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는 누구인가?
김환기는 한국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서울과 동경 유학을 하였고 파리를 거쳐 뉴욕에서 미술인생을 개척하고 마감한 한국 현대화단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1913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섬이 있는 지역은 최근 관광명소로 떠오르는 보라섬(퍼플섬)과 섬티아고가 인접해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김환기는 어려서부터 섬아이지만 부모의 뒷배가 든든하여 미술을 전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환경에서 자란 셈입니다. 하지만 섬은 섬인가 봅니다. 김환기는 육지가 그리워 그쪽을 향하여 목을 빼내다 보니 키가 커졌다고 농담을 할 정도 큰 키가 컸는데 거의 190cm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지주 집안 자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그는 중·고등학교 유학을 경성이 아닌 일본에서 하였습니다. 그가 일본 긴조중학(錦城中學)을 졸업하고 귀국하자, 집안에서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말고 가업을 잇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김환기는 부친 몰래 헤엄쳐서 목포행 배를 잡아탔으며, 밀항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갔습니다.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하자 어머니가 몰래 일본으로 학비를 보내주어 1933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 대학은 한 학부에서 문학, 철학, 미술사, 미술 실기 등을 함께 가르쳤는데 예술과 학감을 지낸 일본인의 호고에 따르면 “당시의 새로운 예술 교육이 희귀한 시도”라서 일본인조차 “수재라기보다 천재를 자부하는 활발한 청년들이 모였다”라고 합니다. 식민지 조선인도 대단합니다. 자식 공부를 시키려는 열망은 '식민' 혹은 '강점'이라는 시대적 제약도 사그라뜨리지 못했던지 김환기 외에도 시인 김기림과 임화, 화가 구본웅과 박고석 등이 니혼대학 예술과를 다녔고 졸업했다고 합니다.
원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갔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깊었던 김환기였습니다. 그는 1936년 일본 니혼대학 졸업 후 한국의 문학계와 미술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핵심, 요즘 말로 ‘핵인싸’가 됩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46년~1948년)를 거쳐 홍익미술대학 교수(1953년~1955년까지)로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1956년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모색하면서 파리로 날아갑니다. 당시 세계 미술 수도였던 파리에서 김환기는 3년간 그림에 전념했습니다.
1959년 서울로 돌아와 1962년까지 홍익대미대 교수와 학장으로 일하다가 교수직을 그만두고 홀연히 1963년 뉴욕으로 복귀하여 작업에만 전념합니다. 뉴욕 시대 11년째 되던 1974년 7월 김환기는 뇌일혈로 운명했습니다. 그때 나이 62세, 우리 아버지와 같은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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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항섭 평론가
"김환기는 초기에는 파울 클레를 통해 조형적인 세계에 눈을 뜨면서 점차 독자적인 조형언어와 어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구상작업에서 보여준 세련된 형태 감각은 가히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이다. 추상 작업에서도 색채 대비와 조화, 구성이 탁월하고,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가 우아하다."
윤진섭 평론가
"김환기는 달 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 선비의 세계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바탕으로 전통적 미의식을 세련된 현대 조형언어로 전환했다. 이런 작업으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편적인 미의식을 추구하며 시대성을 획득했다."
이선영 평론가
"김환기는 자연, 또는 자연적 삶을 추상의 언어로 표현한 작가이다. 서양미술사에서도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의 작품 변화를 보면 자연과의 관련성이 존재하지만 이후 현대 회화에선 화면의 평면성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김환기의 작품은 자연에 완전히 얽매여 있지 않다. 동시에 자연과 분리된 인공 언어도 아니다. 자연과 언어 그 중간 어디에서 매 순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긴장감이 있다."
서성록 평론가
"김환기의 점화는 매우 서정적인 추상이다. 그 숱한 점이라는 게 하늘의 별을 상징할 수도 있고, 머나먼 고국에 있는 그리운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친구와 벗들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캔버스에 점을 찍었다고 했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곱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시인 같은 사람이었다."
최열 평론가
"김환기는 문인화와 민화 등이 지닌 동양과 한국 특유의 감각을 서양 20세기의 모더니즘으로 소화해낸 화가이다. 과거 전후 삶의 궁핍함 속에서 이중섭과 박수근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첨단 산업사회에 접어든 지금은 굉장히 도시화되고 귀족적인 우아함을 지닌 김환기 작품이 더욱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한목소리로 "김환기가 한국 현대미술의 디딤돌이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서성록 평론가
"김환기는 "추상회화를 전혀 알아주지 않고 모던 아트에 대한 기반이 없던 시절, 이를 돌파하고 개척해 나갔다. 50세에 그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뉴욕시대'가 없는 김환기는 상상할 수 없다. 화가로서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 나간 도전의식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윤진섭 평론가
"요즘 한국 미술이 단색화 작가를 필두로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는데 그 앞에 김환기가 있었다"
자화상
초기작품(동경시대)
<종달새가 노래할 때>는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제22회 일본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김환기의 데뷔작입니다. 원통처럼 표현된 상체나 팔 등으로 보아 표현주의적 요소가 드러나 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김환기는 데뷔할 때부터 사실적인 묘사와 동떨어진 추상화 계열의 작품을 추구해 나갈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집니다.
김환기는 일본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채 미술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습니다. 청년시절의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뒷 배경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뭔가 감이 오는가요?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던 김환기는 원래 '섬아이'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고향인 섬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작품제목은 왜 <종달새가 노래할 때>로 정해진 것일까요?
그것은 여인이 머리에 이고 있는 광주리 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 종달새 알 한 바구니가 담겨있는 사실에서 작품제목이 탄생한 근거를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40년대의 그림, <섬 이야기>는 고향인 기좌도를 소재로 항아리 형태를 반복하여 마치 파문처럼 확산되어 가는 형상을 표현해낸 작품입니다. 원형의 곡선이 운율감을 자아내는 느낌이 듭니다.
일제 강점기에 그려진 작품인데 202년에 보아도 세련되고 멋져 보입니다.
<피난열차>는 6·25전쟁의 한 단면을 네모와 원, 파랑과 빨강, 검정으로 압축하여 표현해 낸 작품입니다. 'Simple Is Best'는 직장 생활할 때 보고서 작성 시에만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추상화 혹은 현대미술에서도 단순화와 압축화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임이 느껴지지 않나요?
동족상쟁의 비극을 콩나물처럼 빼곡히 실려가는 조상들 모습으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내었습니다.
기차에 올라탔다기보다 짐짝처럼 실린(?) 얼굴들은 모두 동글동글한 형태를 갖춘 채 관람객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차는 가동이 시원찮거나 포격에 대비하여 잠시 정차한 듯 혹은 느릿느릿 운영되는 것으로 보이고, 기차 안의 사람들은 마치 기념촬영이라도 하려는 듯 이쪽을 향해서 바라봅니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실려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속절없이 푸르고 광활한 공간이 높게 펼쳐진 그림은 피난 떠나는 사람들의 막막한 상황을 여지없이 표출해 내는 형국입니다.
<피난열차>는 김환기의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피난시절 부산에서 그린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캔버스에 등장하는 꽃수레 주인이나, 근처에서 무엇인가를 팔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서 기다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난지 임시 수도라는 시대상과 관계없이 화폭 중앙에 자리 잡은 꽃수레는 화사하고 다양한 꽃들로 가득합니다. 수레 안의 꽃들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맞추어 표정을 바꾸지는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꽃들은 화려하고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그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피란생활’ 와중에도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또 누군가는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꽃을 사서 선물했을 테니 아무 비현실적인 풍경화를 그린 것도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존재, 또는 객체에 대한 진실을 느껴봅니다.
푸른색으로 음영을 주어 표현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홍익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중일 때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 뒷면에는 당시 수업을 들었던 김영환, 박광진, 박석호 등 제자들이 '홍익대학 미술대학이 종로 2가에 임시교사로 있을 때 인물화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그리신 사실작품'이라는 당시의 일화를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가을>은 부산 피란 시절을 마치고 서울로 복귀하여 그린 그림으로 김환기가 시인 조병화에게 선물한 작품입니다.
환도를 자축하듯, 서울의 상징인 한강과 삼각산, 그리고 광화문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해 정초 아침 김환기의 집에서 술을 먹던 조병화가 정오쯤 되어 더는 술이 들어가지 않아 가겠다고 하였을 때,
“이 방에서 그림 하나 가지고 가라”
하자 조병화가 직접 들고 온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그림이라 치부하고 김환기는 친구들에게 곧잘 그림을 주었습니다.
파리시대(1956~1959)
<사슴>은 단순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귀여운 사슴 한 마리와 달을 그린 동그란 윤곽선, 그리고 푸르스름한 산이 그림의 전부입니다. 김환기가 즐겨 사용하던 파란색 계통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오로지 사슴 코와 뿔만 빨강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캐럴송 '루돌프 사슴코'가 떠오르는 이 빨간 코와 빨간색 뿔 때문에 사슴이 귀엽게 보입니다. 다리보다 목이 더 긴 것은 아마도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떠올리며 그렸던 것으로 짐작 가는데 목은 몸통만큼이나 굵어 휘어질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다리가 가냘퍼 옆으로 쓰러질 위험성(?)이 엄습해 옵니다. 그나마 뒷다리 허벅지 근육이 발달해 있어 간신히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군요.
사슴 얼굴은 옆면으로 살짝 비틀어 있어 관람객을 바라보는 듯하며 그런 자세를 취하다 보니 귀와 뿔이 앞면으로 드러나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평론가의 해설에 따르면) 화면의 두터운 마티에르(질감)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만약 이 두터운 마티에르마저 없다면 너무 성의 없이 그린 그림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만큼 단순한 그림이라고 하겠습니다.
1956년 파리로 건너간 김환기는 궁핍한 유학생활을 하던 중 한 기업가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1960년대 초 귀국하자마자 김환기가 찾은 사람은 자신을 후원해 준 그 기업가였습니다. 김환기는 감사의 뜻으로 파리에서 그렸던 구상 작품 한 점을 선뜻 선물했습니다. 소장자는 1970년대 딸에게 결혼 선물로 그림을 줬고 그 딸은 애지중지 작품을 보관해 오다가 50년 만에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작품 제목은 <창공을 날으는 새>로 푸른 하늘과 달, 새가 있어 누가 봐도 김환기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크기는 25호로 그리 크지 않지만 추정가는 7억원에서 9억원 사이, 보관 상태가 좋고 1958년작으로 작가의 파리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항아리와 날으는 새>는 1958년 제작된 작품으로, 김환기를 대표하는 핵심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푸른 공간의 배경 위에 한 마리의 새가 힘찬 날갯짓으로 관통하는 듯 청아한 항아리 위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특히 층층이 덧바른 마티에르가 또한 인상적인 이 작품은 당시 앵포르멜이 유행하던 파리 화단의 분위기를 담은 것으로 파리시기 주요 작품의 특징이 잘 녹아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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