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에곤 실레의 대표작이 아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모델 발리 노이칠이 실레의 아내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그린 그림 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든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 하는데 에곤 실레는 그가 애인관계로 지냈던 이 여인의 마음을 꿰뚫어 본 걸까? 그녀의 마음은 촉촉이 젖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에곤 실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알아도 그의 그림에 적잖은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많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도 그의 작품을 부담없이 감상한다는 일은 보통 사람으로 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적나라한 나체인 데다가(포즈도 촘 그렇고..) 어떤 작품들(주로 자신의 자화상)은 뼈다귀만 붙어 있는 형상이어서 시선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위가 약한 내가 어찌해서 그의 그림을 알게 되었는가 하면 순전히 딸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나에겐 딸이 둘 있는데 그중에도 둘째 딸의 영향력이 크다. 그건 나와 큰딸이 받아들이는 인식의 일단이고, 그녀 자신은 그녀 나름으로 매우 어려운 내면의 메아리에 노출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의 몸부림이 나와 큰딸에게는 거대한 파워이자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었다. 그런 전제하에서 그녀가 관심을 표명하면 일단 나는 진지하게 경청하려 애쓰고 그녀의 뜻이 불합리하지 않다면 대개 수용해 주려 애쓴다. 그런 과정 속 나는 그녀의 관심사를 공유하고자 애써 노력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에곤 실레에 입문하였던 것이다. 그럼 내가 딸바보냐구? 사실, 그렇지는 않다. 딸은 사춘기가 늦게 왔는지 20이 넘어 나와 많이 충돌했고, 나는 그런 딸과 가까워지려 용을 쓰다 보니 그녀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나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둘째 딸이 안겨다 준 선물인 셈이다.
2016년 둘째 딸과 서유럽 일주 여행을 다녀올 때, 나는 여행 계획을 짜면서 에곤 실레의 미술관(아트 센트룸)이 있는 체스키 크롬루프를 중요 여행지의 하나로 등록했었다. 그 후, 그러니까 여행은 퇴직하기 직전인 2015년 연말부터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2016년 4월 하순에 출발키로 작정되어 있었다. 45일간 서유럽 일주. 그중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1박 하는 여정이 있었다. 유럽이라면 스위스이지.. 또 스위스 하면 마터호른이 아니냐는 예언적인 울림이 있어서 물가 비싼 스위스 호텔에 1박 계획을 짜 넣었는데, 3월쯤 장기 일기예보를 보니 여행 예정일 전후 스위스에 온통 비가 온다고 하는 게 아닌가. 취리히도 체르마트도.. 그래서 부랴부랴 호텔 숙박을 취소시키는 대신 짜 넣은 것이 비엔나였다. 그러니까 애초 계획엔 없었는데 비엔나 여행지를 검색하다가 한 뮤지엄에 에곤 실레의 주요 작품 대부분이 컬렉션으로 상설 전시된다는 정보를 접한 후 나는 주저 없이 마터호른과 비엔나를 맞바꾸었다. 이전에 나는 해외 출장 가서 스위스 융프라우에 오른 경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터호른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루체른에서 티틀리스 산을 오르기로 하고 마터호른 대신 비엔나로... 그렇게 찾아보게 된 비엔나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나는 처음으로 에곤 실레의 감당하기 힘든 누드화들을 알현하게 되었다. 하지만 누드화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으련다. 쥐가 나니까..
위 그림의 모델 발리 노이칠은 원래 에곤 실레의 그림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다. 그 시절엔 누드화의 모델을 화가가 개인적으로 챙기며 사적인 교류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 모델을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기의 애제자인 에곤 실레에게 양도(?) 했다. 스승으로부터 애인삼을 여인을 모델로 수수 받은 후 에곤 실레는 발리 노이칠의 그림을 여러 장, 아니 많이, 아니 마구마구 그렸다. 실레가 요구하는 포즈가 워낙 괴상망측하게 여겨져 아무나 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그녀를 모델삼아 명작을 제조해 냈던 실레는 그녀와 연애를 하였지만 나중에 실레는 그녀를 차 버리고 말았다. 눈이 여린 나에게 실레가 연애만 하고 차 버린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가 마음 편하게 감상할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까? 그거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은데 나는 이 작품을 애정하고 있다. 실레의 작품치고 과격하지 않고 가도하지 않고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묘사로 그려진 그림이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둘째는 비엔나의 레오폴트 뮤지엄을 이틀에 걸쳐 방문했고(에곤 실레 그림 감상을 위해), 나는 둘째 날 혼자 스테판 성당 관람을 나서야 했지만 에곤 실레의 그림에서 많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다.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는 눈매가 착해 보여서 좋았다. 내가 감상하는 방법은 이론이나 논리나 미술사적 존재감 같은 거 배려하지 않는다. 그냥 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로 가릴 뿐이다.
나는 이 두 작품을 한 세트로 받아들였다. 비엔나 레오폴트 뮤지엄에 가면 미술수집가 레오폴트 부부가 수집한 이 두 작품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12년에 그린 이 두 점의 작품은 두 사람이 비록 장래를 약속했던 사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애정이 넘쳐흐르는 시절을 보낼 때 제작된 작품이라 여겨진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떻게 저리 같은 스타일로 일란성쌍둥이 같은 작품을 남겼겠는가. 이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안이다.
그래서 나는 이 두 작품을 한 공간에 놓고 감상하는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여지없이 깨어져 버렸더라도.. 아마, 빌리 노이칠은 에곤 실레와의 관계가 계속, 좋게 이어나가리라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곤 실레가 에디트 하름스라는 인근의 중산층 집안 여성과 결혼을 시도하여 빌리 노이칠이 쓸쓸히 그를 떠나 1차 세계대전 전쟁 통에 간호사로 복무하기로 하기 전까지.. 적어도 그때까지 빌리 노이칠은 희망을 품고 있었으리라 추정해 본다.
두 사람이 서로 결별한 후, 발리와 실레는 1차 세계대전 어름에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실레에게 배신당한 파란 눈동자의 발리는 간호사로 종군하다가 1917년 야전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전쟁 이후인가 전쟁 중인가 암튼 1918년 실레는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하고 만다. 그때 나이 28세였다. 아, 그리고 실레가 결혼했던 에디트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렸는데 에곤 실레보다 3일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에디트는 임신 중이었다.
이런 먹먹한 사연을 품고 있는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옳은 걸까 나는 그런 고민을 해보기도 하였지만 그냥 그림은 그림 그 자체로 보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하는 게 피차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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