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공작도시
몇년 전(2022년?) JTBC가 수목드라마로 방영하였던 ‘공작도시’는 손상기의 연작 <공작도시>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드라마를 집필한 작가 손세랑(44)은 요절한 천재 화가 손상기(1949∼1988)의 딸이라고 합니다. <공작도시>는 손상기 화백이 1980년대 서울 아현동에 살며 그린 연작(시리즈)입니다.
평생 척추장애에 시달리다가 만 39세에 세상을 떠난 손상기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렸는데 이는 역시 척추장애로 키가 자라지 않은 로트렉과 닮은 꼴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톨루즈 로트렉과 달리 손상기는 가난, 고독과 싸우며 인간의 깊은 아픔을 화폭에 옮겼으며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그의 그림은 요절한 이후 그가 영혼에서 길어 올린 작품이라는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드라마 '공작도시'를 집필한 그의 딸 손세랑은 아버지 손상기가 타계할 때 10세에 불과했습니다. 드라마 작가 손세랑은 평소 아버지 이야기를 주변에 하는 것을 꺼려왔다고 하지만 고독했으나 치열했던 아버지의 예술혼을 어느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남의 도움이 절실했던 손상기였지만 이 작품에서 더욱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을 지나가는 행인의 행동거지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시린 길바닥에서 젖먹이를 품에 앉고 좌판을 연 아낙 앞을 지나며, 물건 하나 사 줄 푼돈조차 없어 주머니 깊숙이 손 찔러넣은 채 지나가는 사내의 심경이 읽혀집니다.
<공작도시-동(冬)>에서 손상기는 줄 수 있는 것이 마음뿐이라 미안한 행인, 그리하여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 푹 숙인 채 걷는 그 남자가 마치 자신인양 그려냈습니다.
<공작도시-외침>은 골목길의 상인이 한손에 확성기를 들고 소리치며 손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하체가 튼실한 행상인의 모습이 오히려 안스럽게 보입니다. 시멘트 도시의 칙칙한 배경에 상체가 겹쳐지는 구간만 밝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행상인 손에 들려있는 확성기의 형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활의 꼬삐에 묶인 남자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캔버스 위에선 소리없는 외침으로 보여지기만 합니다. 삶의 구체적 좌표가 생략된 거의 실존적 인물입니다.
손상기의 작품 중 독특한 구도를 가진 그림들이 많습니다. <공작도시-독립문밖에서>처럼 아주 낮은 곳에서 위를 올려다본 풍경이 바로 그런 사례입니다. 왜 이런 구도로 그리게 된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하고 선명합니다. 손상기는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꼿꼿이 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낮아져 본 적이 없는 위치가 그에게는 정위치였습니다. 일반인은 떨어진 낙엽 같이 바닥에 닿은 시선으로 육중한 담벼락을 올려다볼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손상기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담장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 담을 넘어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내면에 켜켜로이 쌓였습니다.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는 머지않아 재개발로 헐리고 신도시로 교체될 서울 변두리 풍경을 그린 ‘공작도시’ 연작의 하나입니다. 캔버스에는 닿을 수 없는 담이 있는 것도 모자라 건너지 못할 철조망까지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담벼락 끝에 희망이 달려있습니다. 덩굴꽃 한줄기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게 보이나요?
일반적으로 식물들은 아래서 위로 자라지만 담벼락에 드러낸 손상기의 꽃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상기에게 손이라도 뻗으려는 모양입니다. 이제 시선을 담벼락 왼쪽 구석으로 옮깁니다. 그곳에 비로소 빼꼼하게 얼굴 내민 독립문이 보이고 그 위로 또 다른 산동네 판잣집과 빨간 지붕이 오월 장미처럼 피어난 것을 봅니다.
<공작도시-붉은 지붕>은 1980년대의 아연동 한옥촌을 그린 작품입니다. 아현동과 북아현동으로 나뉘어지고 북아현동은 다시 1,2,3동으로 구분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아랫편 평지즈음에는 추계예술대학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대문에서 마포, 여의도로 들어가려면 아현동 굴레방다리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지만 종근당 건물을 지나는 고가도로가 마포-여의도 방향으로 가는 차들을 안내해주고 있었고.. 굴레방다리 근처, 아현동, 북아현동(이쪽을 지나 더 걸어가면 이화여대가 나오죠)길에는 다닥다닥 달라붙은 허름한 한옥집들이 빼곡했습니다. 그 어둡고 거칠은 지방, 한편으로는 날카로움이 번득이기도 했던 그 지역은 어느날 재개발되어 스마트한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 지역,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저소득계층이 살던 마을, 손상기는 1980년대 아현동을 화폭으로 옮기며 공작도시라 명명했습니다.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거대한 회벽, 그 그림자 아래에서 할머니와 어린 손녀가 걸어갑니다.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온 노인은 힘에 부친 듯 호흡을 가다듬지만 팔랑거리며 앞서 걷는 손녀를 보호하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귀갓길 끝은 어디일까요?
상기는 노인로부터 시작되었을 길이 아이에게도 이어질 것을 암시합니다. 끝없이 계속되는 귀가행렬, 이것이 바로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낸 화가 손상기의 시대정신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녔던 작가는 거대한 회벽 끝에 선명한 하늘을 그려 넣었습니다.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를 길을 걷는 두 사람에게 동정심이나 연민을 나타내는 대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기로 한 것입니다.
손상기는 말년에 폐결핵에 걸렸고 40도 안 된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병상에서 그린 <공작도시-영원한 퇴원>은 잘 정돈된 병원 침대 위에 지팡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입니다. 병을 털고 일어나는 날에는 지팡이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가리라는 염원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으로 퇴원하지 못하고 영원으로 퇴원하고 말았습니다.
(계속)
'화가들의 나라-아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은새(leeeunsae) / 2 - 밤의 괴물들 (1) | 2025.04.03 |
---|---|
이은새(leeeunsae) / 1 - 한국 MZ 세대 작가의 발칙한 그림 감상 (1) | 2025.04.02 |
Zhang Xiaogang(장 샤오강/张晓刚) - 중국 4대천왕의 한 사람 (4) | 2025.03.31 |
Son Sang Ki(손상기/孫詳基) / 3 - 풍경화와 정물화 (1) | 2025.03.25 |
Son Sang Ki(손상기/孫詳基) / 1 - 그를 아시나요? (0)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