의 그림에서 그녀는 상당히 고혹적이고 뇌쇄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은 클림트가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유디트’ 연작을 통해서 분명하게 풀려집니다.
<유디트 I>(1901)에서 주인공은 몽롱한 눈동자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나선 유디트가 매혹적으로 치장을 하고 적진에 위장 투항한 후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칼을 뽑아 목을 베어버린 유디트. 바로 그 여걸의 모습을 클림트는 몽롱한 눈빛의 요부로 묘사했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유디트의 에로티시즘은 단지 그 표정뿐 아니라 풀어헤친 젖가슴과 속이 비치는 옷, 그리고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인 얼굴 쓰다듬듯 어루만지는 제스처에서도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냥 인물화
클림트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그림을 몇 점 그렸습니다. 작품 <손자수 모자와 깃털목도리의 여인>에서 아름다운 여성은 큰 모자와 깃털 보아를 입고 모피와 머프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검은 깃털 모자는 클림트가 다른 작품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톤인 검은색의 부드러운 음영을 실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색의 분홍빛 갈색 팔레트와 고도로 양식화된 <검은 깃털 모자를 쓴 여인>은 젊은 에곤 실레와의 우정을 통해 표현주의에 대한 클림트의 증가하는 관심을 드러내보입니다.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모습은 보편화된 당시 분위기일까요? 아님 에곤 실레의 퇴폐적 생활양식이 반영된 구성일까요?
이 특별하면서도 단순한 작업은 클림트의 지난 10년 동안의 복잡한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단색의 공기와 가늘어지는 손가락은 El Greco(1541-1614)의 Mannerist-Expressionist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Picasso의 "Blue period"를 연상시킵니다. 클림트는 아마도 이 기간 동안 브뤼셀과 파리를 여행하면서 피카소의 청색 시대 작품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델이 쓰고 있는 모자는 여성의 신분을 암시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검은 깃털 모자는 당시 상류층 여성들의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이며 유행을 반영하는 중요한 디테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의상 역시 당시 여성들의 패션을 반영하는데, 섬세한 드레스와 패턴이 돋보입니다.
이 그림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금박이 사용되지 않은 9세 소녀의 초상화입니다. 이 이미지는 비엔나 진보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부모, 은행가이자 기업가인 Otto Primavesi(오토 프리마베시)와 아내 Eugenia(유지니아)의 세련된 취향을 증명합니다. 부부는 아트 컬렉터이기도 하였습니다.
분홍색 배경의 중간에 서있는 소녀 마다 프리마베시는 날아갈듯한 날렵한 몸매로 묘사되어 있지만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자세나 눈매, 손의 위치 등에서 범접할 수 없는 당당함이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마다가 입은 꽃무늬 드레스는 클림트의 뮤즈 에밀레 프뢰게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프리마베시는 오스트리아 미술의 열렬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들은 Weiner Werkstatte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고 Hoffmann에게 브뤼셀에 그들의 시골집인 Palais Stoclet을 짓도록 의뢰했으며 클림트의 그림 몇 점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12년 2월, Eugenia Primavesi는 그녀의 딸 Mada의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해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1년 후, 클림트는 오토 프리마베시의 초대를 받아 아내를 그렸습니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당시 비엔나에서 유행했던 밝은 기모노를 입고 있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밝은 노란색의 꽃으로 채색했고, 모델 뒤의 녹색 영역은 야외 또는 정원 설정을 암시합니다.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는 동양 새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Eugenia는 은행가이자 유리 제조업체인 Otto Primavesi와 결혼하기 전에 여배우였습니다.(오~ 여배우였었군요..) 그녀는 비엔나 패션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으며 Weiner Werkstatte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고 예술가와 서클을 위해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클림트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신체에 대한 전형적인 양식화 처리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마도 그의 가장 자연주의적인 초상화 중 하나로 남았을 것입니다.
Mada Primavesi는 나중에 어머니와 함께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일을 회상했습니다.
“우리는 몇 달에 한 번씩 비엔나에 가서 약 10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는 약 200개의 스케치를 만들었습니다.”
<Portrait of Friederike Maria Beer>는 1914년에 Schiele에 의해 이미 그려졌는데, 당시 Schiele는 육체적으로 끌린 작품을 남겼습니다. 실레가 그린 초상화는 지그재그 패턴의 드레스를 입고 Z자 모양으로 서 있는 자세로 구부러진 불안에 휩싸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클림트의 모델로 섰을 때 Friederike Maria는 Klimt가 그녀를 비엔나 워크샵 드레스로 그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상화 배경은 19세기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유럽에 소개된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클림트는 우키요에의 에로티시즘, 기모노의 문양, 금색 병풍의 항금색 배경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위의 작품도 그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스타프 클림프의 홈페이지에 있는 영문 설명에는 아래와 같이 한국도자기의 그림에서 가져온 배경묘사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팩트체크가 필요할 듯합니다.
The scenes of figures fighting on horseback are taken from a Korean vase owned by Klimt and they are clearly a reference to the First World War. The fierce activity of these artificial figures is sharply contrasted with the docility of the sitter.
에곤 실레가 그린 프레데릭 마리아 비어의 초상화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인물은 비슷해 보이는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죠?
구스타프 클림트의 <머프를 든 여인(1916)>은 1926년 비엔나에서 마지막으로 전시되었으며 오랫동안 분실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학자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0년대 이후로 체코의 개인 컬렉션의 일부로 남아 있었습니다. 컬렉션의 익명의 소유자는 최근(2017년 근방)에 와서 이 그림을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대여하기로 동의했습니다. 이 그림은 다른 두 개의 잘 알려진 클림트 작품인 <Water Castle(1908)> 및 <The Virgon(1914)>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그림은 창백하지만 요염한 여성이 커다란 검은색 머프로 얼굴의 일부를 가리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성은 꿈꾸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밝은 색의 소용돌이치는 배경 속 추상화된 여러 얼굴이 뒤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배경을 구성하는 강렬한 빨강, 분홍, 초록은 당시 클림트가 수집했던 아시아 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클림트는 일본 우키요에뿐 아니라 중국미술에도 관심을 표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은 비정상적으로 생생한 표현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여성 인물의 초상화로, 1925년 이후 이태리 피아첸차(Piacenza)의 Galleria Ricci-Oddi에서 소장해오고 있는 작품입니다. 1996년 X선 분석 결과 이 초상화는 1917년에 사라진 클림트의 잃어버린 작품인 <Portrait of a Young Lady (in hat and with scarf)>를 덧칠한 버전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원래 초상화는 클림트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을 그렸지만, 그녀가 갑자기 사망한 후 그는 작품 위에 이 여인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1997년 2월 22일에 도난당하였다가 23년이 지난 2019년 12월, 정원사가 갤러리 외벽의 오목한 곳에 자란 담쟁이덩굴을 치우면서 그림이 들어 있던 가방을 회수했던 일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Johanna Staude(요한나 스타우데)의 초상화는 "나뭇잎" 패턴이 있는 Wiener Werkstatte 의상을 입은 여성을 그렸습니다. 검은 깃털 보아가 그녀의 목을 감싸며 그녀의 창백한 피부색을 강조합니다. 철저하게 현대적인 여성 요한나는 짧은 웨이브 머리를 자랑합니다.
Johanna Staude는 1883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모델로 일했습니다. 클림트가 젊은 제자 실레와 그의 모델을 공유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실레의 연인이었다가 버림받는 빌리 노이칠을 잘 아실 겁니다. 클림트 역시 그의 모델과 많은 관계를 맺었으며 심지어 최대 17명의 자녀를 낳았다는 주장도 전해져 옵니다. 세월이 흘렀고 클림트 생전에는 비밀이 유지되었기에 공식적으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출처 연구원인 소피 릴리에 따르면, 클림트가 Aranka Munk를 위해 그린 첫 번째 초상화는 <침대 위에 있는 임신한 Ria Munk>였습니다. Munk는 그 초상화를 조각가 친구에게 주었고, 그의 상속인은 전쟁 후에 그것을 팔았습니다. 비엔나의 약탈된 미술 컬렉션에 대한 핸드북인 '아인말 전쟁'(Was Einmal War)의 저자인 릴리는 1999년에 다시 팔리기 전에 가수 Barbra Streisand의 컬렉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초상화는 나중에 무용수의 그림으로 재작업되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미완성인 <리아 멍크 3세의 초상(Portrait of Ria Munk III)>은 현재 렌토스 박물관(Lentos Museum)에서 컬렉션의 최고 보석으로 평가하는 작품입니다. 검은 머리에 장밋빛 뺨을 한 젊은 여성이 옆으로 몸을 숙인 채 관객을 향하고 있는 모습인데 클림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이 작품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젊은 여성 Maria("Ria") Munk는 작가 Hanns Heinz Ewers가 약혼을 취소하자 1911년 12월 28일에 자살했습니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던 클림트는 그녀의 사후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는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처음 두 개의 초상화는 가족의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세 번째 Ria 초상화를 작업하는 동안 완성을 보지 못한채 Klimt 역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여성 묘사 사례의 하나인 이 미완성 작품은 작가의 제작과정에 대한 매혹적인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빠르게 스케치된 목탄 선 사이에 채색된 패치의 임시 배치,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확한 윤곽 장식, 그림의 상단 부분을 감싸는 완전히 발달된 꽃 패턴 등등...
이 작품은 불행한 사랑 때문에 1911년 24세의 나이로 자살한 Ria Munk를 그린 것입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Aranka Munk는 사후에 그녀를 세 번이나 그려달라고 클림트에게 부탁했습니다. 린츠의 당국은 지금까지 도시의 렌토스 박물관(Lentos Museum)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Bad Aussee에 있는 Munk의 별장에서 나치에 의해 약탈된 초상화라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채를 든 여인(Lady with Fan)>은 클림트가 사망한 해인 1918년에 완성된 것으로 자포니즘의 영향과 클림트의 독특한 스타일을 모두 반영한 작품입니다. 부채를 든 여인에서 노란색 배경은 클림트의 황금기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형형색색의 새와 덩굴 꽃은 작가의 특징적인 색채 사용과 장식성에 기반한 성향을 반영합니다. 그의 장식성은 당시 유럽을 휩쓸던 일본 우키요에(목판 인쇄)의 양식화된 패턴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부채도 일본풍의 화려한 디자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클림트의 미술은 순수 예술과 공예의 장식성이라는 두 가지 조합으로 20세기 초반 서유럽 미술계를 평정한 화가였습니다.
<부채를 든 여인>에서 색채와 장식이 만들어내는 경쾌함은 인물 얼굴에 번지는 아름다움 연결되는 듯하며, 그녀의 어깨나신의 곡선은 장식적인 드레스와 사랑스러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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