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전람회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2024/12/2 - 비엔나1900, 꿈꾸는 예술가들(1)

hittite22 2025. 6. 5.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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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비엔나 레오폴트 뮤지엄(Leopold Museum) 소장 작품의 국내 나들이가 있기에 만사를 제쳐두고 전시회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은퇴 후 상주 은모래비치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그림 그리기 취미를 살리고 있는 남해친구는 에곤 실레를 잘 모릅니다. 관람 후 사진을 여러 장 보내주었더니 '특이하군'이라는 반응만 보이던데요. 아, 색을 너무 어둡게 사용한다는 평도 하나 했었네요. 암튼, 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내세워 광고를 하고 있었지만 레오폴트 뮤지엄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오로지 에곤 실레의 실물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며 국립중앙박물관 나들이를 기획한 것이지요. 에곤 실레의 원화 작품을,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진심 크게 기뻐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주최측에서도 기획하지만 나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일상에서도 기획은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무료 갤러리를 방문하거나, 거금을 들여 아트 페어에 참가하거나, 또 이렇듯 해외 유명작가의 기획전시회 나들이 하는 것도 제 인생의 기획입니다. 저는 비엔나 벨베데레에서 소장하고 있는 클림트의 주요 작품이 결코 해외 나들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니 클림트에 대한 기대심리는 일치감치 자가제어한 마음으로, 충분히 이해하며 방문한 셈입니다. 주최 측에서는 아마도 돈이 되는 장사를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전면에 내세웠겠지만, 저는 나 자신 내면풍경의 미적 수준 향상을 위해 미술관 나들이를 추구합니다.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현장 구매 티겟 매소표 풍경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주요 기획전이 열리는 곳입니다.

 

기억하기로는 대부분의 중요한 기획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사실, 이곳 말고 별도의 특별전시실이 있는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내부 시설이 국립중앙박물관 본관의 전시실에 비하여 튼튼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던 곳입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그런 불평을 할 수 없습니다. 박물관 측에서 전시회를 기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언제나 '을'의 입장에서 살아온 내력과 역사가 있으므로..

 

입구에 뻥튀기처럼 크게 뽑은 에곤 실레 자화상이 걸려있는데 기술이 좋아서인지 아주 '선명'합니다.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러니 저렇게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커다랗게 뻥튀기하여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불평할 마음 1도 없습니다. 실제 저 자화상은 매우 작은 사이즈로 제작된 것입니다. 갤러리 대형 전시실 전시용으로는 임팩트가 떨어질 수도 있죠.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사이즈가 작아도 명화는 그 빛이 찬란하게 뻗어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나, 르누아르의 책 읽는 소녀나, 모네의 일본식 다리가 있는 지르베니 정원 수련 그림이 다 그런 사례에 해당합니다. 물론, 가정집에 걸어 놓는다면 그리 작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술관 전시장이라는 곳의 홀이 워낙 크고 넓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현상입니다.

 

실레 엉아가 뱐겨주네요..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한 불세출의 천재 미술가 에곤 실레..
기획전 정식 명칭입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습니다.
티켓 매표소 우측 벽체.

 

전시실 입장을 기다리며 티켓 매표소 우측 벽체를 바라보니 그곳에는 이번 전시의 쌍두 마차의 한쪽 말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에곤 실레도 좋고, 클림트도 반갑고..ㅎㅎ

 

전시장 map

 

위 전시장 지도를 보면, 입구측에 몇몇 점의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들이 걸려있었습니다. 관객들의 주의를 집중하고 관심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테크닉입니다. 그리고 중간으로 가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2실의 전시 구역에 에곤 실레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머리를 많이 굴린 전시실 작품 배치였습니다.

 

입구가 검은 아가리를 앙~하며 벌리고 있습니다.

 

프롤로그 -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The Wind of Freedom Blown into Vienna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Emperor Franz Joseph Ⅰ)는 비엔나를 유럽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확장을 단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유명 건축물들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건축물들은 과거 예술의 모방과 재현에 머물렀고,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로 각종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토론의 장을 펼치게 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신축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의 길을 모색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한 클림트는 그 운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원탁,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1918, 종이에 석판화, 에곤 실레 作 [private collection]

 

이 포스터, 디자인이 독특하고 강렬하지 않나요?

<원탁>은 에곤 실레가 그린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포스터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고요한 공간, 화면의 가장 위쪽에 그려진 이가 바로 에곤 실레 자신입니다. 탁자의 제일 윗자리에 자신을 그려 넣은 것은 실레의 자신감이기도 하고, 그렇게 오버(?)해도 태클 거는 사람이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탁자의 배치가 'ㄴ'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에곤 실레가 앉은자리가 상석(上席)이라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런데 1918년 3월에 열린 이 전시회에서 실레는 분리파 중앙 전시실에 자신의 작품을 단독으로 전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와우! 서프라이즈 한 이야기이군요.

비어있는 실레의 맞은편 자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것입니다.

포스터 그림에서는 그 자리 바깥부분이 잘려 있어 클림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인지 애초부터 비어있던 것인지도 역시 불분명합니다.

 

좌장에 앉은 이.. 에곤 실레입니다.

 

Gustav Klimt

 

Altar of Dionysus,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1886, oil on canvas
Altar of Dionysus(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1886 [detail - center]
Altar of Dionysus(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1886 [detail - left]
Altar of Dionysus(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1886 [detail - right]
Altar of Dionysus(디오니소스 제단),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1886 [detail - center, close up]

 

<디오니소스 제단>은 비엔나에 새로 지어진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습작으로, 실제 크기는 12m에 이르는 긴 작품입니다. 작품 테마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둘러싼 연회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가운데에 디오니소스 흉상(검은색으로 보이는 부분이쥬?)이 배치되어 있고 양쪽으로 그를 숭배하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연회가 연극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는데, 아마도 클림트는 국립극장에서 연극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한 듯합니다. 그는 이 작업으로 1890년 황제상을 받을 정도로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Vienna Secession : The Dawn of Change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합니다.

비엔나 분리파 초대 회장인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회를 열어 작품에 대해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듭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은 예술철학과 외국 예술의 동향을 알리는 잡지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으며,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뒷면 벽체에 빈 분리파 회원 기념사진이 보입니다. 앉아있는 클림트도 보이네요..
Gustav Klimt作, 하나 지역의 소녀(Head Study of a Girl from Hana), 1883년경, oil on wood
Gustav Klimt作, 하나 지역의 소녀(Head Study of a Girl from Hana), 1883년경 [detail]

 

<하나 지역의 소녀>는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린 작품으로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소녀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 것 역시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입니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함으로써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을 두드러지게 표현했습니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장식적인 요소도 없고 색채의 사용도 수수하여 아주 소박해 보이는 초기 작품입니다.

클림트의 작품이라고 누가 일러주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이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Gustav Klimt作, 노인의 옆모습(Portrait of an Old Man in Profile), c.1896, oil on cardboard
Gustav Klimt作, 노인의 옆모습(Portrait of an Old Man in Profile), c.1896 [detail]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림 속 모델의 정체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라는 견해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하나 지역의 소녀처럼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했는데 이로 인하여 노인의 옆얼굴에 대한 주목도를 더욱 높여주게 합니다. 

 

진분홍 배경색과 검은 모자와 의상, 그리고 하얀 피부가 한눈에 확- 들어옵니다.
모자를 쓴 여인(Lady with Cape and Hat), 1897/1898, oil on canvas [Klimt-Foundation, Vienna]
모자를 쓴 여인(Lady with Cape and Hat), 1897/1898 [detail]

 

붉은 배경에 망토와 모자를 쓴 여인이 차려입은 모습은 당시 비엔나에서 유행하던 패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패션이라면, 클림트의 모델로 섰던 여인들 대부분이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 플뢰게가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그럼 이 패션도 프뢰게의 작품일까요? 글쎄입니다. 얼핏 보아서 검은색으로 칠해진 의상 디자인까지 살펴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암튼, 목을 감싼 칼라와 챙이 넓은 모자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함으로써 클림트는 여인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이런 테크닉은 다른 초상화에서 보여준 바 있죠. 한편, 19세기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의복인 코르셋과 과도한 장식을 탈피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위 패션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일까요? 패션에 문외한이라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클림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티켓 매표소 측벽에 걸렸던 작품이죠.
수풀 속 여인(Girl in the Foliage), c.1898, oil on canvas [Klimt-Foundation, Vienna]
수풀 속 여인(Girl in the Foliage), c.1898, oil on canvas [Klimt-Foundation, Vienna]
수풀 속 여인(Girl in the Foliage), c.1898 [detail]

 

구스타프 클림트는 외국의 선진 예술을 경험하며 새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외국의 선진 예술이라 함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동한 인상주의가 대표적입니다. 1890년대 후반 클림트의 초상화에서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수풀 속의 여인>은 클림트가 36세에 그린 초상화로 역시 인상주의 영향이 관찰되는 작품입니다.

 

세련된 모자를 쓰고 소매가 풍성하게 부푼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이 파란 눈으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 뒤쪽에 우거진 수풀과 블라우스 소매를 거친 붓놀림으로 두껍게 칠하여 표면 질감이 두드러지도록 표현했습니다. 물감을 두텁게 칠하여 질감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고흐가 잘 쓰던 기법인데 저 역시 그런 질감이 느껴지는 유화가 마음에 듭니다. 음식으로 치면 고기류의 요리 중에서 식감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맛이라고나 할까요?

 

 

비엔나 분리파의 전개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作, 1902, 종이에 다색 석판화

 

1902년, 비엔나 분리파는 혁신의 상징인 베토벤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가 그린 포스터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상징과 장식이 돋보입니다. 한 여성이 손에 든 빛나는 물체를 보기 위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 물체는 비엔나 예술계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作, 1908, 종이에 다색 석판화

 

당시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ession)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the Club of Seven)'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 클럽(Hagen Society)'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애초부터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갈등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가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하여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때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오~ 창설멤버였던 클림트가 떨거지 신세가 된 것일까요?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정치든 예술이든 분열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법인데...

 

 

'비엔나 예술전람회'는 20세기 초 비엔나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전시였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에서 탈퇴한 구스타프 클림트와 동료들은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새롭고 실험적인 예술 운동을 선보였습니다. 이 전시에서 에곤 실레는 대중에게 작품을 처음 공개했고, 오스카 코코슈카 등 다른 젊은 예술가들도 참여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바와 같이 루돌프 칼바흐(Rudolf Kalvach)가 이 전시회의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숲 앞에서 무릎을 꿇은 여인을 표현했는데,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른스트 에크 作, 1912, 종이에 석판화

 

한편,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와 동료들이 떠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들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했습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제40회 전시회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가 독립된 예술 분야임을 강조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서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다양한 포스터를 전시했습니다. 에른스트 에크(Ernst Eck)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이양반, 구스타프 클림트, 배우 김상호를 닮지 않았나요?
배우 김상호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The Vienna Secession Magazine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롬(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합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이 잡지는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봄>은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베르사크룸(성스러운 봄)>과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콜로만 모저 作, 1897
<베르사크룸(성스러운 봄)>과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콜로만 모저 作, 1897 [detail]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는 비엔나 예술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인물입니다. 이 포스터는 1898년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쓰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에 모저는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선과 상징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이 포스터에도 추상적인 형태 속에 글씨와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포스터 위쪽에 적힌 'Ver Scarum, 베르 사크롬(성스러운 봄)'은 1898년부터 발생된 잡지의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비엔나 분리파의 이상을 보여줍니다.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New Perspectives : Transformed Austrian Landscape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오스트리아 풍경화 감상에 진심입니다.
가을 숲, 에곤 실레 作, 1907, oil, pencil on cardboard

 

에곤 실레의 초기 작품으로 가을에만 볼 수 있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담은 풍경화입니다.

그의 독특한 색채와 세련된 선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 전의 작품으로 어둡고 우울한 색채로 깊어가는 가을 풍경을 묘사하여 사색하며 길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17세의 학생신분이었던 에곤 실레는 무르익은 가을의 색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계열의 갈색을 사용했습니다. 화면 색감은 어둡지만 곳곳에 밝은 노란색의 낙엽이 그려져 있어 가을 숲에서 이어지는 자연의 생명력을 볼 수 있습니다.

 

언덕 아래 마을(Village at the Foot of a Hill), 에곤 실레 作, 1907, oil on cardboard, mounted on wood

 

역시 에곤 실레가 17세에 그린 <언덕 아래 마을>은 비탈면 아래에 집과 나무가 있는 가을 들판의 풍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멀리 비탈을 따라 너른 들판과 목초지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긴 듯하지만, 실제로는 섬세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저는 돋보인다고까지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해설에 따르면, 아래쪽 들판의 가볍게 물결치는 가는 선과 위쪽 언덕의 두텁고 거친 붓질이 대조를 이루는 것이 보입니다. 실레는 대상을 그릴 때 다양한 관점과 구도를 실험했는데, 이러한 특징은 초기에 그린 풍경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깊은 숲(Inner Forest), 안톤 파이슈타우어(Anton Faistauer) 作, 1914, oil on canvas

 

안톤 파이슈타우어(b.1887)는 농부 가문 출신으로 마이스호펜 근처에서 자랐으며, 원래는 성직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볼차노 김나지움에서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Albert Paris Gütersloh)를 만난 후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그는 로베르트 셰퍼가 운영하는 빈 사립 미술 학교에 다녔고, 이후 빈 미술 아카데미로 전학하여 알로이스 델루그와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에게 사사했습니다. 하지만 1909년 아카데미를 사임하고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등과 교류하며 전통 예술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탐구했습니다.

 

작품 <깊은 숲>에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햇빛에 물든 숲이 조화로우면서도 대비가 강렬한 빛과 어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안톤은 숲으로 난 길을 따뜻하고 밝게 표현해 어두운 숲과 달리 평온한 느낌을 주게 하였습니다. 

 

쇤부른에서(In Schonbrunn), 카를 몰(Carl Moll) 作, 1911, oil on wood

 

카를 몰의 풍경화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섬세한 빛과 독특한 색채로 유명합니다.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의 정원을 그린 이 작품에서 몰은 햇빛의 미묘한 변화와 그림자로 색감이 달라지는 풍경을 파스텔의 부드럽고 조화로운 색조로 표현했습니다. 몰은 이러한 색채를 사용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기보다 그림에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을 포획하려는 손!
큰 포플러 나무 Ⅱ(The Large Poplar Ⅱ,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作, 1902/1903, oil on canvas

 

구스타프 클림트는 플뢰게 가족과 자주 휴가를 보냈던 아터제 호수(Lake Attersee) 풍광을 많이 남겼습니다. 작품 <큰 포플러 나무>는 아터제 근처 Litzlberg(리츨베르크) 예배당 풍경을 그린 작품입니다. 우뚝 솟은 거대한 포플러 나무가 강한 인상을 줍니다. 그는 마치 점묘화처럼 다양한 색으로 점을 찍어 포플러 나무를 그렸는데, 한 평론가는 반짝이는 듯한 잎의 표현이 '송어의 비늘(Trout Blotches)'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한편 포플러 나무가 서 있는 대지의 상부, 하늘 가득 휘몰아치는 바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대기의 찌푸림이 긴장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큰 포플러 나무 Ⅱ(The Large Poplar Ⅱ,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作, 1902/1903
큰 포플러 나무 Ⅱ(The Large Poplar Ⅱ,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作, 1902/1903 [detail]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Sheaves of Corn),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Leopold Blauensteiner) 作, 1902/1903, oil on canvas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Landscape with Sheaves of Corn), Leopold Blauensteiner作, 1902/1903 [detail]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옥수수 짚이 있는 풍경>은 레오폴트 블라우엔 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에 해당합니다. 향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의 여름날 농촌 풍경을 묘사하였습니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습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어쩐지 인상파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했더니 내력이 있었군요.

 

호숫가의 남녀(Couple by the Lake), 에른스트 슈퇴어(Ernst Stohr) 作, 1897/1903, oil on canvas
호숫가의 남녀(Couple by the Lake), Ernst Stohr作, 1897/1903 [detail]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퇴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깔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 점묘화도 서양 회화사에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냅니다. 슈퇴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던 화가였습니다.

 

관객들의 관심이 높았던 작품 중 하나...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Leopold Czihaczek at the Piano), 에곤 실레 作, 1907, oil on canvas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Leopold Czihaczek at the Piano), 에곤 실레 作, 1907 [detail]

 

에곤 실레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죽음의 원인이 된 병이 어떤 경로로 침입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성적 취향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은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여 삼촌 슬하에서 자란 실레는 삼촌에 대한 인상은 아버지와 달리 긍정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해 명암의 대비를 살렸습니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줍니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가게 만들었습니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해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려냈습니다.

 

실비아 콜러(Silvia Koller, 화가의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作, 192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실비아 콜러(Silvia Koller, 화가의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作, 1926 [detail]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파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던 화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도 맡았습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의 초상화에서 모델은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가정 분위기를 암시하듯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습니다.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브론치아 콜러-피넬(Broncia Koller-Pinell) 作, 연도미상,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주인공의 어두운 색 옷이 이 화폭의 절반을 차지해 얼굴과 목의 밝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살짝 기울인 여성의 시선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네요. 배경의 노란색 벽지는 다양한 색의 동물과 식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자주 만들던 벽지 디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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