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상
<황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림의 메인 색상으로 선정된 노랑은 고흐와 동거하면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은 소산인 듯하다. 풍경 속의 계절은 가을이다. 나는 개신교 세례교인이지만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를 보고 난 후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가을이었나?라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 숱한 설교를 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서 한국의 열성 목회자들이 언급을 안 하였던가 아니면 내가 그 설교를 할 때 졸았던가...
유럽 여행 가서 뮤지엄이나 성당을 순례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숱하게 많이 볼 수 있다. 아마도 여행객이 그때까지 살아온 일생으로 통하여 접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수 관련 회화를 성당은 물론이고 유명 갤러리나 뮤지엄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그렇게 보아온 유럽의 성화와 좀 다르다.
보통 몸을 선으로 구획시킨 후 선 안쪽을 색칠하여 넣는 표현기법(일반적인 인물화 작법)을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이라 한다. <구분>을 뜻하는 프랑스어 <클루아종>에서 따온 용어이다. 그런데 고갱의 그림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평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묘사하니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혹은 우화적인 분위기가 인식되기도 하고..
심지어 나는 예수님의 아랫도리 가리개조차 깜찍하게 보였다.
노란색
<황색 그리스도>에서 예수를 노란색으로 표현한 것은 브르타뉴의 원시적 향토색에 마음 뺏긴 고갱이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을 부각하려는 작가적 관점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 브르타뉴가 어딘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나는 프랑스 지도를 살펴보았다. 프랑스 지도의 서남쪽 대서양을 따라 비록 밋밋하긴 하지만 불쑥 튀어나온 지형이 있다. 그곳이 브르타뉴라 불리는데 역사적으로는 영국에서 남쪽으로 피난 내려온 종교인들이 머물러 살았던 지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 프랑스와 조금 다른 문화와 생활양식이 남아있고 꾸준히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프랑스 영토 안에서 이국적인 분위를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고갱이 일군의 무리와 함께 이곳에서 미술활동을 해나간 것은 그런 역사적 내력과 현실적 차별성이 간직해 있음에 연유한다.
그럼 황색 그리스도와 브르타뉴 지방색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단정적으로 주장하는데 뚜렷한 근거를 내세우는데 위 설명으로 가름할 수 있을까? 그건 장담하기 어려운 얘기다. 암튼, 고갱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자뻑기질이 있는 화가였는데 그런 고갱이 예수를 노란색으로 표현한 것은 브르타뉴의 원시적 향토색을 고려한 것이라하니 그렇다고 믿어두자. 그리고 나처럼 자기 생각과 고집이 강한 인물은 거기에 덤으로 고갱이 고흐의 영향으로 노란색에 물들었다고 여기면 되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 황색 그리스도가 탄생했다고 우기기도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황색 그리스도>가 제작된 것이 고갱이 고흐와 관계와 결별의 수순을 밟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인가? 그것만 확인하면 나머지는 익스큐즈 해줄 수 있는 초정이요 상상이다. 1889년이면 언제인가? 고흐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는 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다. 음, 시기상으로 겹친다.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고갱은 <황색 그리스도>를 그리기 직전인 1888년 동료 화가 슈페네거에게 이렇게 토로하였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달래주는 건 자신에 대한 신념과 내 능력에 대한 믿음뿐이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뿐 아니라 담장 너머의 세상(속세)도 온통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배경이 가을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다면 고갱은 왜 구태여 가을 풍경을 차용했을까?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려 관련 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하나 찾은 것이 있어 소개한다.
논란?에 대한 참고사항
[참고 자료]
주석적 의미를 잠시 뒤로 하고, 오로지 몸의 감각으로 읽어 보면 어떤 극적 장면이 그려진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예수와 그 뒤를 따르는 여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예수가 뒤를 돌아보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눅 23:28) 죽음을 목전에 둔 그리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가 여자들을 바라보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은 어느 비극의 마지막 장면을 닮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 제자들, 다시 말해 남자들이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왜 여자들만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까.
이 단락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말한다.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복음서에서 보기 드문 표현이다. '푸른'을 뜻하는 형용사 '휴그로스'ὑγρός는 신약성서에서 단 한 번 쓰인 말이다. 수많은 문필가가 묘사한 골고다 언덕의 장면들과 여러 매체가 저마다의 목적으로 만들어 낸 십자가 처형의 이미지들은 우리 기억에 여러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의 기온, 햇살, 바람의 숨결은 알지 못한다. 누가의 소중한 기록 덕에 우리는 이 핏빛 사건이 푸른 나무의 계절에 일어났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뉴스앤조이] 나무가 푸른 계절에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다?
결론적으로,
뭐 사견임에 불과하긴 하지만
예수의 노랑과 세상의 노랑 들판은
실제 십자가에 매달린 계절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가 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왔음을 묘사하는 듯하고,
예수의 근심 어린 표정은 멀리 담장을 넘는 남자의 행태에 심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고갱은 이 그림에서
예수와 세상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노란 들판 한가운데 높이 세워진 십자가에 달린,
황색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세상 속에 함께 거하고 계신다는 묵시의 메시지를 전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고갱이 신실한 기독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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