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유럽

Marc Chagall(마르크 샤갈) / 1 - 자화상

hittite22 2025. 3. 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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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 Chagall(1887~1985)

 

마르크 샤갈은 누구인가?

 

Marc Chagall, 1965 ​

 

마르크 샤갈(1887.7.6~1985.3.28)은 벨로루시 출신의 러시아-프랑스 유대인 화가였습니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제국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Vitsebsk)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어상인 밑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집에서 야채를 팔던 어머니를 도우며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샤갈은 20세가 될 때쯤 러시아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하면서부터 미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유명한 예술학교가 많았지만 샤갈은 유대계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입학이 거부되었고, 유대인 교사가 있는 짜반체바 미술학교에서 그를 유일하게 받아주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 교사 레온 박스트(Léon Bakst)에게서 미술의 기초적인 부분을 배우게 됩니다.

 

초기 모더니스트였던 그는 몇 가지 주요 예술 스타일과 연관되어 회화, 그림, 책 삽화, 스테인드글라스, 무대 세트, 도자기 태피스트리, 미술 판화 등 광범위한 예술적 형식의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미술 평론가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는 샤갈을 "20세기의 전형적인 유대인 예술가"라고 불렀습니다(그러나 샤갈은 그의 작품을 "한 사람의 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꿈"으로 보았죠.) 미술사학자 마이클 J. 루이스(Michael J. Lewis)는 샤갈을 가리켜 "유럽 근대주의자 1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로 평가했습니다. 또한 루이스는 그를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대표적인 유대인 미술가라고 말했는데, 당시 평론가들은 그를 러시아(당시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구성원이었음)의 화가로 보지도 않았고 프랑스 화가로 보지도 않았으며 오직 세계 최고의 유대인 예술가로 인정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구인들은 유대인이라 하면 다른 것에 우선하여 그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어 한 인물을 파악하거나 평가하려는 접근방식을 가진 것일까요? 히틀러의 작용에 따른 반작용의 영향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일까요? 저는 미술 평론가들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그들에게 유대인이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스러운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동유럽 유대인 민속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미술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모더니즘의 선구자이자 주요 유대인 예술가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평판이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모더니즘의 "황금기"를 경험하였고 결과적으로 큐비즘, 상징주의, 야수파의 예술 형식을 종합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야수파의 영향은 초현실주의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몸담았던 미술사조(유파)로 재단하기에 앞서서 마르크 샤갈은 고향 마을 비테프스크(Vitebsk)에서의 꿈같은 삶을 환상으로 재현해 낸 유대인 화가였습니다.

 

1950년대에 파블로 피카소는 그를 가리켜 "샤갈만이 진짜 색깔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일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피카소의 코멘트를 소개해드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어록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카소의 입체파는 미술을 뒷걸음치게 한 사조의 하나라고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워낙 피카소에 껌뻑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서비스 차원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자화상

 

Self Portrait, 1907

 

마르크 샤갈이 20세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샤갈의 그림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Portrait of Chagall by Yehuda (Yuri) Pen, 1915, 30.6 x 43.2 cm, Jewish Art Oil Painting Gallery

 

이 작품은 비테프스크(Vitebsk)에서 최초의 미술선생이 되었던 예후다(유리) 펜이 그린 샤갈 초상화입니다. Yehuda (Yuri) Pen은 미래의 예술가 El Lissitzky(엘 리시츠키)와 Ossip Zadkine(오십 자드킨)이 포함된 Vitebsk에서 작은 그림 학교를 운영했던 사실주의 예술가였습니다. 젊은 샤갈의 수입이 부족한 사실을 알고 펜은 샤갈에게 그림을 무료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샤갈은 학문적 초상화 그림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펜의 미술학교에서 몇 달간 교습을 받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고 판단했습니다.

 

마르크 샤갈은 초기 시대에 큐비즘적인 요소가 강한 자화상을 그렸음에 비하여 이 작품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진 데서 화풍의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샤갈은 처음부터 사실적인 화풍은 배제하였던 모양입니다. 

 

Self Portrait with Brushes, 1909, 57 x 48 cm,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en, Düsseldorf, Germany

 

표현주의 스타일로 그려진 그의 초기 자화상입니다. 이 작품에는 러시아 소도시 출신의 독실하고 가난한 유대인 청년이 자신을 고삐물리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20세 샤갈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Marc Chagall은 Vitebsk와 그후 St. Petersburg에서 꽤 좋은 미술교육을 받았습니다. 1909년에 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샤갈은 무대장치가 바크스트 밑에서 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절 샤갈은 여름휴가를 위해 비테프스크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예술가"라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위 작품 속에서 드러나 보이는 샤갈은 화가로서의 자부심이 상당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 1912~1913, 126 x 107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일곱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은 그의 나이 25세에 그린 샤갈을 대표하는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200명의 동료 화가들과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던 파리의 첫 번째 스튜디오에서 그려진 것인데 당시 그의 동료 화가들 중에는 피카소, 잔 미로, 조르주 브라크, 피에트 몬드리안 등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자화상에서 어떤 식으로 개인적인 의미와 역사를 표현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갈은 지금은 독립 국가였지만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벨로루시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비숙련 건설 노동자)였습니다. 샤갈은 자신이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미술가로서 거의 평생을 보냈던 프랑스에서 마음으로 벨로루시로 돌아가려는 염원이 강했습니다.

 

<일곱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에서 두 개의 풍경이 화가 위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새 집인 파리와 벨로루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비테프스크 풍경을 기억으로 떠올려 묘사한 것입니다.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파리 시내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 자리잡은 인물이 바로 화가 자신입니다. 이 화가는 머리카락을 멋있게 손질하고 단추구멍에 꽃을 꽂고 수를 놓은 넥타이를 맨 맵시 있는 차림입니다. 그러나 그는 7개의 손가락으로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림 속에 묘사된 풍경화는 자신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은 <러시아에게, 당나귀에게, 그리고 타인들에게>라는 작품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실내의 오른쪽 벽에는 회상으로 떠올린 러시아의 고향마을 비테프스크의 풍경이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화가의 머리 위에는 히브리어로 '파리'와 '러시아'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이 글씨는 화가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한 화면 안에 결합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샤갈의 유대인 유산은 전통 민담, 우화 및 신념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의 많은 작품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일곱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Self Portrait with Seven Fingers)>에서 샤갈은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열심히 일함"을 의미하는 다채로운 이디시어 민속 표현 Mit alle zibn finger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여분의 손가락을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Yiddish語란 9세기경 중앙 유럽에서 발생한 유대인이 사용하던 서게르만 어군의 언어를 지칭합니다. 고지대의 독일어에 히브리어, 슬라브어 등이 섞여서 성립된 언어입니다.

 

7개의 손가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도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1)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7개의 손가락이 무지개 색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샤갈은 자신이 여러 가지 색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그릴 수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2) 7개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화가는 전력을 다해 자신의 작품을 그리는 5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화가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에 맞서 비평가들에게 삿대질할 수 있는 손가락을 하나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손가락은 비평가들에게 삿대질하기 전에 자신을 찔러 자신이 무엇을 그리려 하였는지를 성찰하는 손가락이 필요하다.” 라구요...

 

Self Portrait, 1914, 50.5 x 38cm, Courtesy of the Im Obersteg Collection and Kunstmuseum Basel

 

저는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어떤 여성 인물을 그린 초상화인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작품 제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 샤갈이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Self-portrait in green,1914, Oil on card mounted on canvas, 50.7 x 38 cm

 

<녹색의 자화상(Self Portrait in Green)>은 남프랑스 니스의 샤갈 박물관(Chagall Museum in Nice)에서 소장하고 있는 마르크 샤갈의 작품입니다. <나와 마을>에 자신을 대변한 러시아 농부를 초록색으로 그린 것을 상기해 보면 그가 자화상에 초록색을 입힌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에 등장하는 여성은 그의 뮤즈인 Bella(벨라)입니다. 벨라는 당시 그의 약혼녀였으며 1915년에 결혼하게 됩니다. 캔버스에서 화가의 얼굴은 야수파 기법을 사용하여 반은 조명이 비추고 다른 반은 녹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구성은 그림 가장자리 주변의 모든 항목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배치는 전통에 어긋나는 그림 중앙의 빈 공간을 드러내며 대신 샤갈의 고전적인 주제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강조합니다.

 

Self Portrait with Easel, 1914, oil on canvas, 72 x 47cm,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with Easel>은 Cubism Style(입체파 스타일)로 그린 1914년의 자화상입니다. 동일한 시기에 그린 자화상들인데 모두 다른 느낌, 다른 인상을 받게 됩니다. 화가들의 자화상을 보면 모든 화가들은 인상파적 요소와 표현주의적 스타일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흐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고향 네덜란드에서 그리던 칙칙한 자연풍경화에서 화사한 색감으로 탈바꿈한 그림을 그렸듯이 샤갈도 파리 인상파 화가들을 위시한 다양한 화파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밝은 색상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습니다. 

 

Self Portrait in Profile, 1914, 34 x 27.9 cm, Private Collection

 

역시 1914년에 제작된 자화상입니다. <Self Portrait in Profile>은 Primitivism(원시주의) Style로 그려졌습니다. 원시주의란 용어는 아방가르드 이전에 만연한 회화에 종종 적용되었는데 순수한 아마추어 화가로 상업적 의도 없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림을 그렸던 앙리 루소의 작품이나 폴 고갱의 후기 타히티 시대 작품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Self-Portrait in front of a House, 1914, Private Collection

 

Self-Portrait with White Collar, 1914, oil on cardboard, 29.9 x 25.7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PA

 

파리시절의 마르크 샤갈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1914년 샤갈은 베를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당시 독일을 휘몰아치던 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아 그림에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표현주의의 영향이 묻어 나오는 느낌이 드는데 맞지 않은가요? 

 

Self portrait with palette, 1917, oil on canvas, 88.9 x 58.4cm,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with Palette)는 파리에서 비테프스크 인근 벨라루스(near Vitebsk, Belarus)의 Liozna에서 돌아온 후, 역시 Cubism Sytle로 그린 자화상입니다. 저는 큐비즘적인 표현이 사물의 왜곡이라는 점에서, 또는 자연적인 물체를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본질을 망치는 쪽으로 묘사한 느낌이 들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편입니다. 어째서 피카소 시대의 미술 애호가들이 큐비즘에 열광하였는지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위의 작품도 인물과 그 주변 배경을 날카로운 직선으로 그어놓아 자연스러움이 상실되어 작품이 빛을 잃는 느낌이 듭니다.(사견입니다.)

 

Self-Portrait with Muse ( Dream ), 1917~1918, oil on canvas, 157 x 140cm, Private Collection

 

1917년, 샤갈은 고향에서 벨라 로젠펠트와 알콩달콩 연애하던 시절입니다. 작품 제목도 <뮤즈와 함께한 자화상>이군요. 그런데 오 마이갓, 샤갈의 캔버스에 큐비즘이 더욱 기승을 부려서 개인적으로는 비호감이 되어버린 작품입니다. 화면이 구깃구깃 구겨져 품위가 낮아지다 못해 아예 상실당한 느낌마저 드는데, 그래도 사람에 따라서는 호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개인의 취향은 절대 존중하는 게 예의이니 저도 타인의 호불호에 대해서는 관여할 생각 없습니다. 

 

Self-Portrait at the Easel, 1919, crayon and gouache on paper, 18.5 x 22.5cm, Marcus Diener Collection, Basel
Self-Portrait with Goat (Auto-portrait avec chèvre). 1922–23, MoMA

 

Self Portrait with Grimace, 1925, Etching and aquatint in colors with hand-coloring in blue, green and red gouache, on wove paper, 57.8 × 45.1 cm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얼굴이 바뀝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물은 마이를 먹어가면서 온화한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비하여 어떤 인물은 젊은 시절 빛나는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일그러져가는 사례를 보여줍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정치인 중에 얼굴이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져간 사례는 저는 분명하게 목도한 바 있습니다. 누군지 지칭은 하지 않겠습니다. 반면, 샤갈의 자화상을 보면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원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험하여도 고귀한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캔들 하나 없이 평생 아내를 사랑하였던 화가였습니다. 

 

Self Portrait with Tefillin, 1928, watercolour, pastel and gouache on paper laid down on cardboard, Royal Museums of Fine Arts Belgium, Brussels

 

이 작품도 제목을 읽지 않았다면 샤갈이 자화상을 그린 것이라고 도무지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림 속의 모델은 꼭 여리여리한 여인네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Tefillin(테플린)을 사전으로 검색하니 '히브리어 성경 구절이 들어 있는 두 개의 작은 가죽 케이스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 뜹니다. 단어 설명을 찾아보고 나서 그림을 들여다보아도 어떤 것이 Tefillin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Artist in front of the Easel, 1945, oil, coloured ink and China ink on canvas, 86 x 74cm

 

Artist를 마르크 샤갈이라 판단하고 자화상 항목에 넣었습니다.

샤갈의 자화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Self-Portrait with a Palette, 1955, gouache and Indian ink, 65 x 50cm Private Collection

 

1955년 프랑스에서 마크 샤갈이 만든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나이브 아트(Naïve Art, 원시주의) 운동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본인이 왼쪽을 향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이브 아트 운동의 특징인 다소 기발하고 추상적인 스타일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팔레트를 들고 있는데 팔레트에는 붓이 달려 있습니다. 배경에는 부드럽고 반투명한 색상이 스며들어 있어 몽환적인 느낌을 줍니다. 작품의 왼쪽에는 "성경"이라는 단어가 두드러지게 표시되어 있으며, 성경 삽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선은 유동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여 구성에 역동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샤갈의 독특한 스타일과 그의 깊이 있는 개인적인 예술적 표현을 잘 보여줍니다.

 

The Artist at his Easel, 1955, oil on canvas, 55 x 46cm, Private Collection

 

Self-Portrait, 1960, colour lithograph on wove paper, 31.9 x 24.3cm
Self-Portrait, 1959~1968, oil on canvas, Uffizi Gallery, Florence, Italy

 

초현실주의 스타일(Surrealism Style)로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샤갈은 여성인물처럼 묘사된 듯 보입니다.(저만 그렇게 보는 걸까요?) 이태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곳을 다녀왔으면서도 저 그림을 감상한 기억이 도통 나지 않습니다.

 

Self-Portrait, 1965, colour lithograph, 70 x 50cm
Autour du "Peintre au coq rouge", 1965, 28 x 19cm

 

이 작품명 <Autour du "Peintre au Coq Rouge">를 번역기로 돌려보니 <"붉은 수탉을 든 화가"주변>이라고 나오는데 그림 속에서 수탉을 찾을 수가 없군요. 여성으로 묘사된 오른쪽 인물이 수탉이라는 걸까요? 이 작품은 비교적 늦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구아슈, 수채화, 컬러 왁스 크레용, 펜, 인도 잉크와 연필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Self Portrait, 1968, Colour etching handcoloured with watercolour
Self-portrait With Clock, 1947, oil and tempera on canvas, 86 x 70.5 cm, Private collection
The Painter (Le Peintre) - Marc Chagall Self Portrait
Self-portrait with flowers, 1980, 20.3 x 27.9 cm.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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