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전람회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2018/04/01 - 예르미타시 박물관전

hittite22 2025. 5.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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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어느 봄날,

둘째 딸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을 다녀왔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중 일부를 전시하는 행사인데 제목으로 뽑은 카피는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었습니다.

 

유럽 3대 미술관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프랑스 미술품을 대량 소장하기 있기 때문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 한국도자명품전>의 교환전시로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러시아와 미술교류라... 푸틴이 정권을 잡고 미친 놀음을 벌이고 있는 현재에는 꿈꾸기 힘든 일이 된 양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암튼, 17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프랑스 미술 300년의 흐름을 조망하는 전시라고 하여 기대만땅으로 전시회 나들이를 획책했었는데 사진이 잘  안 나와서 실망입니다. 필요시 인터넷 서핑으로 사진품질빨을 보완시키며 포스팅을 하도록 하죠. 서비스 차원에서도 그리 해야 할 듯합니다.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갑니다.

 

박물관 진입로

 

지하철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으로 올라가니 하늘이 꾸물거립니다.

누가 벌레들을 하늘에 풀어놓았나 봅니다.

 

박물관으로 오르는 길목
중앙박물관 당도
티켓부스 앞에서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프랑스 미술품을 소장한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뭐, 그래봤자 가보지도 않는 입장인데.. 암튼,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한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들과 러시아 귀족,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수집한 프랑스 미술품은 유서 깊은 겨울 궁전을 장식해 오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 유럽 미술 소장품의 정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럼 어떤 작품이 와 있을까나?

 

노랑머리 소녀(러시아 황제의 딸) 초상화 앞에서.

 

니콜라 푸생,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클로드 모네, 앙리 루소 등 프랑스 거장들의 회화와 조각, 소묘 작품 89건을 선보이고 있다네요...

 

국립중앙박물관 오픈터널

 

전시장 입구 포토존에서..

 

작품감상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속내가 드러나 보이는 문구...

 

고전주의 미술

 

Pierre Mignard(피에르 미냐르, 1612~1695)作, The Death of Cleopatra, 1670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인데요,

화가 피에르 미냐르는 프랑스 중부 북동부의 트루아에서 태어나 18세에 이탈리아로 가서 22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큰 인정을 받았고 명성을 얻어 루이 14세의 부름을 받아 1652년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프랑스 귀국 후 궁정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뱀에게 팔을 물도록 내어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 역시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들로 받은 영향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Jacques Blanchard(자크 블랑샤르, 1600~1638)作, St. Cecilia(성 체칠리아), 1636, oil on canvas, 105 x 140cm

 

앗, 성인 체칠리아가 이렇게 생겼나봅니다.

둘째 딸의 세례명이 바로 '체칠리아라'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St. Cecilia(성 체칠리아), 1636 [detail]

 

이제 성 체칠리아에 대해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성 체칠리아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고 하네요. 음, 몰랐던 이야깁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성 체칠리아는 아주 젊은 나이에 순교한 듯 처녀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종교적 주제로 그려진 중세 성화인데 체칠리아의 모습은 어딘가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 세속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바로크 양식의 그림자인가요?

 

성 체칠리아는 음악의 수호성인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건반 악기를  연주하는 동안 그 연주에 맞춰 천사가 류트(lute) 연주를 하는 모습이 담긴 작품에서 커튼과 창문이 있는 어두운 배경은 구도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빛과 그림자의 사용은 인물들을 강조하고 입체감을 조성하는 효과를 얻습니다. 암튼, 평온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는 블랑샤르의 작품이 바로크 양식을 벗어나

점차 고전주의적 경향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Philippe de Champaigne et L'atelier(필립 드 샹파뉴와 라틀리에), Scene from the Life of St. Benedict(The Poisoned Cup of Wine), 1643~1648, oil on canvas, 92 x 78 cm

 

필리프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 1602~1674)는 브라반트 출신의 프랑스 바로크 시대 화가로, 프랑스 화파의 주요 주창자였고, 18세기 프랑스 왕국 최고의 미술 기관이었던 파리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작품 사진을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찍지 못했습니다.

작품 사이즈가 크면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이 작품의 하단부 폭이 좁아드는 것은 수직으로 정중앙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공간적 제약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이 작품은 성 베네딕트(480~543)의 일생을 그린 열두 개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수도원장인 성 베네딕트에게 불만을 품은 수도승들이 포도주에 독을 타 그를 독살하려 했으나, 성 베네딕트가 잔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문을 낭독하자 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는 전설(설화 혹은 썰)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왼쪽에 앉아있는 인물이 성 베네딕트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오른쪽 수도승 무리가 성 베네딕트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이겠군요.

 

Nicolas Pierre Loire(1624~1677) & Jean-Baptiste Monnoyer(1634~1699)作, Holy Family with Frame of Flowers, 1647~1648, oil on canvas, 59.5 x 75.5 cm

 

니콜라 피에르 루아르 & 장바티스트 모누아예가 그린 <꽃으로 테를 두른 성가족>입니다. 

모누아예와 루아르는 파리에 머물면서 태피스트리 공방의 주문을 받아 함께 작업을 했습니다. 모누아예는 종교적인 주제에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은 꽃 장식 테두리를 두른 그림을 자주 그린 화가입니다. 반면, 이탈리아 회화의 영향이 보이는 마리아와 아이의 초상은 루아르의 작품입니다.

 

Nicolas Poussin(니콜라 푸생,1594~1665)作, Descent from the Cross, before 1630, oil on canvas, 119 x 98 cm

 

니콜라 푸생의 작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림>은 서양 미술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는 테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하늘을 덮은 거대한 먹구름과 화면을 대각 구도로 분할하는 하얀 천의 대조에서 바로크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구도와 장중함에서 고전주의 경향이 드러나 보이네요. 

 

Le Nain Brothers(르 냉 형제들)作, Peasants in Tavern(술집의 농부들), 1640s, 35.2 x 28.7 cm

 

17세기 프랑스 미술에서 인기 있었던 장르는 일상적인 장면을 그린 풍속화였습니다.

작은 캔버스 안에서 프랑스 농민들의 삶과 일상을 찬미했던 르 냉 형제는 이러한 풍속화 장르가 생겨나고 유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입니다. 작품 속에서 농부들은 비록 허름한 옷을 입고 있지만 이들의 여유 있는 자세와 위엄이 가득한 얼굴에서 내면의 고결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Antoine Coysevox(앙투안 쿠아즈보, 1640~1720)作, Fame(명성), 18세기, bronze
Antoine Coysevox(앙투안 쿠아즈보, 1640~1720)作, Hermes(헤르메스), 18c, bronze

 

날개 달린 페가수스(Pegasus)를 타고 있는 <Fame(명성)>과 <Hermes(헤르메스)>는 루이 14세 시대의 궁정 조각가 앙투안 쿠아즈보가 1701~1702에 제작한 대리석 조각을 청동으로 재작업한 것입니다.

이 두 조각상은 루이 14세의 별장인 마를리(Marly) 성의 울타리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것이랍니다. 의미하는 바는 프랑스 군주이자 위대한 태양왕 루이 14세가 전쟁과 무역에서 거둔 성공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루이 14세.. 프랑스 대혁명으로 쫓겨난 군주 아닌가요?

 

Nicolas de Largilliere(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作, Portrait of Pierre Vincent Bertin(피에르 뱅상 베르탱의 초상), 1689

 

파리의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아르므농빌(Armenonville)의 영주 피에르 뱅상 베르탱은 루이 14세 재위 시기의 궁정 회계 담당자이자 유명한 미술 수집가였습니다. 라르질리에르는 초상화가로서 인기가 많았고, 그의 여러 초상화가 동판화로도 복제되었습니다. 남성 인물 초상화인데 매우 예쁘장하게 그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술 수집가였다니 수긍이 가는 외모이긴 합니다.ㅎㅎ

 

로코코(Rococo)/계몽시대(Age of Enlightenment)의 미술

 

18세기 초,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 속에서 프랑스 화가들은 인간 감정과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야외에서의 화려하고 우아한 연회 장면을 담은 그림들이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화가들도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면서 신들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등 새로운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개 무늬를 지칭하는 단어에서 온 '로코코' 양식이 건축과 장식예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에서 유행하게 됩니다.

 

한편 1730년대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가족에 대한 가치, 겸손함, 진실한 감정과 같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를 담은 풍속화나 정물화, 초상화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1760년대 이후에는 자연과 단순한 생활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사상이 사회적 반향을 얻자 풍경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집니다.

 

Nicolas Lancret(니콜라 랑크레, 1690~1743)作, A Scene from thr Corneille's Tragedy, Earl of Essex. 1734, oil on canvas

 

'페트 갈랑트(Fete Galante, elegant banquet/우아한 연회)'의 창시자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의 제자였던 니콜라 랑크레는 당시 귀족 사회의 풍속과 정서를 정확히 포착했던 화가였습니다. 코르네유의 비극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았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 1565~1601)의 실패한 반역을 다룬 연극으로, 당시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연극이었습니다.

 

Alexis Grimou(1678~1733)作, Young Woman in the Theatrical Costume, 1730~1733, oil on canvas, 74 x 59 cm

 

Alexis Grimou(알렉시 그리무)의 작품 <무대 의상을 입은 젊은여성>은 우아함을 한껏 발산하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의복과 피부의 질감뿐만 아니라 모델의 얼굴에 그림자와 가벼운 반사효과를 살려내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부드럽고 섬세한 색상의 팔레트를 사용하여 젊은 여성의 우아함을 강조했습니다.

 

작품이 그려진 1730년대는 루이 16 세 통치 기간으로 당시 극장은 인기있는 엔터테인먼트였고 연극 의상도 매우 정교했습니다. 그림의 젊은 모델은 아마도 여배우 또는 댄서로 추정되며 작품은 그녀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델은 실제로 작가의 연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까마득한 옛날 일인데...

 

암튼, 무대의상을 입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는 그리무의 단골 모델로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음, 이 정도라면 연인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Philippe Bertrand(필리프 베르트랑, 1663~1724)作, The Abduction of Helene(헬레네의 납치), 18세기초, bronze

 

이 작품은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The Iliad)'에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가 스파르타의 아름다운 왕비 헬레네(Helene)를 데리고 도망치는 이야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1704년에는 살롱에서 전시되었고, 이후 여러 점의 청동상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The Abduction of Helene(헬레네의 납치) [detail]

 

어찌 납치해 가는 왕자 파리스(Paris)의 얼굴이 더 긴장되고 안절부절못하는 듯이 보입니다.

제작상의 Miss 아닙니까?

 

Corneille Van Cleve(코르네유 반 클레브, 1645~1732)作, Psyche Discovering Cupid(큐피드를 발견하는 프시케), 18세기말~19세기초, bronze

 

이 조각은 2세기 로마 작가 아풀레이우스(Apuleius)의 소설 '황금 당나귀(The Golden Ass)'에 나오는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묘사한 것입니다. 프시케가 어둠 속에서 잠든 큐피드를 보려다 램프의 기름을 떨어뜨리는 장면인데, 이것은 서양에서 17~18세기의 미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였습니다.

 

Psyche Discovering Cupid(큐피드를 발견하는 프시케) [detail]

 

프시케(Psyche)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큐피드를 발견하고 귀엽게 쳐다보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큐피트를 발견하여 기뻐하는 모습입니까?

 

Robert Le Lorrain(로베르 르 로랭)作, Vertumnus and Pomona(베르툼누스와 포모나), 1704, bronze

 

이 청동상은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가 풍요의 여신 포모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랑을 얻어낸다는 오비디우스(Ovidius)의 '변신(Metamorphosis)'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입니다. 

 

Jacques-Francois Courtin(자크프랑수아 쿠르탱, 1672~1752)作, Young Woman in the Mirror(거울 앞에 선 젊은 여성), 1713, oil on canvas

 

자크프랑수아 쿠르탱은 천진난만하게 노닥거리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는 '페트 갈랑트(우아한 연회)'를 소재로 한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입니다. 작품 속의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에 도취된 듯합니다. 

 

전시장 내부모습
Francois Desportes(프랑수아 데포르트, 1661~1743)作, Still Life with a Dead Hare and Fruit(죽은 토끼와 과일이 있는 정물), 1711, oil on canvas
Still Life with a Dead Hare and Fruit(죽은 토끼와 과일이 있는 정물), 1711 [detail]

 

구성이 묘합니다.

프랑수아 데포르트는 루이 14세의 궁정 사냥화가로 활동하며 동물이나 사냥 전리품, 사냥 장면을 주로 그렸다고 합니다. 오, 그렇다면 루이 14세는 궁정화가를 part별로 운영했다는 말인가요?

 

궁정 사냥화가 데포르트는 동물의 행태와 습성을 면밀히 연구하여 이를 스케치로 남겼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복슬복슬한 토끼털과 가느다랑 새깃털, 반짝이는 포도송이와 껍질이 고르지 못한 멜론 등 다양한 대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Jean-Baptiste Oudry(장바티스트 우드리, 1686~1755)作, Still Life with Fruit(과일이 있는 정물), 1721, oil on canvas
Still Life with Fruit(과일이 있는 정물),1721 [detail]

 

18세기 초에 가장 인기 있는 회화 장르는 정물화였고,

장바티스트 우드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정물화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우드리의 초기작으로 과즙이 풍부한 복숭아와 짙은 녹색의 배, 넘어진 꽃병과 자두가 담긴 바구니를 표현한 명암 대비가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Jean-Baptiste Marie Pierre(장바티스트 마리 피에르, 1713~1789)作, Old Man in the Kitchen (부엌의 노인), c.1745, oil on canvas


피에르는 일상의 풍속을 자주 그리지는 않았지만 앞선 이전 세기의 르 냉 형제의 영향이 보이는 풍속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격정적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고요함, 소박한 일상생활에서의 소재 선택, 생각에 잠겨있는 등장인물은 르 냉 형제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Claude-Joseph Vernet(클로드조세프 베르네)作, Waterfall in Tivoli(티볼리의 폭포), 1747, oil on canvas

 

고대 로마시대의 빌라와 사원, 신전 유적들이 남아 있었던 티볼리는 18세기 중엽부터 많은 여행자들과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던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의 예술과 자연,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실제와 상상의 경관을 결합해 도시와 항구, 자연 풍경을 그린 베르네의 풍경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Jean-Baptiste Greuze(장바티스트 그뢰즈,1725~1805)作, Girl with a Doll(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1758, oil on canvas
Girl with a Doll(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1758 [detail]

 

18세기 중엽부터 프랑스 화가들은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곱게 자란 소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파리의 빈민가 출신입니다. 소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인형과 컵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습니다. 어색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소중한 보물들을 지키고 있는 소녀의 토실토실하고 매끈한 손이 주변 사물들과 대비되어 빛이 납니다.

 

Jean Louis Berthault作, Grand Duchess Elena Pavlovna as a child Jean Veil Louis, 1792, oil on canvas,

 

장루이 부아이유가 그린 <어린 시절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초상>입니다.

부아이유는 1771년부터 1803년까지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왕실 주요 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작품의 모델인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황제 파벨 1세와 황비 마리야 표로브나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아이의 미모가 뛰어나 트로이의 미녀 헬레네의 이름을 따 러시아식 발음인 옐레나로 지었다고 합니다.

 

Pierre Jacques Volaire(피에르 자크 볼레르, 1729~1802)作, Shipwreck(난파), 1765, oil on canvas

 

볼레르는 베르네(Vernet)의 화실에 머물며 바다 풍경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전적으로 화가의 상상으로 그린 것인데요, 생존자를 구조하는 모습과 익사자들, 특히 물에 빠진 아이와 죽은 어머니를 건져 올리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가혹한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자료실에 들렀더니 빅토르 최의 사진도 있습니다.
자료실 풍경
Jacques Bellange(active 1602~1617), The Lamentation, ca.1616, oil on canvas, 115 x 175 cm
Pierre Subleyras(1699~1749), Head of a Boy, oil on canvas, 36 x 27.5 cm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

 

19세기로 접어들어 프랑스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변화의 세기를 맞이합니다.

고전적인 단순함과 조화, 대칭과 정확한 직선을 중시하는 '신고전주의'를 계승한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que Ingres)와 프랑수아마리우스 그라네(Francois-Marius Granet)는 로마에서 혁명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화가들이 개인적인 감성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 개인의 미적 기준이 중시합니다. '낭만주의'로 불리는 이 경향이 1820~1830년대에 확산되면서 화가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신비로운 이야기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기도 합니다. 또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척점에서 귀스타브 쿠르베는 산업혁명 이후 도시의 일상과 삶을 정확하고 정직하게 그려냈고,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나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로 나간 화가들은 변화하는 빛과 대기에 관심을 두면서 인상주의의 출현을 예고했습니다.

 

Emile Auguste Charles Carolus-Duran作, Portrait of Anna Obolenskaya, 1887, oil on canvas
Emile Auguste Charles Carolus-Duran(에밀 오귀스트 샤를 카롤뤼스뒤랑, 1837~1917)作, Portrait of Anna Obolenskaya, 1887, oil on canvas, 120 x 77.5 cm

 

상류층의 초상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카롤뤼스뒤랑은 아카데미즘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밝은 색채를 통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을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국가평의회 의원이자 상원의원인 알렉산드르 오볼렌스키(Alexandr Obolensy, 1847~1917) 공작의 부인, 안나 오볼렌스카야(Anna Obolenskay, 1862~1917)입니다. 전시회의 대표 포스터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전시장 풍경
Jules Joseph Lefebvre(쥘 조제프 르페브르, 1836~1911)作, Mary Magdalene in the Grotto(작은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 1876, oil on canvas

 

쥘 르페브르는 로마의 프랑스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고전주의 조각상들을 연구했고, 이후 주로 신화와 종교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1876년에 이 작품이 완성되자 동시대 비평가들은 작품의 인물이 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경박한 여인을 연상시킨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실제 어떤 배경을 가진 여인이었는지 정확하게 규명된 자료도 없고...

 

Mary Magdalene in the Grotto, 1876 [detail]

 

동굴 속에서 저리 살지는 않았겠죠.

짝이라도 있었다면 모를 일이지만 동굴 생활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는 과정의 삶이라 알려져 있는데..

 

Jean-Leon Gerome(장레옹 제롬, 1824~1904)作, Slave Market on Ancient Rome(고대 로마의 노예시장), 1884, oil on canvas

 

노예시장을 묘사한 작품이라구요?

그런데 왜케 에로틱합니까!

 

Slave Market on Ancient Rome(고대 로마의 노예시장), 1884 [detail]

 

제롬은 고대 로마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특히 많이 그렸던 화가입니다. 이 작품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을 보면, 중앙에 여자 노예들이 있고, 노예 상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이들을 군중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붓 터치, 섬세한 묘사와 조각 같은 인물 표현은 제롬이 40년 동안 학생을 지도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다고 하네요. 아,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고 양식 때문이었군요.

 

근데 왜 고대 로마에서는 여자 노예를 팔면서 발가벗긴 상태로 거래를 하였을까요?

물건(쏘리)에 흠이 있나 없나 봐야 하니까?

 

Jean-Leon Gerome(장레옹 제롬, 1824~1904)作, Gladiator(검투사), 19세기, bronze

 

검투사는 제롬아자씨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소재였습니다.

이 청동상은 처음 1898년 살롱에 전시되었는데, 여러 차례 다양한 크기의 청동상으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Francois-Claudius Compte-Calix作, Ladies Making Music on the Terrace in the Park, 1850s, oil on canvas, 95 x 65 cm

 

프랑수아클로디우스 콩트칼릭스(Francois-Claudius Compte-Calix, 1813~1880)는 이 작품 <공원 테라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들>을 통해서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로코코 풍의 패션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수년간 잡지 '파리식 유행(Les Modes Parisiennes)'의 삽화를 담당하였는데, 직물을 재현하는 능력이 특히 뛰어났다고 합니다.

 

Hippolyte (Paul) Delaroche作, Christian Martyr Drowned in the Tiber during the Reign of Diocletianus
이폴리트 (폴) 들라로슈(1797~185)作,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시대 티베르 강에 빠져 죽은 기독교 순교자

 

이 작품의 주제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의 기독교인 박해입니다. 진홍빛 석양과 청록빛을 띠는 차가운 물이 대조를 이루며 손이 묶인 채 티베르(Tiber) 강에 던져진 순교자의 얼굴을 비추는 신비한 빛은 낭만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킵니다. 순교자를 그린 그림 맞습니까?

 

사실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떠올랐습니다. 거의 유사한 그림이라서 착각하기 딱 알맞았거든요. 

햄릿의 여주인공 오필리아가 흐르는 강물에 자살하는 장면, 그 장면을 그린 '오필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Antonin Mercie(앙토냉 메르시에, 1845~1916)作, David(다비드), 1873, bronze

 

필리스티아의 거인 골리앗(Philistine giant Goliath)을 물리치고 훗날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비드(David)를 묘사한 청동상입니다. 1872년 파리 살롱에서 1등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배를 경험한 프랑스인들에게 앞으로 프로이센을 격파할 수 있다는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Alexandre-Joseph Falguiere(알렉상드르조제프 팔기에르, 1831~1900)作, Running Boy with Cockerel(어린 수탉을 안고 달리는 소년), 1864, bronze

 

한 청년이 닭싸움 경기에서 우승한 닭과 함께 시합장소를 떠나는 순간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청년의 역동성과 젊음, 혈기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64년 파리 살롱에서 메달을 수상했고,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전시되었습니다.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품은 원래 높이 174cm였던 작품을 소형으로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Antoine-Louis Barye(앙투안루이 바리, 1795~1875)作, Lion and Serpent(사자와 뱀), 1832, bronze

 

앙투안루이 바리는 19세기의 대표적인 동물 조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대한 사자가 뱀을 눌러 죽이는 순간을 표현한 작품 <사자와 뱀>은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의 쇠락과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황제 루이필리프 1세(Louis-PhilippeⅠ)가 권력을 잡은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Jean-Francois-Theodore Gechter(장프랑수아테오도르 게슈터, 1796~1844)作, Francois ⅠHunting(사냥하는 프랑수아 1세), 1842, bronze

 

16세기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선도한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작품이 19세기에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게슈터는 사냥을 즐겼던 프랑수아 1세의 사적인 면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조각가는 짐승을 잡는 위험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도 국왕의 생김새와 옷의 세부, 궁정 수렵관, 마구 및 무기, 야생 돼지와 사냥개 등을 정교하게 재현해내고 있습니다.

 

인상주의와 그 이후

 

19세기 중엽 이후 고전주의와 결별한 혁신적인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등 이른바 '인상주의'화가들은 순수한 색채로 변화하는 빛과 자연의 움직임, 도시의 일상을 포착하여 현대적 삶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1880년 이후 모네는 대상의 형태보다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색채의 표현에 더욱 집중했고, 폴 세잔은 자연을 본질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는 방식을 탐구했습니다.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 이후 세잔이 사망한 1906년까지를 '후기 인상주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다양한 화풍을 보여주는 화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예언자라는 의미의 '나비파'를 이끌던 상징주의 화가 모리스 드니,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원시주의 화가 앙리 루소, 1890년대 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정물화를 그렸던 야수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인상주의 이후의 혁신을 이어나갔고, 이들은 20세기 미술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Claude Monet(클로드 모네, 1840~1926)作, Haystack at Giverny(지베르니의 건초더미), 1886, oil on canvas
Haystack at Giverny(지베르니의 건초더미), 1886, oil on canvas

 

모네는 자신의 생애 후반을 지베르니에서 보내며 농촌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 작품은 건초더미를 주제로 그린 작품 중 초기 작품과 이후의 연작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모네가 능숙한 솜씨로 구름 낀 하늘과 바람이 부는 가운데 지평선이 밝아오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Alfred Sisley(알프레드 시슬레, 1839~1899)作, The Beach in Saint-Mammes(생마메의 강가), 1884, oil on canvas

 

1884년의 어느 이른 아침 풍경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하늘과 강, 얕은 강가와 반대편의 높은 언덕을 굵고도 섬세하며 빠른 붓질로 표현하였습니다. 시슬레는 이 무렵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 근처의 레 사블롱(Les Sablons)에 살면서 종종 루앙 강(Loing River)에 위치한 생마메 지역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물과 그 표면의 반영은 인상주의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 이 작품에서 나타나듯 표면을 따라 부서지는 물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상징합니다.

 

Auguste Renoir(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作, Head of a Woman(여인의 얼굴), 1876, oil on canvas

 

이 그림을 지금 다시 보니 둘째 딸이 작년이 낳은 외손녀 '여름'이와 많이 닮아 보입니다. 당시에는 생겨날 생각도 못하고 있던 손녀인데 우리에게로 와서 지금 우리 삶의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네요.

 

여인은 르누아르가 가장 즐겨 그렸던 소재 중 하나입니다. 그가 모델로 삼은 파리의 여인들은 고상한 자연스러움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다양했지만 르누아르는 이들을 가족과 같은 모습으로, 예쁘고 사랑스럽게 표현했습니다. 즉흥적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모델의 생생한 인상을 담고 있는데요, 흐르는 듯한 붓질의 자유로움과 부드러운 색조, 빛과 공기의 효과는 이 시기 르누아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Eugene Carriere(외젠 카리에르, 1849~1906)作, Mother and Child(어머니와 아이), 1880s, oil on canvas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외젠 카리에르는 주로 그의 가정을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모성을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부인이 모델로 등장합니다. 안개가 낀 듯한 뿌연 효과와 회색의 단색조, 빛과 그림자의 대조는 카리에르 작품의 특징입니다.

 

Henri Matisse(앙리 마티스, 1869~1954)作, Blue Pot and Lemon(푸른 주전자와 레몬), 1896~1897, oil on canvas
Blue Pot and Lemon(푸른 주전자와 레몬), 1896~1897, oil on canvas

 

이 정물화는 마티스의 초기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그의 인상주의 시절을 엿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노란색 레몬과 푸른색 주전자는 작품의 중심 요소로서 경쾌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은 곳곳에 반사되며 화면 가득 번져나가는 모습입니다. 표면 전체를 파편화하는 인상주의 작품들과 달리, 마티스는 창문과 벽의 수직선·수평선·대각선으로 견고한 공간을 조직하여 역동적이면서도 안정된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Maurice Denis(모리스 드니, 1879~1943)作, Mary and Maria(마르타와 마리아), 1896 , Oil on canvas, 77 x 116 cm

 

이 작품에서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유리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고, 왼편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들고 있는 접시에는 원죄를 상징하는 사과가 담겨 있으며,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기다리는 듯 고개를 숙인 자세로 대기 중입니다. 작품을 그린 모리스 드니는 예언자란 뜻을 가진 나비파(Nabis)의 일원이었습니다.

 

Albert Marquet(알베르 마르케, 1875~1947)作, Embankment of Menton(망통의 제방), 1905, oil on canvas

 

1905년 여름 망통에서 작업한 마르케의 풍경화들은 모두 선명한 색상이라는 특징을 가졌습니다. 이 작품은 망통의 유명한 해안 산책로를 그린 것인데, 잘 살펴보면 왼편의 건물들 뒤로 도시의 명소인 생미쉘(Sanit Michel) 성당이 보입니다. 같은 장소를 묘사한 또 하나의 작품이 있는데, 두 작품 중 하나가 야수파의 탄생으로 유명한 1905년 살롱 도톤느(d'Automne)에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Embankment of Menton(망통의 제방), 1905 [detail]

 

여기서 망통은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 대표적 휴양지 니스,

그 유명한 니스 근처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Bernard Buffet(베르나르 뷔페)作, Winter Palace(겨울 궁전), 1928~1929

 

베르나르 뷔페는 뚜렷한 윤곽선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그래피즘(Graphism)회화를 제작했던 20세기 마지막 구상화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뷔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원색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그의 후기 경향을 잘 보여줍니다. 뷔페는 또한 수직선을 활용하여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을 뷔페 특유의 고딕양식으로 변형시켰습니다. 그는 19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인전을 끝낸 뒤 이미 판매가 된 이 <겨울 궁전> 그림을 다시 그려서 예르미타시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것이 지금 전시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겨울궁전 사진 앞에서

 

예르미타시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 어떤 시대에 집중된 것인지 모르지만 이번 특별기획전에 내걸린 작품 중에서 뷔페의 <겨울궁전>은 후대에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시기상의 차이뿐만 아니라 뷔페라는 인물이 가지는 특이성 때문에 더욱 다른 작품과 대비되는 면이 강했습니다. 암튼, 뷔페의 다른 인물화에서 느끼는 지나친 인위적인 표현에 동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면서 뷔페만의 개성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이 뷔페 특유의 고딕 양식으로 변환되어 묘한 매력을 발하였습니다. 그걸 아는지 사람들의 발길도 많았던 작품 뷔페의 <겨울궁전>,

삭막하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늠름하고 압도적인 궁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엔 전시장을 나서는 출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외로 작품이 많아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찍히지 않아 쓸만한 게 별로 없습니다. 한편으로 왜 그런지 이날 딸은 몸에 부기가 있어 얼굴이며 몸매며 영 사진빨이 안 먹혀 거의 찍어주지도 못했습니다. 아, 참.. 사진 찍는 재미로 전시장 나들이 하는 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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