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테델미술관 개요
-정식명칭 : Städel Museum
1) 주요 전시정책
- 중세부터 현대 미술까지의 3000여 점 소장 및 상설 전시.
- 사진촬영 허용
2) 건축
- 최초 : 1878년, Oskar Sommer(오스카 조머)
- 개축 : 2009~2012, 건축사무소 Schneider + Schumacher(슈나이더 + 슈마허)
3) 입장료
- 성인 18유로 ( but, 화요일 15시 이후 9유로)
- 12세 미만 어린이 무료.
4) 개관일
- 화, 수, 금, 토, 일 : 오전 10시~오후 6시
- 목 : 오전 10시~오후 9시(와우~)
5) 휴관일
- 월요일
2. 슈테델 미술관의 위치
3. 주요 작품
보티첼리의 명작 중 하나이다.
젊은 여성의 실물보다 큰 흉상의 환상적인 장식으로 보아, 이 작품은 엄밀한 의미의 초상화가 아니라 신화 속 요정의 모습을 빌어 이상적인 초상화를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옆모습 초상은 일찍 죽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의 연인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Vespuccis)를 담은 것이다. 그녀 목걸이의 펜던트도 메디치 가문의 측근임을 상징한다.
노란색과 녹색이 주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에서 놀데는 개신교 사제, 수도사, 그리고 악마적인 인물들, 그리고 몇몇 선출된 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묘사하였다. 그림이 제작된 해에 작가는 베를린 분리파에서 추방당하고 다른 위기들을 겪었던 시기였는데 그 탓인지 그리스도께서 적대감에 저항하셨던 모습을 그린 듯하다. 놀데 또한 반대자들에게 맞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놀데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던 초기 작품에서 오늘날 높이 평가받는 다채롭고 표현력 넘치는 회화 양식으로 전환했던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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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그해 봄이 돌아오자 히타이트는 서유럽 뮤지엄 순례여행을 떠났다.
그러니까 그 여행이 성사된 계기는 그전 해 섣달 그믐날부터 잉태된 일이었다. 30여 년간 다니던 직장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게 여행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IMF 때에도 잘 견뎌냈는데 그땐 왜 버티지 못했을까? 그건 외부적 요인이라기보다는 팀장 직책(부장)에서 임원으로 승진해야 하는 시기였음에도 점프하지 못한 탓이니 내부적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암튼, 히타이트는 인생 역정의 한 나이테를 만들고 통과해 가는 과정에서 해가 바뀔 무렵 마치 통과의례처럼 해외 뮤지엄 순례 여행을 시도하였다.
동행은 20대 후반의 딸 한나.
그렇게 구성된 여행동지 2인은 강서구 방화동의 살던 집에 반려묘 만두를 홀로 남겨놓은 채,
홀연히 인천공항을 거쳐 유럽의 관문(실제는 중부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로 진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는 히타이트가 직장 생활할 때 방문한 적이 있어 낯설지 않은 도시였다. 일반적으로 여행이란 맨땅에 헤딩하듯 무작정 낯선 나라, 눈에 설익은 공항으로 잠입하면서 겪는 좌충우돌의 에피소드까지 하나의 재미있는 일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홀로 여행이 아닌 동행이 있을 때라면 사소한 일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해 초봄 히타이트가 그런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첫 기착지로 프랑크푸르트를 낙점한 것은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곳 프랑크푸르트에는 첫 순례예정지 슈테델 미술관이 있었다.
슈테델 미술관은 프랑크푸르트 중심가, 카이저 돔이 있고 뢰머 광장이 펼쳐지는 강변 북부에서 암 마인 강 남쪽 지경으로 건너가면 바로 만나게 된다. 암 마인 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강을 따라 펼쳐지는 풍광인데 서울의 한강보다 강 폭이 좁은 연고로 강북과 강남이 마치 서로 손잡고 이웃해 있는 느낌을 자아낸다. 다리를 건너가는 일도 쉽고 편하다. 슈테델 미술관으로 건너가는 다리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암튼 다리를 건너 슈테델 미술관 입구를 찾아 강변길을 걸을 때 나뭇가지가 울퉁불퉁한 처음 보는 듯한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햇살을 받아 역광에 의한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근사하게 보였다.
히타이트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나무들 좀 봐, 굉장하지 않니? 마치 외계행성의 수도를 걷는 느낌이야.."
한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나무인데요?"
그의 딸 한나는 히타이트만큼 나무에 진심이지 않았던 것이다. 안철수가 정계 입문한답시고 진심캠프를 오픈했을 때 대다수 국민들이 그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그런 내막이야 차치하고 딸의 반응을 자세히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걸까. 히타이트는 목소리에서부터 벌써 흥분한 상태였다.
"글쎄다. 처음 보는 나무 같아. 근데 멋있지 않니?"
"..."
"가로수로 심어 놓은 것 같은데 수종(樹種)을 적은 태그가 안 보이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나무는 코레아에도 서식하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일종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강서구 방화동 인근의 등촌동 거리에도 이곳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강변처럼 가로수 삼아 플라타너스를 줄줄이 심어놓은 거리가 있었다. 단지 코레아 서울 등촌동 거리의 플라타너스보다 이곳의 나무는 꼬불거림의 정도와 횟수가 더 심했던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래서 히타이트는 처음 보는 나무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단순히 오인하는 수준이 아니라 색다른 나무가 이곳이 자신의 유일한 지경임을 알리며 번성해 있는 게 매우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다. 50대 중반을 넘긴 동아시아의 아저씨 히타이트는
'오, 슈테델 미술관에 오니 거리의 가로수마저 멋지네!'
라며 홀로 감탄했다.
바야흐로 서유럽은 미술관 천국이라 할 만하다.
미술관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나라, 심지어 잡초처럼 우후죽순처럼 돋아나오는 나라, 그런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장착한 인물이 바로 히타이트이다. 비록 그의 뇌에 인 박혀있는 진부한 중세 종교화 전문 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와 '마드리드의 프라도'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지만 말이다.
히타이트의 개취와 관계없이,
우피치와 프라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리의 루브르 뮤지엄이나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 버금갈 만큼 수준 높은 종교화로 채워진 성화 저장고였다. 그래서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히타이트는 여정의 필수 목록에 우피치와 프라도를 포함시켜 놓은 터였다. 이들에 비한다면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은 비교적 다양한 사조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히타이트와 그의 딸 한나가 호감을 느끼는 인상주의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히타이트가 들뜬 기분이 된 것은 그런 여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행가이자 미술품 수집상이었던 슈테델의 심미안이 히타이트와 우연히 일치한 것이었겠지. 암튼 히타이트는 뢰머광장에서 점심을 때운 후 마인강에 얹힌 여러 개의 다리 중 고고학 뮤지엄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로 향했다. 그리고 웅장한 성채처럼 서 있는 슈테델 미술관 건물의 위치를 어림잡아 살펴본 다음, 강을 건너자마자 미술관의 정문이 있으리라 예상한 이면 도로로 앞서서 걸어갔다.
히타이트는 미술관의 입구가 강변을 향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넓은 미술관 외곽을 한 바퀴 둘러 가는 수고를 자초하고 말았다.
슈테델은 누구인가?
히타이트가 입구를 찾느라 뺑뺑이를 돌아야 했던 슈테델 미술관은 바로 수집가 슈테델에 의해서 설립된 곳이다.
그럼, 슈테델에 대하여 이해가 있어야 하는가?
당근이다.
서양에는 재력가이면서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가진 콜렉터들의 기증작품으로 설립된 미술관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그림을 축재의 수단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미술의 발전을 위하여 기여한 바가 적지 않기 때문에
'수집가'라는 카테고리로 별도 탐구를 할 필요성까지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요한 프리드리히 슈테델(Johann Friedrich Städel)은 1728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요한 다니엘 슈테델은 무역업에 종사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던 터였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그로서 코른마르크트(Grosser Kornmarkt)에서 대대로 이어온 향신료 사업을 이어가다가 1784년 56세의 나이에 로스마르크트(Rossmarkt)에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향신료와 커피 외에도 남색과 같은 안료와 납 막대와 같은 금속을 판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수료 거래와 은행 거래에도 참여하여 부를 키워나갔다.
축재를 하자 예술에 관심을 가졌던 슈테델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1760년대부터 그림, 드로잉, 판화, 소형 조각품으로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수많은 여행을 통해 구입한 것이라 한다.
회화 수집품은 독일과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에 집중했지만, 판화와 드로잉 분야의 수집은 훨씬 더 광범위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미술사에 대한 포괄적인 수집으로 이어나갔다.
그는 일찍부터 자신의 미술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신진 예술가들의 양성과 육성에 뜻이 있었으므로 자신의 거주지에서 미술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개인 가이드 투어를 제공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이자 향신료 상인인 요한 프리드리히 슈테델은 1815년(사망하기 1년 전) 로스마르크트 중심부에 위치한 자신의 집, 미술품과 서적 컬렉션, 그리고 전 재산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에 기증했다. 그는 유언에서 "슈테델셰스 쿤스틴스티투트(Städelsches Kunstinstitut)"를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에게 박물관 겸 미술 학교로 즉시 개방할 것을 명시했다. 슈테델 미술관의 탄생된 것이다.
작품감상
슈테델 뮤지엄에 입장하여 처음 마주한 작품은 회색 중절모를 쓰고 있는 괴테 아저씨 그림이었다. 티슈바인(Tischbein)의 <로마 캄파나의 괴테>인데 캔버스 안에 그려진 궤테는 아주 말쑥하고 스마트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다.
"아빠, 여기 괴테 그림이 있네요?"
히타이트는 딸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젊은 괴테와 접신하였다.
그렇다면 말끔한 복장에 미남형인 괴테를 그린 화가는?
설명 딱지를 들여다보니 교복 명찰처럼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그해 초봄까지만 해도 히타이트에게 있어서 티슈바인(Tischbein)은 뉴프론티어 바깥에 존재하는 화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에 살고 있는 화가였다. 물론 미술애호가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히타이트는 이제 막 미술에 눈을 뜨는 초보자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면,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에 괴테의 전신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 전 그가 건너온 마인 강 북변, 뢰머광장 인근에 괴테 생가가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괴테가 맞긴 한데, 미화시켜 그려진 것으로 보이네.."
히타이트는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문학사적으로 괴테(1749~1832)가 자신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 것은 26세 때의 일이었다. 그럼 저 그림은 몇 살 때 모습일까?
딸이 재빨리 계산한다.
"1749년에 태어났고, 괴테의 친구 티슈바인이 작품을 그린 것이 1787년이니 37세 혹은 38세 정도 되었어요."
"오, 그러니? 그럼,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게 맞네. 괴테가 젊었을 때는 미남이었나 보다."
실존의 최하층에 속하는 심미주의자 히타이트는 저급한 리액션을 스스럼없이 해낸다.
"괴테가 37살 때 2여 년간 휴식을 겸한 이탈리아 여행을 결행했는데 그때의 모습을 그린 거라네요."
한나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알려준다.
'세상이 좋아진 거 맞네. 해설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으로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 획득할 수 있으니...'
"그런데 <캄파냐의 괴테> 작품이 안주하는 공간으로 치면, 여기 슈테델 미술관이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어. 프랑크푸르트 하면 슈테델인데, 이곳에서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대문호 초상화를 소장하는 것은 잘 어울리는 그림이지."
히타이트는 딸에게 뭔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면서 혼잣말처럼 덧붙이기를,
"아, 이 작품이 티슈바인의 대표작이었구나. 내가 잘 모르고 있던 화가라는 게 놀랄 일은 아니었군. 암튼, 괴테가 잘생긴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괴테와 티슈바인, 그들 우정의 현란한 기념물인 것만은 틀림없어.."
"아.. 우정."
"그런데 이 우정의 표현을 괴테에 대한 보은이라고 해설하는 평론가도 있어. 그건 왜냐하면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을 때 괴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거야. 이탈리아유학 중인 티슈바인은 돈이 떨어져 고국으로 돌아갈 처지에 있었는데 괴테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고 이태리 유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는 거네."
"그렇군요. 그런데 그림의 배경처리는 의도적인 것 같은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나가 질문다운 질문을 하나 내놓았다.
히타이트는 설명을 위해 용을 써야 하는 시간이 도래함을 느낀다.
"1786년 9월 고대의 유적도시 로마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다니며 가깝게 지냈어. 둘 다 고전을 애정했던 성향을 지녔는데, 여행 중 그려진 이 그림 속에서 괴테는 고대와 현대를 잇는 인물로 묘사되었지. 무얼 보고 그리 판단하느냐 하면 당시 유행하던 챙 넓은 모자와 크림색의 여행 코트를 착용한 괴테의 발은 현실의 땅을 딛고 있지만 코트로 가려진 왼쪽 다리는 고전의 세계를 향해 뻗어있는 거야. 그 고전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로마 근교의 폐허가 된 유적지 캄파냐이고.."
"아, 그래서 보은이라는 해석이 나온 거구나. 위대한 인물처럼 괴테를 묘사한 거네요."
"그런 셈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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