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시든햄에서 태어난 해럴드 프레더릭 위버 호킨스(Harold Frederick Weaver Hawkins, 1893~1977)는 30세 이후부터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면서 에칭, 모노타입, 리노컷, 목판화 기법으로 미술활동을 하였던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였습니다. 활동기간은 전쟁이 끝나고 미술수업을 받은 후인 1923년부터 1972년 까지였습니다. 그는 "원자력 전쟁과 세계 인구 과잉 시대에 맞춰 야심 차고 때로는 벽화 크기만 한 모더니즘적 도덕성 우화"를 전문으로 했습니다.
위버 호킨스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덜위치 칼리지(Dulwich College)를 거쳐 캠버웰 예술공예학교(Camberwell School of Arts and Crafts)에 다니며 미술 교사가 되려는 꿈을 키웠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위에 소개한 위버의 사진을 보면 무엇이 눈에 들어오나요?
그의 오른손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1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퀸즈 웨스트민스터 라이플스(Queen's Westminster Rifles)에 입대했고, 1916년 프랑스 고메쿠르(Gommecourt)에서 벌어진 솜(Somme) 전투에서 중상을 입게 됩니다. 오른손과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수차례의 수술 끝에 간신히 절단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후 오른손잡이였던 위버 호킨스는 왼팔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왼팔의 힘이 완전히 발휘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는 다친 오른팔의 도움을 받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위버 호킨스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기술학교 및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프랭크 쇼트 경으로부터 에칭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의 첫 개인전은 1923년에 열렸고, 그의 작품은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뉴잉글리시 아트 클럽과 구필 살롱에서도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1923년, 그는 화가였던 아이린(르네) 엘리너 빌리어스(Irene (Rene) Eleanor Villiers)와 결혼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위버 호킨스 가족은 먼 여행을 떠납니다.
프랑스 생트로페, 스페인, 이탈리아, 몰타에서 시간을 보냈고, 외딴 타히티 섬에서 "토착민 스타일"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1935년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마침내 호주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호주 시드니 북부 해안 교외인 모나 베일을 선택했고, 타히티에서의 삶을 기념하여 자신의 집을 마우이 마(Maui Ma)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집은 시드니 유어 스미스가 매드 하프 마일(The Mad Half Mile)이라고 이름 붙인 워터뷰 스트리트(Waterview Street)의 피트워터(Pittwater)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예술가, 시인, 작가들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이웃으로는 예술가 아서 머치(Arthur Murch)와 라 피젤(Rah Fizelle), 시인 존 톰슨(John Thompson), 미국 화가 레이먼드 글래스(Raymond Glass), 수채화가 프랭크 맥나마라(Frank MacNamara), 조각가 폴 비들(Paul Beadle), 그리고 머큐리 극장(Mercury Theatre) 프로듀서 존 윌트셔(John Wiltshire)가 있었습니다.
그는 1977년 8월 13일 호주 시드니 교외 윌러비(Willoughby)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Contemporary Art Society의 창립 멤버이자 회장이었고, 1953년 NSW National Gallery Society의 첫 번째 위원회 회원이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Henry Salkauskas와 함께 Sydney Printmakers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자화상
인물화
1920년대 그림을 보니 재미있는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중산모 쓴 모습은 미국놈들 경제공황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모습인데 시드니 지하철에서도 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군요. 중산모 쓰는 것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패션인가 봅니다.
위버 호킨스는 작품 <전쟁(Warfare)>에서 자신의 모든 비판적 사고와 추론 능력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시드니에서 회화적 취향이 장식적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1946년 동생 어니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이곳의 유행은 낭만적이고 저조한 색조의 그림이다. 그래서 나의 '지적인' 작품들은 팔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라고 기술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작품들이 "어느 정도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랐습니다.
실제로도 그의 작품들은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시사 문제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라이프스타일 잡지 픽스(Pix)는 독자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면서, 이 작품을 "흥미롭고 활기찬 디자인"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대기업, 교회, 언론이 인류 문제의 근원으로 상징된다."
대기업, 정부, 또는 얼굴 없는 관료 집단이 그림의 꼭대기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치 성경을 뒷주머니에 넣듯 신을 품고 다니는 성직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젊은이를 자신의 길로 인도하는 듯합니다. 왼쪽에 있는 비참하고 수척한 모습은 몇 년 후의 그 젊은이일까요? 그의 주변은 전쟁의 결과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들은 카르페 디엠(Carpe Diem)으로 현재를 즐기고, 어떤 이들은 부당이득을 취하며, 중앙의 부부처럼 전쟁이 가져오는 개인적인 상실을 겪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있는 인물들은 나중에 화가가 카인과 아벨의 수채화를 통해 원초적인 폭력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Tiddlywinks은 작은 플라스틱 원반을 컵에 집어넣는 게임입니다.
윙크스라는 작은 원반들을 평평한 매트 위에서 단순히 컵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즉, 복잡한 전략보다는 간단한 재미를 위한 아동용 게임으로, 현대에는 다양한 규칙과 변형된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 작품은 성경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성서에 푼돈을 갖다 바치는 과부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가진 것 전부를 바쳤으니 가장 큰 헌금을 바친 여인이라고 치켜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작품명칭에 딱 그런 의미를 못 박아 놓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대 '아담' 그림을 그린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군요..
풍경화
정물화
라오킨(Raokin)으로도 알려진 위버 호킨스는 호주로 이주하기 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오른팔을 완전히, 왼팔을 부분적으로 잃은 경험에서 비롯된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의 정물화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기하학적 형태에서 영향을 받은 생동감 넘치는 색채와 형태가 특징입니다. 그의 강렬한 선과 균형 잡힌 구성은 당시 많은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이 작업했던 맥락을 잘 보여줍니다.
작품 <자몽을 든 사람들(Group with Grapefruit)>(1942)은 숟가락, 접시, 그릇, 뚜껑, 과일, 주전자의 아가리 등에 과장된 원형을 그렸는데 이는 시각적으로 역동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리 모양의 반복은 관람객의 시선을 캔버스 주위로 빙빙 돌게 하여 원형이 둥글고 연속적인 존재라는 관념을 재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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