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종교화
전체적으로 볼때,
고갱이 남긴 기독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종교화는 5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작품들만 좋아했습니다.
타히티의 원시종교를 그린 작품은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기독교 종교화 4편을 소개합니다.

1888년 여름, 인상주의를 뒤집을 이론으로 머리를 가득 채운 젊은 에밀 베르나르가 고갱이 일하던 퐁타방에 도착합니다. 에밀 베르나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기억해둬야 할 이름입니다.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암튼, 에밀과 폴 그들의 만남에서 "종합주의"가 생겨났고, 당시 고갱이 그렸던 아름다운 작품 <설교 뒤의 환상>은 그 만남으로 이뤄낸 최초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작품 <설교 뒤의 환상 : 야곱과 천사의 싸움>은 바로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그렸던 것입니다. 이는 작품 속에 브르타뉴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독특한 지역 의상을 입은 브르타뉴 여성들이 방금 성경 구절에 근거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어떤 설교일까요? 바로 창세기(32:22-32)에 언급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가족과 함께 얍복강을 건넌 후 야곱은 꿈에서 신비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천사와 씨름을?
혹시 천사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성서 어느 곳에도 천사의 성별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남자일수도 있고 여자일수도 있다는 거죠. 고갱은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 풍경과 싸움은 설교 후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창작된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알고보니 고갱은 주일 설교로 신심에 유도된 브르타뉴 여성농민들이 환상을 통해 야곱의 씨름이야기를 가시화시킨 것입니다. 전경에서 보이는 브르타뉴 농민 여성들은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린채 그들만이 볼 수 있는 장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상징적인 투쟁(씨름)이 벌어지는 배경은 들판일 수도 있고 하늘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빨간 황색 공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공간 안에 두 인물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물이든 인물이든 모두 인상주의와 반대 측에 있는 방식, 즉 분명한 윤곽으로 구분된 평면 색상으로 그렸습니다. 고갱의 독특한 스타일입니다. 아니, 잘못 말했습니다. 에밀 베르나르가 창안해낸 스타일입니다.
그림 속에서 색상 모델링, 흐릿한 가장자리, 중간에 있는 통일된 분위기로 인해 형태나 색조는 결코 부드러워지지 않습니다. 흰색, 검은색, 파란색 및 빨간색의 변조되지 않은 영역은 강렬한 대조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중간 부분은 농민과 그들의 비전을 분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처리 되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나무둥치로 나뉜 화면의 좌측에는 영적 경험에 빠진 이 지방 여인들이, 그리고 우측에는 야곱과 씨름하는 천사가 등장합니다. 전경의 나무가 뒤의 여인들로 이어져 후경과의 거리를 무효화시키는 평면성이 돋보입니다. 황색의 그리스도에서처럼 상당히 원색적인 바탕과 평면적 공간 구성, 그리고 종교적 환영이 주제로 등장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고갱의 정열적인 심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Gauguin은 이후 그림에서 반복되는 곡선형 리드미컬한 윤곽을 사용하여 박동하는 통일성을 부여합니다. 그림의 출처는 다양합니다. 나무 줄기의 구부러진 대각선과 아래쪽 원근감, 윤곽선은 일반적으로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에서 빌어온 것이지만 씨름하는 장면은 Hokusai의 판화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윤곽선과 평평하고 대담한 색상은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와 유사하며 둘 다 종교적인 주제에 전념하는 이미지 d'Epinal의 목판입니다. 종교적인 심성과 비현실적인 주제가 일상의 무미함을 대체시킨 작품으로, 이는 고갱이 펼쳐보였던 상징주의 시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고갱의 <설교 후의 환상(The Vision after the Sermon)>은 이상한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두 가지 수준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데, 하나의 현실은 설교가 끝난 뒤 멈춰 선 브르타뉴 여성들과 신부이며, 그리고 또 하나의 현실은 멀리 있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환상입니다. 덧붙여서, 맨 오른쪽 잘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신부의 모델이 바로 고갱 자신이라는 것도 오랫동안 알려져 왔던 사실의 하나입니다.
보충설명
종합주의란 용어는 1889년 고갱이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항하여 진행한 전시의 명칭인 <인상주의와 종합주의>에 처음 등장합니다. 종합주의는 상상과 실제의 경험이 종합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의미가 회화로 표현된 것을 뜻합니다. 강렬한 색면과 굵은 선, 그리고 단순화된 형태를 통하여 자신의 주관적 의미와 감정을 표현하는 경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1889년 2월 고갱은 퐁타방에서 베르나르와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렸고 5월에는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파리로 돌아 옵니다.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 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만국박람회 출품을 거부당합니다. 그리하여 만국박람회장 옆 카페 볼피니(Volpini)에서 인상파 화가들만의 특별전이 열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시회에서 조차 고갱의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고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6월 20일 퐁타방으로 돌아온 고갱은 작은 어촌 르 풀뒤(Le Pouldu)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황색의 그리스도>였습니다.
<황색의 그리스도>는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작품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평평한 평면, 강렬한 색상 및 대담한 윤곽선으로 구성된 <황색의 그리스도>는 크루아조니즘(Cloisonnism) 작품의 전형입니다. 크루아조니즘은 아시죠? 윤곽구획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고갱과 함께 퐁타방화파로 활동했던 베르나르가 창안한 기법입니다.
작품 <황색의 그리스도>에서 캔버스 표면은 전경의 인물, 십자가의 강한 직립자, 그리고 종단 수평 막대에 의해 유지됩니다. 반복되는 들판과 하늘과 십자가의 띠에 대해 여성의 흔들리는 곡선과 나무(직선의 움직임과 대조되는 닫힌 형태)는 밝고 단순한 패턴으로 그려져서 우아한 대위법을 연주합니다. 색상은 밝지만 브르타뉴의 풍경의 황량함이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여성은 온화하지만 농민의 힘은 분명해보입니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타방(Pont-Aven)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트레마로(Tremalo)의 교회당에 있던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합니다. 고갱은 그 교회에 이 작품을 선물하였는데 교회 측에서 자기들이 걸 수 없는 그림이라고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하하하 왜 그랬는지. 대체 얼마를 손해본건가요?
원경의 모습은 퐁타방 마을과 생트 마르그리트의 언덕으로 추정됩니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바로는 오늘날에도 눈에 번쩍 띄는 작품이라고 여겨집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풀다 못해 찌들은 고갱 아저씨가 이 작품에 임하면서 예사롭지 않은 경건한 마음으로 화면을 구축하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사 평론가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는 작품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갱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체포하러 온 로마군병들이 동상 어귀에서 어른거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로마 군병을 이끌고 길을 안내하는 인물은 우리가 아는 바로 그사람, 가롯 유다입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고갱이 작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신의 얼굴을 모델삼았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동질화 혹은 대체자로 여겨질만큼 과대한 감정이입을 시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립과 임박한 순교에 대해서 고갱아저씨는 불타는 머리카락이 빛나는 우울한 색조,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풍경으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재 벨기에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화작품 <The Green Christ>는 Paul Gauguin이 프랑스의 Pont-Aven에 있던 기간(1888년)에 그렸습니다. 1889년 10월, 고갱은 브르타뉴의 외딴 마을인 르 풀두에 있는 마리 앙리의 여관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Yellow Christ>, <The Green Christ>, <La Belle Angèle>와 같은 작품을 차례로 제작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시각, 조형적 형태, 기술을 능숙하게 통제하면서 자신의 예술을 확립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889년 브르타뉴에서의 체류가 끝나갈 무렵, 고대 브르타뉴 calvaries는 고갱의 새로운 스타일과 아르누보로 흘러갔을 형식에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Yellow Christ>의 동상과 마찬가지로 <Green Christ>의 출처는 Gauguin이 Pont-Aven 근처의 Nizon에서 본 이끼 낀 석조에 있습니다. 그는 퇴적물 앞에서 전경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브르타뉴족 여성들의 종교적 믿음을 다시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미 Vision과 Yellow Christ에서 탐구되었던 실제와 환상이 혼합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다루고 있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수난(Christ's Passion) 이후의 사건인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에서 그의 시체가 들어 올려질 때 황색 그리스도의 밝은 색이 우울한 색조, 즉 그린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얼굴은 얇게 위장한 자화상이며, 고갱이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감정이입하여 그려낸 작품입니다.
<Green Christ>는 그가 만든 가장 상징적인 그림 중 하나입니다. Green Christ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안고 있는 세 명의 죽은 인물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조각상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림의 앞에 앉아있는 여성을 볼 때 눈이 흐려지는 짙은 녹색입니다. 그녀는 몇 명의 사람들이 걷고 있는 해변 옆 잔디밭에 앉아 있습니다. 단순화된 음영과 비현실적인 색상은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을 암시합니다.
정물화











이 정물화의 중요성은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고갱이 아내의 가족과 함께 코펜하겐에 있는 동안이나 클로비스(Clovis)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 직후에 그렸을 것입니다. 배경에 있는 캔버스는 고갱이 1881년 여름에 함께 그림을 그렸던 화가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의 컬렉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돌린은 그가 여행할 때마다 가져간 소유물 중 하나였으며 꽃병도 매우 비슷합니다. 또한 그는 모란과 풍경의 오렌지색을 벽과 꽃병의 보색적인 파란색과 대조하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색상을 선택했습니다.





<세 마리의 강아지가 있는 정물화>는 고갱이 브르타뉴에 머무를 때 제작된 것입니다.
그는 "예술은 자연에서 파생된 추상화"이며 "자연 앞에서 꿈을 꾸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의 발언에 기초하여 이 작품을 바라보면 강아지의 몸은 굵은 파란색으로 윤곽이 그려져 있고, 털의 패턴은 식탁보의 식물 무늬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그 해에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가 소개한 아동 도서 삽화와 일본 판화에서 이 그림의 스타일적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1888년 후반 아를(Arles)의 노란집에서 고흐와의 우정이 실존적 갈등으로 무너진 후 고갱은 서둘러 프랑스 북부로 돌아와 다시 브르타뉴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1891년 4월 지구상의 낙원으로 추정되는 타히티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타히티에서 백인 지배층의 가난, 질병, 억압을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Langmatt의 과일 정물화는 격동의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이러한 실존적 긴장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고갱은 마치 버튼을 눌러 그의 격동적인 삶을 꺼버린 것처럼 자신의 예술적 관심에 전적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잔을 만들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존경하는 동료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브리타니로 갈 때 폴 세잔의 비슷한 정물화 사진을 찍었습니다. 실제로 구도(예를 들어 흰색 천의 위치와 구조)에는 일정한 유사점이 있지만, 고갱의 그림은 내부 과일과 나무, 덤불, 지붕의 눈에 띄는 표면 품질에서 세잔의 그림과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외부 현실에 대한 의식적 회피, 빛나는 색채, 추상적인 경향은 훗날 고갱이 남태평양에서 그린 그림의 특징이기도 하며, 비록 피할 수 없는 우울함이 그 모티프를 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에서 낙원을 묘사하려 노력했습니다. 위 정물화 속의 백조처럼 생긴 거위는 이에 대한 희미한 전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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