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에 친해져 가던 초기 시절, 나는 고흐에 빠져있었기에 고갱에 대해 일종의 비호감을 가졌었다. 고흐와 얽히고 엮인 고갱은 화가 친구로서 고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처세하지 아니하였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인간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솔직히 고흐를 아는 것에 비하면 고갱에 대해서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단편적인 지식 혹은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그의 삶에 대해 초보적인 이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명작 50%이상을 차지하는 타히티 시대의 그림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호감이다. 나는 왜 그런지 타히티 시대의 그림보다는 그 이전 시기에 그린 기독교적 문화에 기반을 둔 고갱 그림을 좋아한다.
고갱이 기독교적인 인물이라서?
노노.. 노노노.
그는 신앙인의 눈으로 볼때 매우 교만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자신을 덧입혀 표현한 것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서양 사람들이나 미술사가들은 고갱의 그런 표현 방식을 익스큐즈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갱의 부정적인 면은 제켜놓고 그가 그림으로 표현해놓은 미학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미술사가들이 평하는 글을 읽으면 머리가 유식해지는 듯, 고갱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넓혀지고 깊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감상법은 결코 추천할 것이 못된다. 남의 것을 빌어다가 자신의 감상으로 치환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에 매몰되면 어느 순간 도둑질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니까.. 내 마음에서 숙성되어 생겨 나온 미학적 깨달음이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멋진 미술평론이라 하더라도 그건 나의 감상으로 멘트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옮기는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잠깐 고개를 돌려 다른 데 신경을 쓰다보면 빌어 온 평론의 멋진 표현도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까맣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어떻게 고갱의 그림이 가진 힘과 치유력을 인지하게 되었는가?
당연히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위에 지루하게 기술해 놓은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처음에 고흐의 색과 선명한 붓질에 매료되어 미술애호가 그룹에 합류했기 때문에 그 원죄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나는, 고갱이 빚어낸 색감과 선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미학이란, 일종의 '애매함'이라는 선입견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제도 느끼고 오늘도 느끼고 계속 느낀다. 내가 일편단심 스탈도 아닌데 한번 좋으면 끝까지 좋고 한번 싫으면 웬만해서 긍정으로 선회되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던 나에게 언제부터인지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인물을 보면서, 어?어?어? 마치 이식된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명력을 발휘해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니면 깨달음인가? 암튼, 비록 이 화가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억지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서 또 다른 매력과 치유의 힘이 샘솟아 나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아, 뭐 이런 미췬 코멘트가 다 있나...
아직까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이나 초현실적인 그림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추상화, 아니 좀더 쉬운 예로 입체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카소 그림에 대한 미술평론가의 설명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표현해 내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그의 그림에서 매력이라도 느끼나?
나는 그런 의구심이 강하게 일렁거렸다.
또 한편, 칸딘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걸까?
그런 의문에 뒤따른 나의 사유의 종착점은 그들의 그림에 도무지 공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끔, 때때로, 나는 추상화를 그린 화가나 그 그림을 보는 애호가가 공통으로 교감을 일으키지 않을지라도 그저 이유 없이 좋아서, 추상화를, 초현실주의 작품을 즐겨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추상화나 초현실주의 작품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직'이다.
고갱은 색의 사용에 '자유'를 부여한 화가인 듯하다.
나는 그런 깊은 뜻까지 파악하며 그림을 즐기거나 소비하는 고급 독자는 못된다. 색상이나 선이나 만들어낸 형체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 그저 마음에 들면 좋아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지만 한국 화가들은 그림을 해석하거나 그림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그 '무엇'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것은 하나의 푸념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에서도 멋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이거나 식상한 그림에 매몰되어 있는 일부 화가군들에게 실망하는 사람들이 도망가버리기 전에 한국 화단이 빨리 깨어나기를....
아, 젠장..이제 본론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는 고갱이 당시 자신의 처한 처지를 드러낸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붉은 머리를 한 예수의 그림에서 사람들은 상징성 혹은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속뜻을 읽으려 애쓴다. 사실 내가 이 그림을 보며 느끼는 고갱의 인물묘사기술은 초일류급은 못 되는 듯하다. 위 close up 한 장면으로 살펴보아도 동산 언저리에서 예수를 잡으러 다가오는 유다와 로마 병사의 모습에는 어떤 긴장감이나 엄정한 느낌이 전달되어 오지 않는다.
평론가의 멋진 평론을 읽고 다시 그림을 감상하여도 쫓아오는 병사로 인하여 붉은 머리 예수가 낙심하고 있다고 느낌적인 느낌이 그리 강하게 와닿지 않는다. 아, 그럼 나는 이 그림을 왜 올려놓은거지?
나는 타인의 말에 솔깃하는 귀가 엷은 팔랑귀족이라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견해를 쉽게 받아들이고 따라 행하기가 능숙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위의 그림을 보면서 쫓는 자로부터 밀려오는 긴장감은 쫓아오는 로마 병사의 뒷배경에 스며 나오는 주황색에 실려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주변부 식물이나 언덕배기나 다 주황으로 스리슬쩍 물들었다. 그래서 나는 식물과 무생물도 긴장했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기독교 세례교인이라 이런 느낌을 끄집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갱은 신실한 기독교인이 아닐 텐데. 뭐, 그럼 어떠랴. 그게 중요한 건가? 그리고 나의 해석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느낌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주황은 밀려오는 위험한 상황을, 빨강은 임박한 위기 상황 앞에 흔들리는 마음을 표상해 낸 느낌이 들었다. 그럼 고갱이란 친구는 색깔 하나로 내 마음을 후려 잡은 셈이네?
최근에 느끼는 바, 고흐보다 한 단계 낮게 인식해 온 고갱의 그림도 자주 들여다보니 어떤 가치를 느낀다. 고갱도 그런 가치 전달을 꿈꾸었을 수 있다. 고갱이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자 했던 속마음을 어찌 내가 알 수 있겠느냐마는 그 내면의 일단이나마 느껴보았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마음이 가는 대로 보고 느끼고
힐링이든, 분노든, 기쁨이든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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