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유럽

Paul Gauguin(폴 고갱) / 1 - 자화상

hittite22 2025. 4. 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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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1848.6.7~1903.5.8)

 

고갱은 누구인가?

 

 

폴 고갱(Paul Gauguin)은 프랑스 파리 태생의 탈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유명합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였고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갱 사후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때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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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1876년경입니다. 마네, 르느와르, 모네, 피사로, 세잔느의 작품을 사 모으면서 시작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전업화가로 발전(?)되었습니다. 위에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이라 소개하였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후기 인상파 그룹의 일원입니다.

쇠라, 로트렉, 세잔느, 고갱 같은 프랑스 화가와 네델란드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반 고흐를 포함하여 후기 인상파라 칭합니다. 그들의 활동기간은 1880~1905년입니다. 후기인상파는 선배 인상파(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의 혁신적인 요소에서 출발했습니다. 과거 화실 안에서 제작된 회갈색의 역사화 대신 그들의 화폭은 무지개같이 찬란한 색채로 넘쳤습니다. 쇠라와 세잔느는 이론적으로 보다 견고한 회화를 지향하면서 점묘법(쇠라)과 색면(세잔느)을 개발합니다. 반면 고갱과 반 고흐, 로트렉은 후기 낭만주의자들 같이 빛과 색채를 통한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충실하였습니다. 입체주의와 초 현실주의처럼 개인주의적인 20세기 미술양식은 바로 이 두 개의 미술사조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35세 때, 고갱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겠노라 결심이 서자 실업가의 경력을 포기하고 가족과도 결별합니다. 오 이룬.. 산업혁명으로 탄생한 많은 모순들이 인간의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표현하는 법을 앗아갔다고 확신한 고갱은 '양식'이나 '단순한 기교'를 넘어선 인간의 그 어떤 것을 찾아 나섭니다.

처음에 고갱은 프랑스 서부 브리타뉴 지방에서 생활하며 농민의 삶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신앙심에 기초한 그림은 그렸는데, 2년 후 그 한계를 넘기 위해 문명에 때묻지 않은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갑니다. 이후 그의 그림은 단순화하고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며 원시 토착민들을 담아내는데 기여합니다.

고갱은 야성적인 색채와 이국적인 표현기법은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20세기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원시적 감성을 찾아 떠난 타히티는 신비스럽고 원시의 땅이라는 도피처를 제공해주는 듯했습니다. 그곳에서 고갱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6년여 걸쳐 완성했습니다. 1897년 후반 자살미수 전에 정신적 유언장이라 생각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그린 그 작품에 가장 야심적으로 모든 것을 종합해 넣었습니다. 이후 고갱은 타히티에서 최후까지 붓을 놓지 않으면서 고독과 우울 속에서 만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회화 뿐 아니라 초기의 관심사였던 조각에도 눈을 돌렸습니다. 또한 그의 목판화와 아연 판화는 열정에 넘치며, 판화에서 시도한 왜곡된 형태들은 목판화의 생명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Man with a Toque. Self-Portrait, 1876, oil/canvas, 46 x 38 cm [Fogg Art Museum, Cambridge, Massachusetts, USA]
Self-Portrait, 1885, oil on canvas, 65.2 x 54.3 cm [Kimbell Art Museum]

 

1884년 11월부터 1885년 6월까지 고갱은 아내 및 가족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이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가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에게 힘든 시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파리의 문화생활이 그립고 덴마크인과 특히 아내의 가족을 싫어했으며 혹독한 기후로 인해 야외에서 거의 일할 수 없었습니다. 점점 더 그는 모델 없이 실내에서 일해야 했고, 그의 주제는 이러한 제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여전히 그의 인상파 시대의 작품에 가깝습니다. 고갱이 다락방에서 일하는 고독한 인물을 다소 낭만적으로 묘사한 것은 후대의 자화상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자신을 예술적 순교자로 묘사했으며, 1889년에는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Self-Portrait Dedicated to Vincent van Gogh. Les Miserables, 1888, oil/canvas, 45x55cm [Van Gogh Museum, Amsterdam]

 

1886년 11월 퐁타방에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로트레크와 고흐를 알게 됩니다. 당시 고갱과 고흐는 화가로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인상파 화가 그룹에게서도 은따당하던 아웃사이더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고흐는 일본 판화 제작자들이 서로 작품을 교환한다는 사실을 알고 1888년에 Paul Gauguin과 Bernard에게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서 자신에게 보내주면 자신도 초상화를 그려서 Gauguin에게 보내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 결과로 실현된 고갱의 자화상이 위의 작품입니다.

(고흐는 화가들이 형제애로 일하는 일본 미술의 사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를에서 예술가의 식민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모방심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고갱은 고흐의 제안에 호응하여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기 모습을 장발장에 반영하면 사회의 불쌍한 희생자인 자신과 동료가 선을 행함으로써 복수를 하는 초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원.. 암튼, 벽면의 화사한 플라워 패턴은 고갱의 '예술적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반 고흐는 이 초상화에서 모델의 우울한 성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갱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파란색이 짙게 물들었다'고 표현하며 그가 병들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Self portrait at Lezaven. Self-Portrait Dedicated to Carrière, 1888 , 46 x 38, oil/canvas,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on, DC, USA

 

Self-Portrait with Yellow Christ, 1890, oil/canvas, 38 x 46 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고갱의 첫 타히티 여행 전날에 그려진 <노란 그리스도와 함께한 자화상>은 일종의 선언문이자 작가가 자기 성격의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삼중 초상화입니다. 당시 오해를 받아 자녀들과 함께 덴마크로 돌아간 아내에게 버림받은 고갱은 식민지에 정착할 절차를 밟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 고갱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러한 문제로 인한 부담과 자신의 예술을 위해 고군분투하려는 그의 결의를 나타냅니다. 왼쪽의 황색 그리스도(Yellow Christ)는 자신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화가의 머리 위로 뻗어 있는 그리스도의 팔은 보호 제스처를 암시합니다. 이 그림의 노란색은 오른쪽 선반에 서 있는 그로테스크한 ​​pot의 빨간색과 대조를 이룹니다. Gauguin 자신이 "Gauguin 야만인의 머리"라고 묘사한 이 의인화된 pot에는 재료를 석화시킨 엄청난 열의 흔적이 있습니다. 찡그린 가면과 원시적인 모델링으로 고갱의 고통과 거친 성격을 구현합니다. 천사와 야수 사이, 종합주의와 원시주의의 중간에서 고갱은 자신이 경험하게 될 예술적 모험의 중요성과 엄중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Bonjour, Monsieur Gauguin, 1889, oil on canvas, 93 x 74 cm

 

<안녕하세요, 고갱 씨>는 고갱과 반 고흐가 1888년 12월 몽펠리에(Montpellier)의 파브르 미술관에서 함께 본 <봉쥬르 쿠르베 씨> 그림에 대한 반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고갱의 버전은 원본과 많이 다르네요.

 

안녕하세요 쿠르베씨-Courbet作

 

쿠르베의 버전에서 화가 쿠르베는 몽펠리에로 가는 길에서 하인과 함께한 후원자 브루야스와 인사 나누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Bruyas는 쿠르베를 향해 모자를 벗고 하인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인 채 서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묘사하면서 쿠르베는 19세기 화가의 지위 변화를 언급했고,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밖에서 일하는 창조적 천재로서의 낭만적인 역할을 표현했습니다.

 

고갱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반응을 보였고, 구성과 형상은 현저하게 다르지만 원본의 풍미는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초기 자화상부터 고갱은 예술적 순교자의 역할을 맡았고 1889년에는 녹색 그리스도(Green Christ)와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와 같은 작품에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Self-Portrait with Halo and Snake, 1889, oil/panel, 79.2 x 51.3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자화상은 특히 1888년과 1889년에 고갱의 작품 제작에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반 고흐 및 동생 테오와의 서신에서 알게 된 La Mousmé를 포함한 Vincent van Gogh의 1888년 초상화 시리즈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Gauguin과 그의 제자 Meyer Isaac de Haan이 Pont-Aven 근처의 Le Pouldu(르 풀두)에 머물렀던 여관의 식당을 장식하기 위해 찬장문에 그려진 이 <후광과 뱀이 있는 자화상>은 고갱의 가장 급진적인 그림 중 하나입니다. 그의 많은 자화상 중에서 이것만큼 불가사의한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가 자신을 사탄의 역할로 묘사했다고 평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림에서 그리스도를 봅니다. 고갱에게서 분리된 머리 위의 후광, 육체가 없는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삽입된 뱀 등이 노란색과 빨간색의 무정형 영역에 떠 있습니다. 아마도 고갱은 예술가에 대한 그의 개념을 영웅으로, 특히 일종의 마술사, 즉 자신이 마법의 힘을 소유하고 있는 대가로서의 개념을 드러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Self portrait with mandolin, 1889, oil/canvas, 61 x 50cm [Private Collection]

 

조르조네(Giorgione) 이후의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다른 악기 중에서 만돌린을 연주한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줄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의 자화상이 '스냅샷'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화가 또는 그 누구의 초상화도 그 매력이 동시대인에게만 국한된다면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시각 체계에 공명하는 더 넓은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고갱이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음악 연주가 예술 제작 자체에 대한 오래된 은유라는 것입니다. 

 

Self-portrait, c. 1890, oil on canvas, 45 x 38 cm [Pushkin Museum]

 

고갱에게 자화상은 언제나 강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 작품은 타히티로 떠나기 전이나 그가 1893~1894년에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제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In the Waves"(1889, 클리블랜드 미술관) 그림을 배경으로 청록색 바다, 거품이 나는 양들, 빨간 머리 Ondine의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더욱이 이 그림의 이미지는 거울에 비쳐 '자화상'이 만들어진 상황을 설명해 줍니다. 고갱은 그림과 같은 방에 있어야 했고 기억에서 복사해서는 안 됐습니다. 자신의 주요 그림을 재현하는 것은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노란색 또는 금색 배경이 포함된 캔버스의 색상과 간결한 구성은 거장의 타히티 작품을 나타냅니다. 이 그림은 고갱이 죽기 직전 파리의 수집가 구스타브 페이에게 판매를 위해 보낸 세 장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Self Portrait in a Hat, 1893, oil/canvas, 46 x 38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고갱은 1893년 9월 1일 폴리네시아에 처음 체류한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타히티 작품을 전시하며 "야만적인" 그림을 정당화하시키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1월에 그는 그림(라 오라나 마리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제공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Degas, Jarry 및 Natanson과 같은 몇 명의 화가와 비평가가 그를 지지했을 뿐 대부분의 예술가는 전시회에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고갱은 그의 경력 모든 단계에서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1893~94년 겨울에 그린 이 자화상은 당시의 좌절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반항적 정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Gauguin은 그의 뒤 배경 오른쪽 상단에 거울 이미지로 묘사한 <Manau Tupapau(The Spirit Keeps Watch, Buffalo, Allbright Knox Art Gallery)>를 남태평양에 머물면서 창작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노란색과 올리브 녹색으로 칠한 그의 새 스튜디오에서 "타히티식" 장식 앞에 선 자신을 묘사하였는데 오른쪽의 파란색과 노란색 사롱(sarong)은 이국적인 브릭(exotic bric-a-brac)으로 가득 차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는 "원시적" 특징을 지닌 길들여지지 않은 화가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림의 뒷면에는 그의 젊은 친구 윌리엄 몰라드(William Molard, 1862-1936)의 살짝 일그러진 얼굴도 그려져 있습니다.

 

Self Portrait with the Idol, 1893, 43.8 x 32.7cm [McNay Art Museum, San Antonio, TX, US]
Self-portrait, c. 1893 [Detroit Institute of Arts]

 

이 두 자화상 <아이돌과 함께 한 자화상>은 같은 복장, 같은 포즈에 같은 얼굴 표정이라 동일 그림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배경의 화면이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 별개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 1893년에 그려진 것입니다.

 

Self portrait with palette, 1894, oil/canvas, 92 x 73 cm [Private Collection]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은 고갱이 몽파르나스 기차역 뒤편에 있는 Rue Vercinge-torix(베르신게토릭스 거리)에서 살았을 때 그린 것입니다.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화가는 이국적인 포즈를 취했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타히티에서 가져온 원주민 예술품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걸어 두기도 했었습니다.

강렬함과 허세, 또는 아이러니와 고통과 대조되는 위엄과 휴식, 그리고 단순함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암청색 망토를 입은 자화상에는 고갱이 작품을 헌정한 시인 찰스 모리스(Charles Morice)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타히티에 머무는 동안 그는 모리스가 자신에게 빚진 돈을 갚지 않았다고 비난했지만 1893년 10월에 화해했습니다. 그런 다음 모리스는 드가가 듀랑-루엘(Durand-Ruel)을 설득하여 발표한 1893년 11월 전시회의 서문을 썼습니다. 1894년 고갱과 모리스는 타히티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노아 노아(Noa Noa)를 공동 집필했습니다.

찰스 모리스가 누군가 했더니 작품을 헌정할 만하군요.

 

Self-Portrait, 1896, Oil on Canvas, 41 x 32 cm [Musee d'Orsay, Paris]

 

프랑스를 영원히 떠난 후 1896년 타히티에서 제작된 이 자화상은 화가가 그늘진 눈을 내리깔고 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혹은, 문명을 벗어난 자연을 찾아 남태평양의 섬에 숨어 살다시피 한 그의 삶이 절대고독으로 치달리고 있었고 그런 내면의 풍경이 자화상의 외면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도 모르죠. 이건 개인의 사견으로 추정해 본 것일 뿐입니다. 

 

Self portrait, close to Golgotha(골고다 근처의 자화상), 1896, oil on canvas, 64 x 76 cm [Sao Paulo, Art Museum]

 

이 자화상에서 작가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자세로 묘사했습니다.

오, 이런 건방쥔...

 

솔직히 말해서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을 그리스도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을 그리 쉽게 제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단순히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서 자랐다는 문화적 배경이 이런 '발칙한 상상력'이 내재된, 혹은 가미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 제작을 가능하게 만든 거라고 추정해 봅니다.

 

Self portrait, 1903, 42 x 25 cm [Kunstmuseum Bern, Switzerlan]

 

고갱이 그린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외젠 앙리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그의 나이 55세에 프랑스령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최북단에 있는 히바오아(Hiva Oa)섬 아투아나(Atuona)에서 숨졌습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한 이유는 요?

알코올의존증, 골절상의 후유증 그리고 젊은 시절 앓았던 매독의 재발 등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자시의 몸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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