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아시아

Son Sang Ki(손상기/孫詳基) / 1 - 그를 아시나요?

hittite22 2025. 3. 24. 18:04
728x90

 

 

 

 

 

손상기/孫詳基(1949~1988)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무렵 늑목에 매달려 장난치다가 떨어져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 사고로 인하여 ‘척추만곡’ 진단을 받은 손상기는 평생을 웅크린 채 살아야 했습니다. 이른바 꼽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능력자였던 것일까요? 원광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해 전주와 익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그는 수원으로 갔고 가르치던 여제자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딸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가난으로 다툼이 잦았고 그를 허락하지 않았던 아내의 가족이 둘을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돌도 안 된 아이를 두고 떠나가버렸습니다.

이후 크고 따뜻한 새 사랑을 만나 둘째 딸까지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손상기를 이야기할 때 '한국의 로트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프랑스의 장애화가 톨루즈 로트렉을 아시나요? 자라지 않는 키에 불편한 몸이었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파리의 유흥가 모습(물랑루주 포스터)을 그려낸 인상파 화가 툴루즈 로트렉(1864~1901) 말입니다. 에드가 드가, 고흐 등과 교류를 가졌던 부유한 가정출신 툴루즈 로트렉에 비하여 손상기는 가난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로트렉에 비하여 손상기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톨루즈는 여인에 파묻혀 살았지만 손상기는 1980년대 한국 사회상, 시대를 통찰하는 공익적 시선을 담은 대표작 '공작도시' 연작을 남겼습니다.

 

1988년, 39세에 지병으로 요절한 손상기 화가.

죽어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으며

아마도 일군의 무리들에게는 한국의 대표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을 겁니다.

이제 그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자화상

 

자화상, 45 x 52㎝
자화상, 1979, oil on canvas, 37 × 45 cm

 

2천년대(미래) 나의 자화상

 

 

초기작품

 

양지, 1973, oil on canvas, 130 × 162 cm

 

손상기가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1979년 이전의 시기를 초기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작품은 시골장터의 아낙네,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쬐는 노인들, 시골아이들의 해맑은 표정 등 향토적이고 민속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화풍을 보였습니다.

 

풍광이 좋은 여수에서 등단의 기회를 안겨준 '구상전'의 입상이 있었고 정식 회원으로 추대된 후 '구상전'멤버였던 장리석이나 최영림, 황유엽 등 구상화가들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그런 화풍을 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수 한산사에서, 1975, oil on canvas, 162 x 130.3 cm

 

여수 한산사에서 무슨 행사를 하는 장면묘사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굿판을 벌이는 건 아닐테고.. 뭐죠?

 

작품 <여수 한산사에서>는 향토적, 민속적 분위기(맞나요? 불교적 분위기가 맞나?)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손상기 초기 대표작이라 할만합니다. 쫌 괜찮게 그린 것 같습니다.

 

한산사는 여수 구봉산의 동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사찰입니다. 려시대 1194년(명종 24)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했던 산사(山寺)로 종각, 요사, 대웅전, 칠성각, 용왕각 등의 사찰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절이라고 합니다. 

 

이별 기념사진, 1980, 52 x 72cm

 

손상기는 1979년, 그러니까 부마사태가 발발하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유명을 달리한 그해 서울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럼 1980년에 제작된 작품 <이별 기념사진>이란 1979년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누군가와의 이별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아닐까요? 그냥 추정해 본 것입니다.

 

서울에서(아현동)

 

서울이주 후 손상기는 아현동 빈민가에서 

불편한 몸으로 어렵게 생활하며 그림 그리기에 천착, 매진합니다.

 

그 생활 속에서 손상기는 이웃한 도시 아웃사이더들의 삶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죠.

YH여공의 신민당사 점거시위가 일어난 게 바로 손상기가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1979년의 일입니다.

화가는 시대의 정곡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Wooden Horse-Field, 1980, Oil on canvas, 37.3 x 45 cm
The City of Labour-Traffic Lights, 1980, oil on canvas, 97 × 130.3 cm
Seoul 2, 1980, Rapeseed on canvas, 97 × 130.3 cm

 

손상기가 서울로 상경한 1979년부터 작고한 1988년까지 10년간 그의 미술은 붓을 이용하는 방식이 줄어드는 대신 날카로운 나이프을 사용하는데서 나오는 속도감, 긁힌자국으로 격렬하게 바뀝니다. '공작도시' 테마가 본격적으로 표면화 된 것도 서울 상경 후 정착한 아현동시절 부터입니다. 

 

A Bird and a Girl, 1981, oil on canvas, 45.5 x 37.9 cm
From Hyewon, 1983, Oil on canvas, 44.2 x 37.3 cm
Untitled, 1983, oil on canvas, 24.2 × 33.4 cm
나의 어머니, 1984

 

그림 내용이 잘 파악되는가요? 어두워서 사람 형체를 선명하게 알아보기 힘듭니다. 작품 <나의 어머니>는 자기 몸집보다도 큰 봇짐을 머리에 이고 있어 얼굴이 절반이상 겨려져 있는 여인과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끄는 판자촌 아이를 그린 그림입니다.  손상기가 남긴 작업 스케치의 메모를 보면 좀더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겁고 무겁다/ 인생 삶

 짐이 무겁고 아이가 무겁고 마음이 무겁고

 무거운 것/ 고달픈 것/ 그들을 도우소서.”

 

Nude, 1985, Oil on canvas, 53.1 x 45.2 cm
가족, 1984, 100 x 80cm
Matured Morning, Oil on canvas, 45.7 x 38.1 cm
Nude-Dream, Oil on canvas, 36.3 x 43.4 cm

 

 

근데 코멘트한 거랑 거리감 있게

도시민의 애환을 담은 작품보다 누드화만 소개한 꼴이 되었네요.

다음 회에 손상기의 '공작도시' 연작을 올리겠습니다.

 

 

 

(계속)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