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점 보기

수용소의 자화상(Self-Portrait in the Camp)-Felix Nussbaum

hittite22 2025. 2. 28. 16:26
728x90

 

 

 

Self-Portrait in the Camp, 1940, Oil on plywood, location missing

 

유대인에 대한 단상

 

요즈음 유대인의 횡포에 대한 전 세계인의 반감과 혐오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막장 트럼프에 기대어 전 세계만민의 따가운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는 동네 깡패 네타냐후의 뵈기 싫은 면상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날이 이어진다. 나는 중동의 반목과 다툼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하다는 것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는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선조는 모두 아브라함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서상으로 보면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본처가 아닌 자손으로 갈래를 이어왔지만..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유대인의 고통과 박해를 모르는체 할 수 없다. 그런 이중적인 현상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어 사람들은 암울한 갈등의 공간, 카오스의 분위기를 벗어나기 어렵다. 아, 젠장 세상은 항상 진보하는 쪽으로 간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초현실주의 작품?

 

각설하고,

펠릭스 누스바움의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그림을 보는 관점으로 방향을 바꾸어도 나의 방황은 멈추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풋내기 미술 애호가라서, 스페인의 2대 화가 중 한 사람인 달리의 그림에 매료된 적이 없었다. 어떤 편이냐 하면, 시계가 피자 도우처럼 늘어져 책상 모서리에 걸려 있는 그림 정도는 보아줄 수 있다. 그러나 달리가 즐겨 그려댄 인간과 동물을 합성한 듯한 기괴한 형상의 작품은 매우 비호감이다.

 

추상과 초현실과 기하학적인 그림들 혹은 그냥 물감을 기분 내키는 대로 흩뿌린 미국제 현대미술이나 동물의 신체를 칼로 썰어서 반 토막 내어 전시하는 영국제 미술품들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위대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이나 김환기 화백이 점을 지겹게도 꾹꾹 눌러 찍어 만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같은 초고가의 그림도 노생큐다. 차라리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건 또 아이러니한 면(사실)인데, 초현실주의 그림 전체를 완전 배척하는 건 아니라서,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은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으로 대하는 편이다. 이쯤 얘기하면 나의 성향을 대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성숙되지 않은 어른 아이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사물의 형상이 윤곽을 분명히 드러내는 그림이나 혹은 우화적이고 쉬운 메시지를 던져주는 그림을 애정한다는 것을..

위 작품을 남긴, 유대계 독일인이자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펠릭스 누스바움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로서 나치가 저지른 폭력의 잔인함을 그림으로 증언한 사람이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유대감이나 나치의 핍박에 대하여 절절하게 연민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카프카를 좋아해서 프라하에 갔을 때 그의 흔적을 쫓으면서도 구시가지 지척에 있는 유대인 묘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좋으면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몸을 추종시키며 그렇게 마음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소개하는 화가 누스바움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초현실주의 그림이라 해도 그의 화폭에는 우화적인 묘사 혹은 고갱식 인물텃취가 스며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그의 그림을 낯설지 않게 여겼고 마음이 가는 대로 눈여겨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치의 만행

 

1937년 그는 베를린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여류 화가 펠카 플라텍(de : Felka Platek)과 결혼한다. 장소는 나치를 피해 망명하였던 브뤼셀이었다. 하지만 1940년 나치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누스바움은 벨기에 경찰에게 ‘적대적 외계인(hostile alien)’ 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당하여 프랑스 생시프리앵(Saint-Cyprien) 수용소로 압송되었다. 벨기에라는 나라는 어떤 문화적 색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대계 화가를 가리켜 '외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일까. 독일 보다는 프랑스에 가까워 프랑스 친화적이어야 맞을 듯싶은데.

 

그런 씰데없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지만, 나라가 작아서 그랬는지 벨기에의 정보나 정체성 혹은 문화적 뿌리가 우리 사회에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관심을 증폭시키지 못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끌려간 누스바움은 동유럽으로 이송되었으며, 1944년 39세의 나이에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로 살육당하고 말았다. 지나간 역사의 한 단면을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게 접하면서 나는 나치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 못된 짓을 많이 했다는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 그다지 '기분 좋은 앎'은 아니었다.

펠릭스 누스바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the Camp, 1940 [detail]

 

위의 자화상은 1940년 그려진 것인데 그가 끌려간 수용소 생활의 절망과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을 군복입은 사람들과 군인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일종의 고립된 존재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상실한 사람을 표현하는 느낌이었다. 죽음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된 인간!이다. 그렇다면 등가의 비교는 불가하지만 코로나19에 갇혀 지냈던 21세기 전반기의 한국인은 세월이 지난 후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 분명 왕관 비루스의 침공에 신음하였던 한국인 초상을 그려내는 화가도 등장할 테지.. 어쩌면 오늘 나와 당신은 그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3차원 공간 속에 박제당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쪼록,

전시에는 생명 보전에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펠릭스 누스바움이 저 자화상을 그릴 때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했을까, 안 했을까? 그가 곧 죽을 목숨이란 걸 알았어도 저런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 생명 보전이 담보되지 않는 삶이란 펠릭스나 나나 모두 꼭같은 현상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무쪼록 생명 보전에 '신경을 더 쓰자'라고 주장하는 게 정답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품은 끝에

슬그머니 내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