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미술관 순례

서유럽 여행 -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2) / 브뤼헬과 만나고..

hittite22 2025. 2. 14.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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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ermeer, The Art of Painting, around 1666/1668 [Wikipedia]

 

너무 감상을 위한 감상에 치우쳐벼렸다.

히타이트는 이 유명한 페르메이르의 명작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

 

어떤 그림은 사진으로 보면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가 현장에서 실물을 보고 거의 영접하다시피 하는 게 있고,

어떤 때는 실물작품에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히타이트는 위대한 명작인데도 사진찍기를 스킵하게 된다.

 

Domenico Fetti(1588/90~1623), Saint Peter Repenting, 1613, oil on canvas, 95.8 x 55.9 cm

 

"앗, 이 작품의 모델은 딱 보니 베드로인걸 알겠네."

과연 세례교인 다운 히타이트의 반응이었다.

"그 유명한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모른다)'한 베드로의 초상이네요."

"맞아, 너무 울어서 눈이 벌개졌네."  

 

<회개하는 성 베드로>는 참회의 순간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도미니크 페티(Domenico Fetti)의 이 작품은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ir Joshua Reynolds(1723~1792), Portrait Study of a Young Lady, 1760~1765, 76.5 x 63 cm

 

"귀여운 여성의 초상화네요."

"음, Sir(경)이라는 존칭이 붙은 걸 보니 영국화가로군."

"오, 맞아요. 이 작품은 초상화가 전문인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그린거예요. 화가이전에 교장선생님이었네요."

 

Carlo Maratta, Mary with child and St. John, 1660, 66.5 x 54.5 cm

 

"이 작품도 매력있네."

"카를로 마라타가 그린 완벽한 바로크 작품이래요."

"교황도 반했는지, 미술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기 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소유했었군. 클레멘스 11세(지오반니 프란체스코 알바니/Giovanni Francesco Albani, 1649~1721)는 이 화가의 후원자이기도 했고.."

 

조각상 앞에 선 딸
애정행각에 열중인 조각상
쌍머리 독수리-오스트리아의 상징이다.

 

이어서 관람을 하는 작품은 미술사 박물관이 자랑하는 피터르 브뤼헬의 풍경화 연작이었다.

미술사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

왜 히타이트는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걸까, 미술사 박물관측의 홍보부족 때문이었나.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Hunters in the Snow, 1565, Oil on panel, 117 × 162 cm

 

"사냥꾼을 그린 브뤼헬의 꽤 유명한 작품이야."

"사냥을 하면 저리 많은 개들을 데리고 다니나 보죠?"

딸이 궁금증을 품으며 묻는다.

"모르지. 나도 사냥을 해보지 않았으니. 돌아가신 너의 할아버지는 아실텐데. 시골에서 사냥을 해보셨으니."

"아, 할아버지가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때론 여행이 가족간의 잊혀진 추억을 서로 공유하게 해주기도 한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노루 사냥을 다닐 때 개도 데리고 가셨을까? 히타이트의 눈에도 지친 개 떼와 함께 저지대 마을로 돌아오는 사냥꾼 무리가 선명하게 각인된다. 사냥꾼으로 보이는 남자의 창에는 여우 한 마리가 매달려 있을 뿐이다. 왼쪽에는 또 다른 무리가 모닥불 위에 돼지를 구울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고 얼어붙은 연못 위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히타이트 부녀가 아직 가보지 못한 북유럽의 겨울풍경이다.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Hunters in the Snow, 1565 [detail]

 

히타이트는 사냥꾼 무리를 뺀 겨울 풍경만 close up하여 따로 감상해보았다.

"이게 훨씬 더 멋진데?"

"하늘을 나는 새의 모습이 특히 멋져요."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oil on panel, 111 x 160 cm

 

"이 작품은 일상적인 풍경은 아닌데, 역사화인가요?"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인데 어떤 이야기를 담은 걸까요?"

"실제의 역사를 재현한 것은 아니야. 이를테면 신화와 현실을 짬뽕하여 그린 그림이랄까? 성서에서 헤롯이 명령한 유아살해를 모티프로 삼아서 그리면서 배경은 눈 내리는 플랑드르 마을로 바꿔친거지. 여기 등장하는 빨간 튜닉을 입은 기마병은 일종의 경찰 부대로 보면 되겠네."

 

Battle between Carnival and Lent, 1559 [Wikipedia]
The Children's Games, 1560 [Wikipedia]

 

"이 그림은 중세 어린이들의 놀이유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야."

"그렇네요. 아이들의 게임 종류를 다 묘사했군요."

"시간이 많으면 게임 유형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의미를 찾는 것도 재미있는데 우리는.."

"당근, pass해야겠죠. 시간이 곧 금이니."

"빙고~"

 

Pieter Bruegel the Elder, Peasant Dance(농민춤), 1568, 114 × 164 cm [Wikipedia]

 

"이 작품은 근거리에서 바라본 농민의 일상을 묘사한 건데, 나는 위의 작품보다 이 크기의 인물묘사가 훨씬 더 좋네."

히타이트는 항상 작가의 시각에서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성향을 드러낸다.

 

브뤼헬의 작품 <농민춤>은 축제의 오프닝 댄스 추는 모습은 담은 것이다. 일반 댄스에 앞서 행하는 전통 점핑 댄스가 화면에 close up되어 있으며 그 춤판에 끼어들려고 달려오는 커플이 스냅사진처럼 묘사되었다. 테이블 앞에는 동냥하는 거지가 보인다. 농민을 바라보는 브뤼헬의 시각은 거만한 것도 아니고 유머러스한 것도 아니며, 거의 이상주의적 현실묘사로 점철된 느낌이다.

 

The Peasant Wedding, around 1568, 113 × 164 × 3.2 cm [Wikipedia]

 

이 작품도 비교적 근거리에서 묘사한 그림이다. 히타이트는 이런 사이즈의 브뤼헬 후반기 작업이 더 마음에 들었다. 상상화도 아니고 우화적인 의미로 그려진 작품도 아닌, 플랑드르 농민의 결혼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 속에서 신부는 녹색 커튼 앞에 앉아 있다. 그녀 머리 위에 종이 왕관이 걸려 있는데 그게 신부를 가리키는 장치였을까? 암튼, 플랑드르 관습에 따르면 신랑은 결혼식 테이블에 착석하지 않는다고 하니 서 있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죽그릇을 나르는 청년들 모습이 히타이트의 눈에는 마치 군병처럼 보였다.

 

 

"앗, 이건 학교다닐 때 미술책에서 본 그림인데. 이 작품도 브뤼헬이 그린 것이었군요."

"그래, 대표작 중의 하나지."

"바벨탑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이건 상상으로 그린 거죠?"

"맞아. 그렇지만 브뤼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바벨탑에 대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베껴 그려진 고전이 되었어."

"브뤼헬이 단순히 풍경화만 그린 것은 아니었군요."

 

Bartholomaus Spranger(1546~1611), Self-Portrait, 1580/85, 62.5 x 45 cm

 

Bartholomaus Spranger(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랭거)는 루돌프 2세 황제(Emperor RudolphⅡ)의 궁정에서 뛰어난 지위를 누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황제에 의해 귀족으로 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드러난 그의 표정은 매우 침울해보인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 Small Slef Portrait, 1657
조용하다 했더니 딸은 어느새 휴식신공을 발휘중이다.

 

한국에서 알프레히드 뒤러는 그렇게 높이 평가받는 화가는 아니다. 아, 취소. 히타이트가 생각하기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유럽에 와보니 어쩐히 뒤러의 작품이 꽤 대접받고 있다는 인상이었다.(아, 이것도 팩트라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암튼, 이 초상화는 독일의 대표화가였던 뒤러가 두 번째 베니스 여행 중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Albrecht Durer(1471~1528), The Torment of the Ten Thousand Christians, 1508, 99 × 87.5 cm

 

또 하나의 뒤러 작품이 등장한다.

작품명 <만명 기독교인의 고통>, 히타이트가 생각하기로 이런 그림은 참 많은 공력을 쏟아야만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16세기 초의 기독교 순교 사건을 묘사한 작품인데 로마 제국의 도미티안 황제(81-96년)의 통치 아래에서 1만명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의 중앙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검은 복장의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그는 '이 작품은 1508년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것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그와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은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에 사망한 친구이자 학자인 콘라트 켈티스(Conrad Celtis)로 알려져 있다. 

 

Raphael, Madonna in the Green, 1505 or 1506 [Wikipedia]

 

'라파엘로의 초기 작품이군.'

히타이트에게 있어서 라파엘로는 인상파화가 중의 르누아르가 차지하는 위치와 오버랩되어 비춰졌다. 여성인물을 예쁘게 그린다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작품 <Madonna in the Green>에서 라파엘로는 밝고 섬세한 색조로 채색하였으며 녹색 천을 두른 마리아를 표현한 것은 녹색이 희망과 새출발을 의미하는 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타이트의 눈에 성모 마리아는 녹색 드레스를 입은 게 아니라 청색 두르마르겸 치마를 두른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독특한 성격을 소유한 히타이트의 딸..

 

수면부족이었나?

 

이집트 컬렉션에서 휴식하는 딸
미술사 박물관을 나와서 노천 카페에 앉았다.

 

런치타임.
먹음직한 햄버거

 

음료도 한 잔
아, 맥주였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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