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에 이어서)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은 큐비즘의 작품으로 1911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난 샤갈이 파리에서 입체파 분석방법을 공부하면서 고향마을에 대한 추억을 그린 것입니다. 샤갈은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으로 도약하려는 의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이셔 세갈(Moyshe Shagal)에서 프랑스 식 이름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로 개명한 바 있습니다. 당시 교통환경으로 보아 러시아와 프랑스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샤갈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러시아 마을 비테프스크를 그리워했습니다. 그 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 <나와 마을>입니다.
샤갈은 "나는 묘화(描畵)의 대상을 러시아에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파리는 그 위에 빛깔을 주었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파리에서 제작된 이 그림에도 갖가지 고향의 추억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바이올린·잉어·닭·꽃다발 등은 모두 샤갈이 자랑으로 여기는 전매특허와 같은 조형 언어이며, 특히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는 이집트의 Himmelkuh(천국의 소)와 같이 행복한 상징이라고도 말합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화면에 그려져 있는 소와 사람의 옆모습이 전체 구성을 아우르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소의 눈동자는 머언 고향을 향하는 듯하고 샤갈 자신을 대변하는 사람의 눈동자는 소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두 생명체의 옆모습이 묘사된 사이의 공간으로 고향의 기억들이 머릿속의 스크린에 펼쳐지듯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해석은 소와 사람의 시선이 그윽하다고 보고 그러한 시선으로 보아 샤갈에게 있어서 고향의 마을은 친구나 가족처럼 다정하고 따스한 기억이었을 것으로추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추정은 작품에 대한 발전된 해석을 지향하여 타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샤갈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었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다른 해석으로 초록색으로 묘사된 사람의 두상이 몽환적인 화면 분위기에 대비하여 도드라지게 드러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고향 마을을 직시 또는 회상하는 실체적 인물로서의 샤갈 자신을 그려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모두 수긍할 만한 해석들입니다.
왼쪽의 짐승에 대해서는 소 이외에도 염소, 양으로 해석하는 평론가들이 공존합니다.
오른쪽에 배치된 러시아 농부의 모자를 쓰고 있는 초록색 인물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마르크 샤갈 자신인데 초록으로 그린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하다 못해 초록 인간화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것일까요? 아니면 고향이란 시골이고 전원이니까 초록빛을 띠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듯싶습니다. 샤갈이 손에 쥐고 있는 화려한 나무는 성서에 등장하는 생명나무입니다. 이는 생명 혹은 생산의 원천으로서 존재하였던 그의 고향마을에 대한 샤갈의 인식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 주는 장치라고 여겨집니다.
이 작품에 드러나는 원형, 삼각형이 교차하는 화면 구성을 통해 입체파에 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샤갈의 초기 작품(파리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3년 정도의 기간)에는 큐비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큐비즘의 영향력이 소멸 또는 약화되어 가는데 저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와 마을>에서 집과 소녀가 거꾸로 서 있는 것은 하늘로 나는 인간이나 떨어진 목 등과 같이 비합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 혹은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주제와 어울리게 신비하고 동화적인 요소로 묘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낫을 든 농부가 말을 걸려고 하는 듯한 소녀가 거꾸로 서 있는 모습에서 '남녀 간의 상호 이해에 영원한 어려움을 내재함'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자료가 있는데 실제 샤갈이 그런 의도로 '농부와 소녀' 그룹을 그림에 삽입하였는지 궁금합니다. 고향 마을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는 그림에 그런 장치를 삽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지... 암튼, 배경처럼 혹은 칸 만화의 말풍선처럼 그려진 이 모든 것은 십자가 목걸이를 한 러시아 농부로 분장한 샤갈의 기억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나무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의 나뭇가지를 잡고 입을 살짝 벌린 채 푸른색과 약간 흐린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샤갈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은 타향살이를 통해 가지게 된 고향을 향한 동경심과 경외스러움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림에서 샤갈은 이미지를 요소로 분할했으며 각각은 다른 것으로 흐르는 기억이 여러 연관성으로 이어지는 특별한 꿈속의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마르크 샤갈의 절친이었던 시인 블레즈 산드라(Blaise Sandrar)가 그림의 이름을 지었고,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이 장르의 작품을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초현실주의가 대중화되기 수십 년 전에 샤갈은 당시 세계를 표현하는 특이한 방식으로 그림을 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 속에 아직 살아 있는 머나먼 현실에 대한 기묘한 초현실주의적 꿈이 화면에 반사될 수 있는 것을 이 그림이 보여줍니다. 그것은 샤갈이 이전보다 더 큰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의 새 스튜디오(La Ruche에 위치)에서 제작한 최초의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러시아 태생으로 1910년에 파리로 간 샤갈은 먼저 야수파의 강렬한 원색에 충격을 받는 한편으로 입체주의의 영향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고 다이나믹한 공간 취급의 방법을 자신의 환상적인 세계에 결부시키는 형식으로 입체주의를 소화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레제(Fernand Leger), 아키펭코(Alexandr Archipenko),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수틴(Chaim Soutine) 등이 살고 있던 몽파르나스 근처의 라 '라 뤼슈(La Ruche, 벌집이라는 뜻)'라 불리던 보잘것없는 공동 주택에 살면서 자신의 세계에 전념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시인 아폴리네르, 생드라르스 등과도 가깝게 지냅니다. 그때 블레즈 생드라르스(Blaise Cendrars)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두고 온 고향 비테브스크의 풍물을 그린 것이 이 작품입니다. 유태인 교회가 보이는 주택가, 자신을 길러준 러시아 대지를 상징하는 암소, 목이 달아나고 있는 여인, 무지개 빛이 비낀 하늘 등을 중첩시킨 화면 구성은 입체주의의 적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은 매우 이상하고 이국적인 침입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프랑스인의 눈에 너무 순진하게 사치스럽게 보였던 내용 때문일 뿐만 아니라 어두운 땅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색 때문에 당시의 유행하는 그림 중에서 독특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비평가들은 샤갈을 꿈과 무의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독창적인 화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비전은 매우 놀랍습니다. 논리, 중력, 확률 및 정규성의 규칙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영역이 펼쳐집니다. 공작 가운을 입은 신의 사자처럼 보이는 양동이를 든 젖 짜는 여자는 마법의 조명을 받은 천국을 통해 서둘러 마을 옥상에서 송아지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붉은 암소를 찾아갑니다. 아스트랄 라이트 프리즘에 의해 조사되거나 신비하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따스한 시골 풍경과 우주 지대의 이 당혹스러운 대조는 지상의 것들을 젖먹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초현실적 차원으로 밀어 넣습니다.
샤갈은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 살면서 조국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 그림의 순진한 스타일과 호기심 많은 주제는 예술가의 민속 전통, 특히 유대인 유산에 대한 관심을 반영합니다. 한때 '마을 풍경'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채색과 기묘한 배치는 환상적인 장면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민담과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녹색 당나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술 취한 사람>은 <나와 마을>이 완성되기 몇 달 전에 그렸습니다. 1912년 3월 20일에 열린 파리 독립기념관에서 샤갈이 전시한 최초의 그림 중 하나였습니다.
작품은 Chagall이 테이블 근처에 한 사람의 인물을 보여주는 일련의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동안 만든 작은 구아슈(gouache, 아라비아고무를 섞어 만든 불투명한 수채 물감 or 그런 수채물감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이 구아슈는 테이블과 의자 2개가 있는 내부의 비교적 사실적인 뷰를 보여주고 오른쪽에는 술잔이 있습니다. 떠 있는 병에 도달하려고 하는 분리된 머리에 대한 샤갈의 이상한 상상력이 들여다 보입니다.
술주정뱅이는 정신적으로 경험하고 시적으로 강화된 현실의 거울과 같은 연상적인 표면의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나와 마을>에서 완벽하게 표현된 바 있습니다.
기억을 플라스틱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은 작품 <The Cattle Deale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실 그의 삼촌 Neuch와 함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축 시장으로 가는 여행을 떠올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형태를 구성하는 데 사용된 구성, 인물의 규모 및 색상은 농민 생활의 일상적인 장면에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기서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항상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저항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이며, 이와 관련하여 분명한 상징으로 삽입한 것이 수레를 끄는 암말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망아지입니다. 동물의 비현실적인 붉은색이 상징적인 효과를 강조합니다. 모든 인물, 특히 어린 송아지를 어깨에 메고 있는 여성농부는 기념비적인 대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샤갈은 1912년에 유화 및 수채화 버전으로 각기 <The Cattle Dealer>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1923년 다시 한번 작업을 하였는데 1923년 작품에서는 큐비즘적 요소가 많이 완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러시아 예술가 마크 샤갈은 20세기 초반에 모성을 특징으로 한 일련의 예술 작품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1912~1913년의 <Maternité(Maternity, 모성)>가 포함됩니다. 샤갈의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은 매우 개인적이었고 캔버스에 투사된 내면의 감정에 의존했습니다.
그의 예술적 경력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Maternité"는 따뜻한 색상과 섬세한 붓놀림을 특징으로 하여 평화롭고 향수적인 장면에서 아이를 품은 어머니를 묘사합니다. 이 그림은 초현실주의를 예상하고 사랑과 가족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샤갈의 시적 시각 언어를 구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Maternité"와 같은 그림을 만들기 전에 샤갈은 "죽은 사람"과 같은 악몽 같은 장면과 "검은 장갑을 낀 나의 약혼녀"와 같은 실험적 초상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스타일과 기술을 실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것은 그의 경력 후반에 모성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오늘날 샤갈의 많은 작품은 전 세계의 유명 갤러리에 전시되어 유럽과 그 너머의 모던 아트 운동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사실 뮤지엄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을 소장하는 건 경제적인 측면이 더 우선적으로 고려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암튼 샤갈을 스타일과 그가 탐구하였던 주제는 그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공고히 하였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창문을 통해 본 파리>는 작가가 자신의 출생지를 파리와 대조하여 1년 전에 그린 자화상 속의 창가 풍경을 확대한 것입니다. 에펠 탑을 메인 비주얼로 삼았고, 그림을 그릴 즈음 마침 에펠 탑 꼭대기에서 낙하산 타고 내려오는 사람을 목격한 것을 그려 넣었습니다. 창을 통해 파리를 바라보는 야누스 형상의 인물은 서쪽으로는 작가 자신의 새 집인 프랑스를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러시아를 바라보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샤갈은 그의 그림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친구 Blaise Cendrars(이 작품의 이름을 지은)와 Guillaume Apollinaire의 암시적인 조형 시와 유사한 서정적 연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작품은 보나르의 앵티미즘(Intimisme, 인상파 이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의 한 경향으로 따뜻하고 정감 있는 가정 내의 일상생활을 잘 묘사하여 서민적인 소박한 생활 감정을 표현하였다.) 영향을 받았지만 ‘색채의 마술사’라고 하는 샤갈은 창틀에 다양한 색상을 적용하여 보나르와는 다른 아우라를 펼쳤습니다. 샤갈은 “나는 단지 창문만 열었는데 푸른 공기, 사랑, 꽃들이 그녀와 함께 마구 들어왔다.”라며 작품에 대해서 감성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파리 찬가는 하늘에 프랑스 삼색 국기, 뒤집혀 가는 기차, 동화 같은 건물, 의자 등받이에서 피어나는 꽃 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초현실주의, 표현주의풍의 그림으로,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을 부유하는 연인은 화가 자신과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벨라를 묘사한 것입니다.
샤갈은 작품의 소재로 에펠탑을 많이 그렸으며, 아내 벨라와의 ‘사랑’을 평생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의 작품 80%가 ‘사랑’을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과 예술을 나타내는 유일한 색은 사랑이라는 색밖에 없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Over Vitebsk>,
이 작품을 보면 마르크 샤갈이 고향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꿈에서 가보는 고향마을이라고나 할까요?
하늘 위에 두둥실 떠다니며 고향마을, 고향 하늘을 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을 때,
얼마나 고향이 보고 싶었으면 저렇게 직관적이고 간절하게 표현해 냈는지.
두 말이 필요 없는 향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명작이라 생각합니다.
<Over Vitebsk>는 샤갈이 1914년 6월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시작한 일련의 대규모 작업에 속하며, 이 작품은 눈 덮인 Vitebsk의 지붕 위에 떠 있는 과대 실물 크기의 노인 거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등 뒤에 자루를 멘 이상한 공중 캐릭터는 왜 추가된 것일까요?
거지 노인처럼 자신의 마음이 고향을 떠나와서 갈기갈기 찢기고 비루해졌음을 고백하는 것은 아닌지,
저는 그럼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론가 중에 그런 해설을 한 게 없었는데.. 저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보고 느끼는 감정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최선이고, 정답이라 생각하는 편입니다.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린 이 작품은 구성적 측면에서 해독해야 할 미스터리나 상징적 암시가 적은 덜 난해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품에 그려진 거리 풍경이 전통적인 스타일로 제작되어 있어 형식적으로 읽기 쉬운 그림인 것을 단박에 알아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Over Vitebsk는 샤갈의 고향을 그린 그림으로 어떤 면에서는 식별하기 쉬운 풍경화로 분류됩니다. 북구지방에 내린 눈이 겨울 거리를 뒤덮고 있으며, 도시의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 대성당과 같은 양파 돔은 샤갈이 묘사한 사암 노란색 건물만큼이나 스카이라인의 독특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샤갈이 태어난 지역 사회에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된 이래로 이 마을에서 50개의 회당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상자들은 그림의 중심인물에 잘못된 이름을 붙이기 쉽습니다. 적어도 천년 동안 서유럽 단어와 이미지로 대표되는 '방랑하는 유대인'의 원형은 주로 비유대인 문화에 의해 정의되고 연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이디시 문화 내에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을 'schnorrer' 또는 거지와 동일시하는 것보다는 차르 러시아로부터 이주(탈출을 상징)하는 어둡고 수염을 기른 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샤갈은 파리에 있을 때부터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파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샤갈의 강력하고 독특한 세계관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샤갈 작품은 후기로 가면 갈수록 입체파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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