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작품 <군마도>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무리 지어 격렬하게 질주하면서 뒤엉키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은 대작입니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 이런 대작은 미술관이 소장할 때 공간 점유강도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장애화가(청각장애) 김기창의 여러 <군마도>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손꼽힐만큼 압도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강한 힘을 표출해 내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관심도는 크지 않았던 느낌입니다. 수묵의 농담과 대작의 역동적인 화면은 1950년대 초에 입체적 동양화를 그리던 시기를 벗어나 새로운 창작세계로 진입한 김기창의 열정과 자신감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박수근의 작품을 만납니다.
한국회화를 전시하는 유명 프로그램이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가입니다. 김환기 화백의 등장이전 한국 현대회화를 대표해왔던 작가의 작품이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각적으로 선명하지 못한 기법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그림으로 여깁니다.
박수근은 일하는 농가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평생 반복(중요.. 새로운 시도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해서 그렸던 화가입니다. 아기를 업은 채 절구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고단한 여인의 생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평론가들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대변하여 설명하는 소재로 삼기도 합니다.
1954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박수근 특유의 색감과 마티에르가 완성도 있게 구사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큰 변화없이 반복된 작업을 계속했다고 말했는데 미세한 변화가 있기는 했습니다. 1960년대가 되면 박수근은 특유의 양식화를 진행시키는데, 이 작품에는 그 전의 무르익은 기량과 정제된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됩니다.
<농악>은 박수근이 동일 소재로 그린 작품 중에서 대작에 속합니다. 세로로 긴 화면에 인물을 상하 2단으로 배치하고 상하 인물들이 각기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그림의 배경을 생략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원근감이나 입체감을 배제하고 간략한 선묘를 통하여 인물 묘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거칠거칠하게 다듬어진 질감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입니다. 마치 단단한 바위에 새겨 넣은 듯한 강직한 선묘로 인하여 풍화된 암각화를 보는듯한 인상을 받게 합니다. 1950년대 후반 독특한 색채와 질감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한 후, 다시 단순성과 평면성을 강화하며 작품의 형식을 발전시키려 했던 박수근의 조형적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인 감상 소견을 덧붙인다면,
이러한 질감만 부각한 것이 박수근 미술의 한계로 보입니다.
판에 박은 듯한 기법을 특별한 진전과 발전 성취 없이 평생 반복하여 천착하였다는 점(사견임^^ 쏘리~)에서 미학적 정체성이 도드라진다고나 할까요?
박수근은 한국전쟁 후 서울에 자리 잡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주욱 죽죽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 쪼그리고 앉아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박수근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소재입니다.
박수근이 길가나 시장, 노점 등의 풍경을 배경으로 즐겨 그렸던 것에 반하여
<유동>에서는 아이들을 둘러싼 농가의 집(아 그런가요? 그가 살았던 서울 창신동일 수도 있는데..)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 전체에 풍기는 느낌은?
더덕나무 껍질처럼 아니, 벚나무 껍질처럼 회색으로 반들거리는 질감 때문에 저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는데 전문가의 감상평에 따르면 온화한 색조,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감, 그리고 아이들 간에 오가는 시선 등 대상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애정이 감지되는 작품이라 합니다. 한참 들여다보니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
박수근 화백을 진하게 영접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중섭 화백을 알현하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 중 하나가 <흰 소> 입니다.
붉은 배경의 황소 머리를 클로즈업한 작품과는 달리, 흰 소는 전신을 드러낸 채 화면의 한쪽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흰색'은 백의민족인 조선인을 상징하는 색이며, 가축 '소' 또한 억압 속에서도 성실하고 끈기 있게 노동하는 동물의 이미지를 담고 있어 조선인의 상징으로 읽히는 모티프였습니다. 과거에 국한된 얘기지요.
여러 점의 <흰 소> 중에서 이 작품은 다소 지친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등을 심하게 구부려 고개를 푹 숙이고, 성기를 드러낸 채 매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입니다.
이중섭은 '소'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솔직한 심리 상태를 마치 일기쓰듯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그려놓은 듯합니다. 대부분의 화가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암튼.. 그렇다면 '소'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동시에 이중섭 자신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닭과 병아리를 그린 그림이라는데 사람도 있고 구경하는 개구리도 보입니다.
사람은 지금 뭘 하는 걸까요? 추정되기로는 모이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오줌 깔기는 건 아닐 테고...
<다섯 아이와 끈>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소재로 한 이중섭의 일련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에 속합니다. 만화작법처럼 보이고 일러스터레이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종이에 유화로 채색한 그림입니다. 일반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맛이 나는 작품이라고 할까?
이중섭의 그림 중 어린아이는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죠.
이 작품에도 총 5명의 아이가 등장하여 저마다 줄(커다란 띠에 가까운..)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뒷모습을 보이거나 앉아 있거나 앞으로 구부리는 등 각기 다른 자세로 화면 가득 서로 얽혀 있습니다. 저러다가 한꺼번에 다 넘어져버릴 수도 있겠어요. 이 모두 다 이중섭의 머리에서 나온 구성이겠지요.
작품에서 이 아이들은 줄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신체의 일부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중섭의 어린이와 동물 작품들 대부분에 등장하는 일관된 구성이요 특징인데, 심리학적으로 작가 이중섭이 '분리 불안'의 징후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동란 중 일본인 아내와 자녀를 타국(아내에게는 본국)으로 피신시키고 혼자 한국에 남아서 빈궁한 생활을 이어갔던 탓으로 여겨집니다.
<가족과 첫눈>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한국전쟁 중 갑작스럽게 피난(아마도 1.4 후퇴?) 내려온 이중섭이 제주도에 정착한 이후에 제작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남녀노소 사람들이 자신들 몸보다 더 큰 새와 물고기 사이에서 함께 첫눈을 맞으며 뒹굴고 있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처럼 현실 세계와 다른 '크기'는 작품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라고 설명합니다. 누가요? 평론가들 혹은 큐레이터들이겠죠. 실제로 이중섭은 일본 유학시절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다수 제작했었던 이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거의 미술을 하기 시작한 처음단계부터 보여주었던 내력이라는 거군요.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모색으로 창안해 낸 것이라면 더 의미 있었겠는데.
1972년과 1974년에 제작된 <작품>은 유영국의 회화 여정에서 일종의 전환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그는 스스로 "60세가 될 때까지는 공부를 하고,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그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완전한 절대 추상에서 점차 자유로운 색감과 형태로 변모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정방형의 화면에 한 작품은 차가운 계열의 색채를, 다른 작품은 따뜻한 계열의 색채를 과감하게 대별시킨 후, 각각의 작품에는 같은 계열의 색채 내에서 미묘한 변주를 추가하였습니다.
유영국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프로 작품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때 유영국에게 있어서 산은 단순히 풍경화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형태와 색채, 질감 등 회화적 요소들을 실험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과업을 부과하듯 완전히 절대적인 추상의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갔는데, 이 모든 과정은 약 2년에 한 번씩 열었던 개인전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장욱진이 즐겨 그리는 소재는 아이, 가족을 포함하는 소박한 자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소재가 전개하는 방식은 일상적 내용, 일상생활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곤 하였습니다. 위의 작품도 마찬가지죠..
<부엌과 방>은 장욱진이 덕소 화실 시기(1963~1975)에 그린 작품인데, 집을 부엌과 방으로 구획하여 각 장소에다 그곳을 대표하는 사물을 배치시킨 특이한 구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최소한의 조형 요소만으로 구성 방식을 보여줍니다. 부엌을 대표하는 물건인 솥과 방에 기거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장욱진의 해학과 풍류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해학도 풍류도 느끼지 못했는데...
제가 장욱진의 작품에서 받는 '인상'이라 하면,
회화와 일러스터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경계선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를테면 정통회화 범주에 넣어주기가 꺼려진다는 것이죠.
평론가들의 해설에 따르면 나무, 집, 새, 아이, 가축 등과 같은 소재를 일상생활과 연결지은 장욱진의 작품에서 다소 예외적인 것이 있다면 여기 소개된 것과 같은 불교적인 색채와 민화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제시하게 됩니다. 위 작품 <호도(虎圖)>는 아이와 연관된 민화적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한국의 전래동화에서 모티프를 삼은 것은 아닐까요?
그럼, 호랑이 몸뚱이에 흐릿하게 묘사해 둔 형상들은 호랑이가 잡아먹은 동물이나 사람아 이라는 의미 같은데.. 좀, 섬뜩합니다. 화풍이 드러내는 일러스터레이션스러운 분위기와 안 어울리게...
장욱진은 한국전쟁 동안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이후의 전쟁기간을 보냈습니다.
<나룻배>는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소, 가방을 멘 소년, 닭을 안고 있는 여인, 항아리를 이고 있는 여인, 자전거와 함께 있는 소년, 뱃사공 등을 가득 실은 나룻배는 작가의 고향에서 장이 서는 조치원까지 반드시 건너야 하는 미호천의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장이 설 때마다 동네사람들은 나룻배에 많은 것을 실어 갔고 장욱진은 어릴 적 많이 본 강나루 장면을 화폭으로 옮겨 그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1939년에 그린 <소녀>라는 작품 뒷면에 그려진 것으로, 캔버스를 구할 수 없었던 당시 작가들이 기 작품의 뒷면에 그리는 일이 흔했다고 하네요. 나무판 앞면에 그린 <소녀>는 유족에 따르면 장욱진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던 산지기의 딸이라고 합니다.
김환기의 뉴욕시대(1963~1974) 작품으로 본격적인 점화 형식이 나타나기 이전에 부분적으로 찍힌 색점이 색면 구도에 결합된 과도기적 작품입니다. 1960년대 후반 점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시작하면서 김환기는 작품에 제작날짜와 일련번호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유형의 제목 선정방법입니다. 당근 제일 싫어하는 건 무제(untitle)이죠.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다는 건 작가 자신도 무얼 그린 것인지 무얼 그리려고 한 것인지 명확하게 인식 못한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일단, 김환기 추상화의 제목 읽기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한 날짜와 완성한 날짜, 작품 일련번호와 크기 등으로 구성된 것임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읽힙니다. 대체로 작품 제목은 작품제작의 시작 날짜를 따릅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의 제목 '3-X-69#120'은 1969년 10월 3일 제작을 시작한 120번째 작품을 의미합니다.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는 파스텔 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된 인물과 사물, 동물 등이 정면 또는 정측면으로 배열되어 고답적인 장식성을 띄는 작품입니다. 단순화된 나무, 항아리를 이거나 안은 반라의 여인들, 백자항아리와 학, 사슴, 쪼그리고 앉은 노점상과 꽃장수의 수레, 새장 등은 모두 1948년 <신사실파> 시기부터 50년대까지 김환기가 즐겨 사용했던 모티브들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피난의 현실을 은유했던 노점상이나 인물들이 판자집, 천막촌 대신 조선의 궁궐 건축물과 함께 배열되고, 물을 긷고 고기를 잡아오는 노동현장의 여성들은 고운 천의 옷을 걸친 여성들로 변모하여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풍요의 이미지를 자아냅니다.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과 투박한 색면 처리는 조선 백자의 형식미를 흠모했던 이 시기 김환기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가을>은 류경채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하게 되면서 학교 뒤편 신촌에 자리 잡은 후 그린 것으로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인상 깊은 자연을 한 번 본 다음 마음속에서 재현해 가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러한 자연 소재들은 시정이 깃들여져 새로운 풍경으로 화폭에 담겼습니다. 자화상인 듯한 남자와 단풍이 물든 나무, 들녘 등이 가을의 색채를 한껏 담아내고 있으며,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것에 비하여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을 통해 작가의 심상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성자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거쳐왔던 인물입니다. 한국에서 의사 남편과 이혼 후 33세에 프랑스로 떠나 그곳에서 화가로서 살았던 신여성 아티스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천년의 고가>는 '여성과 대지' 시리즈의 대표작으로 1965년 국내 개인전 출품작입니다.
개인전을 위해 작가는 파리에서 제작한 기십점의 유화와 판화를 운송해 왔고, 세 아들은 전시를 위해 어머니의 말을 토대로 운송된 작품들의 제목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천년의 고가>는 작가가 태어나고 살았던 진주의 한옥을 연상하면서 그린 작품으로 붓 한번 들 때마다 삼 형제에게 밥술을 떠 주는 마음을 품어 그렸는데 작품 완성을 위해 수 만 번의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노력은 가상하나 제 스타일의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남관은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했던 화가였습니다. <가을축제>역시 추상화인데 문자추상과 맥이 닿아있는 표현기법이 축제에서 뛰노는 인간형상을 느끼게(?) 해줍니다. 아, 저는 그렇게 느끼질 않습니다. 문자가 들어간 그림은 그림이라는 인식을 훼방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거부반응을 일으키죠. '추상'은 저랑 궁합이 본질적으로 맞이 않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후 남관 작품세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푸른색의 바탕에 적색과 녹색 등이 화려하게 흩뿌려지고 데꼴라주 된 형상들을 춤추는 삐에로처럼 풀어 놓았습니다. 이들의 동적이고 활기찬 형상은 무한의 공간을 부유하도록 묘사했다고 하는군요. 믿어지십니까?
박항섭은 이건희 컬렉션을 통하여 처음 접하는 화가였습니다. 화면 속 인물은 실제의 신체비례보다 더 길게 표현하고 있어 마치 고대 벽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1959년에 그린 <가을>과 매우 유사한 구성을 보이지만, 선과 색감은 훨씬 정돈되어 있습니다. 단순화된 배경과 간략한 인체 표현이 세련된 도시의 여인들 이미지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인들>은 김흥수의 파리 유학기 대표작으로 에콜 드 파리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큐비즘적인 단순화를 시도한 작품입니다. 원색과 나이프로 전체 화면에 통일감을 주고 형태의 자율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초기 작품으로부터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60년대로 진입하면서 보다 추상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적 소재의 현대화 경향은 이후 김흥수 작품의 주요 특징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일본 유학에서 서양미술을 접했던 권옥연은 1957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앵포르멜과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합니다. 그는 고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솟대, 토기, 고분 등과 같은 민속적인 소재를 추상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을 통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화가였습니다. 1970년대까지 지속된 이러한 화풍은 인물, 정물, 풍경 등의 구상 화풍으로 회귀하면서 특정 미술사조에 분류되는 것이 불가한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양지>는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전 권옥연의 초기 작품세계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서구인의 비례를 보여주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제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면서도 조화롭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응노 화백이 추구한 미술은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못한 분야입니다. 그나마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나아 보였습니다. 추상화를 싫어하고 문자를 그림화하는 것 역시 극히 비호감입니다. 개인의 취향문제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에서 당연히, 한국의 문인화나 서예 역시 선호하지 않습니다.
<구성>과 <작품>은 이응노의 1970년대 문자추상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두 작품 모두 천 위에 제작한 작품이지만 기법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구성>은 융 같은 표면 위에 물감으로 그려 붓 터치가 보이는 반면 <작품>은 거친 천 위에 문자 형상을 다른 색 천으로 붙인 후 그 형상 주변에는 붉은색의 실로 꿰맨 듯한 기법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작품>에 조그 더 호감을 느낀 이유는 문자라는 느낌이 희석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가는 문자추상을 하면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라믹, 타피스트리 등의 영역 확장뿐 아니라 평면 작품에서도 종이에 채색이 아닌 꼴라주, 천 등 재료에 변화와 실험을 시도한 결과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림 속 문자가 무슨 글자인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름만 알고 있었던 아티스트 문신은 '시메트리(Symmetry)' 즉, 좌우균제 구조의 개성적인 조각을 하는 작가로 유명하지만, 회화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닭장>은 문신이 국내 화단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한 여름 닭장 앞에 앉은 인물을 통해 답답하고 혼란한 당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무녀>가 제작된 1980년은 박생광이 한국적 채색화 양식을 정립해 간 시기였습니다. <무녀>는 민속적이고 원색적인 색감이 다채롭게 어우러지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었던 기존의 작품과는 달리, 대상을 묘사하는 정도와 크기를 다르게 하면서 화면의 깊이를 더한 작품입니다. 1980년대 해외에서 한국 현대미술전이 열리면서 박생광의 격정적이고 화려한 채색화는 한국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천경자의 작품은 어딘가 하나가 빠진 듯한 아쉬움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때는 혹하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때는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묘한 작품들입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수집한 <노오란 산책길>은 1980년대 초부터 서정적 풍경이 담긴 여인상을 그렸던 분위기 있는 작품으로, 천화백의 큰 며느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랬군요. 아, 이제 알겠습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그녀의 인물이 모두가 꼭 같은 인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의 작품감상평과 관계없이 천경자는 이 작품에서 전통 안료인 분채와 석채, 흡수력이 좋은 전통지의 성질을 이용하여 템페라 유화처럼 반복적으로 색을 쌓고, 지우는 과정을 통해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우러나오는 색채를 표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림의 무게감과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이 잘 살아있습니다.
댕댕이가 등장하는 것은 화가자신의 산책이기도 하지만 반려동물집사로서의 의무행위의 하나인 '댕댕이 산책'에 나선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요즘 거리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댕댕이를 몰고 나오는 족속들 천지인데 천경자 화백은 1980년대에 이미 댕댕이 산책족이었나 봅니다.
갈 곳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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