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의 초기작품으로
대중에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 점을 감상해 본다.
여기,
옆에 다가가서 살며시 안아주고 싶은 여인이 있네..
나의 감상
1
에드워드 호퍼는 현대인의 소외감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낸 현대 미국의 대표 화가이다. 이 그림은 현대인의 밀실에서 타인의 시선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여인은 낙담한 상태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어떤 알 수 없는 소외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 여인이 마주하는 소외감의 근원은 사랑의 실타래가 풀리지 않음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드러나고 있는 여인의 방 내부를 살펴본다.
침실이라고 여겨지는 공간 어느 곳에도 남정네의 흔적을 유추할 물건은 보이지 않고 오직 여인 홀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여인은 혼인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미혼 솔로이거나 돌싱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밀실에서 생식기를 드러내 놓고 무언가 기운 빠진 자세로 앉아 있는 여인은 사회활동을 마치고 이제 막 귀가한 현대인을 상징한다. 사회활동의 내용은 업무일 수도 있고 연애행각일 수도 있다. 짙은 갈색 톤의 침대와 그 뒷배경의 흐릿한 채색은 여인의 내면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침대 위의 시트를 끄집어 내려 히프를 깔고 하체를 드러낸 채 상심에 잠긴 듯 앉아 있는 모습은 오직 <밀실>만이 현대인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듯하다. 최소한의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을 뿐 아무도 없는 개인의 공간에서 자신의 숨김없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는 여인.. 이웃이나 사회와 단절되어 있거나 그런 분위기를 경험하고 돌아온 여인을 한 컷의 장면 속에 고스란히 함축해 내고 있는 작품.. 소외되어 있는 여인의 모습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낸 20세기 회화 명작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여인의 시선은 참 애매한데.. 자신의 하체 끝부분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인지, 밀실의 외곽을 주사(注射) 하듯 햇살이 만들어낸 방바닥에 밝게 그려진 직사각형 창문 틀의 언저리를 더듬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수심에 싸인 자신과 외부에 근원을 두고 있는 밝은 빛의 경계선에 시선을 둔 채, 혹은 양쪽의 영역 모두 마음을 두고 있을 듯 말 듯하는.. 그러면서도 여인의 발끝은 이미 창문으로 투영되는 빛에 담그고 있어 마음의 여로가 지향하는 점을 암시하는 듯이 보였다. 삶의 현장이 어떠하든, 삶의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든, 현대인 역시 누구나 긍정에의 갈망을 가지고 있음을, 화가는 간파하였음이 틀림없다.
2
나는 본래 초점이 선명한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붓에 물감을 찍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 낼 때 선과 선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우기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처럼 선을 사용하지 않고도 사물과 인물의 경계를 기막히게 잘 직조해낸 그림 역시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암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그림이 정체성을 상실당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선명화시켜 단순화와 색채화의 이분법적으로 표현하면 그것 또한 독단적인 화풍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경우, 유화는 마치 만화와 같은 형태에 근접하게 된다. 나는 유화를 만화처럼 그려내는 작가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화풍이 있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를 한두 명쯤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는 점묘법을 즐겨 사용하거나 사물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하게 그리는 그림은 정신을 혼미케하는 듯하여 친밀감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에도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들어온 몇몇의 화가가 있는데, 에드워드 호퍼가 그런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소외감>이라는 특정 감성에 한정된 그림을 그려내었으므로 어딘가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 느낌 때문에 처음 다가서기에는 주저함을 불러일으켰던 아티스트였다. 하지만, <마음>의 한 조각을 화폭에 담아내는 천부적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므로 그를 그렇게 오래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현대인의 사랑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화가이다.
나의 호퍼 그림 감상법은 단순 명료하다. 대개의 내가 그림 감상하는 보편적인 방법이기도 한데, 나는 구도를 보고, 색감을 보고,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으며 감상한다. 다시 말하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접하였을 때는, 그가 전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심상을 음미하듯 바라보며 생각과 표정과 몸짓을 즐기면 된다.
마음을 담아내는 것의 가치는, 왜 김연아의 피겨에 한국인과 캐나다인, 미국인 구별 없이 열광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위대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는 차가운 은반 위에서 부드럽고 섬세하고 고혹적인 표정과 몸짓으로 숨겨진 채 얼핏 얼핏 드러나는 인간 감정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었기 때문에 세기의 피겨선수로 사랑받는 것이다. 그래서 피겨 스케이팅은 스포츠이면서 예술의 영역을 넘볼 수 있는 독특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추상화가 입체파화가 디스
그림 역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작업이므로 인물 묘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 인물과 그림이 구성하는 장면, 분위기를 합작하여 어떤 감정의 편린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 텃취를 통하여 전해져 오는 느낌의 강도를 살펴볼 때 화가의 진짜 실력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피카소 광팬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을 이야기이긴 해도.. 나에게 있어서 피카소의 그림은 2류에 불과한 것으로 비친다. 자의적으로 해석해 보면서 피카소가 가진 실력이 그로 하여금 추상화를 천착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물론 지나친 독선적 평가일 것이다. 정통 화법으로 그린 피카소의 그림이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정통 화법으로 인간 내면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읽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뿐 아니라 아마 모든 추상 화가는 그런 이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겉으로는 새롭고 독창적인 미학의 세계를 열어젖혔다고 자부할지라도 나에게는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피카소가 추상화로 전업하기 전에 그려낸 사실주의에 입각한 구상화작품은 진부해 보였고, 그런 진부함은 무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물론 객관적인 평가에 따르면 그의 그림은 여전히 일반화가의 수준 위에 있다. 그것은 자명하고 명백한 사실의 하나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즉 사견이라는 편협된 생각으로, 피카소가 진부함을 타파하기 위해서 추상화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고 보자. 하지만 나는 그렇다해도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형상의 왜곡은 모딜리아니류에서 멈추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문가의 해설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전문가 집단만을 위한 선 너머의 <어떤 가치>일 뿐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하여 과격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림에 관하여 도통하였거나 아니면 일군의 평론가들이 떠받드는 언어의 유희에 장단 맞추어 춤추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결론 내리곤 하였다.
적어도 나의 시각에서는 고흐나 에드워드 호퍼가 피카소보다 더 뛰어난 화가라 인식된다. 그림에도 등급이 있을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림은 매겨진 등급을 기초로 즐기는 예술이 아니며, 오직 감상하는 사람만이 독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내가 피카소나 달리 보다 고흐나 호퍼의 그림을 선호하는 이유.. 나의 감상법에 따르면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들의 그림에는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의 풍경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피카소나 달리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그려내었을 것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에 한해서.. 나처럼 평범한 장삼이사와는 괴리가 있고 깊은 심연이 가로막고 있다.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을 오픈하는 사람에게 마음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나는 마음을 보여 주는 그림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쏠린다. 예술이란 - 그림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 마음이 끌리고 좋아하는 감정이 샘솟으면 그것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림 한 점 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d Vineyard at Arles(아를의 붉은 포도밭)-Vincent Van Gogh (5) | 2025.03.31 |
---|---|
The Yellow Christ(황색 그리스도) - Paul Gauguin (2) | 2025.03.31 |
Summer Night(여름밤)-Harald Sohlberg (1) | 2025.03.08 |
수용소의 자화상(Self-Portrait in the Camp)-Felix Nussbaum (1) | 2025.02.28 |
The Starry Night(별이 빛나는 밤)-Vincent Van Gogh (3) | 2025.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