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Radical Lines : The Artistic World of a Young Genius
20세에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인정).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풍경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에곤 실레의 개성을 담은 사진
에곤 실레는 개성 있는 표정과 자세로 자신을 어필하였습니다. 마치 배우처럼 표정을 연출하는 과장된 자기표현은 나르시시즘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안톤 요제프 트르치카인데 그는 여러 점의 연출사진으로 실레의 개성을 담아내었으며 사진작품에다 '안티오스'라는 가명을 적어놓았습니다. 사진 포즈를 보면 손의 모양이 두드러지게 강조된 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실레에게 있어서 '손'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했음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철도회사 역장이었는데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실레는 어머니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았던 양,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는 병(매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삼촌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토록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에곤 실레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그 후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에곤 실레는 1906년, 16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교수법에 반발하여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둡니다. 아래 소개한 <소녀의 초상>은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인 16세에 완성한 드로잉으로 이미 당시부터 지니고 있었던 그의 뛰어난 재능을 잘 알게 해 줍니다.
아카데미를 뛰쳐나오지만 실레는 클림트의 초정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초기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던 실레는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남긴 실레의 표현 방식, 즉 인물을 표현하는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이내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캔버스에 풀어내는 테크닉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줍니다.
자화상 들여다 보기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서양의 유명 화가들은 자화상을 많이 남겼습니다.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화가로서의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 뭉크, 반 고흐 등이 그런 화가인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역시 많은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에는 각기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 고흐 같은 경우는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본인 스스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리다 보니 많은 자화상을 남기게 되었던 사례이죠.
그럼 에곤 실레는?
17세때 그려진 이 자화상은 우리가 익히 알고 기억하는 에곤 실레의 모습과 다릅니다.
장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 때문일까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에곤 실레는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해 보입니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마치 헤어스타일러처럼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모습입니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무려 10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서양 미술계에서 미남으로 유명한 화가라면 첫째로 떠오르는 인물이 이태리의 모딜리아니인데,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 역시 미남 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대해 묘사해 본다면 훤칠한 키에 좁은 어깨, 긴 팔다리, 작은 얼굴의 독특한 표정으로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정한 머리에 깨끗한 수염을 갖추어 빈곤할 때조차도 절대 궁색해 보이지 않는 차림을 한 남자였습니다.
그런 탓인지 실레는 누구보다 거울 보기를 좋아했던 화가로, 비엔나의 패셔니스타인 동시에 항상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건 근세 한국사회의 시인 백석과 닮은 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나르시시즘적 면모가 있었던 그는 자화상을 그릴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신 거울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에곤 실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Self-Portrait는 이번 전시회의 얼굴마담으로 비엔나에서 서울까지 날아온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입니다.
깔끔한 흰색 바탕에 어두운 옷을 입은 실레와 강렬한 붉은색의 꽈리 열매가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모델이 된 에곤 실레는 어깨를 살짝 돌리고 관람자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얇고 세밀한 선이 성격의 예민함과 내면의 불안함을 전달해주고 있네요.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Self Portrait with Chinese Lantern Plant)>은 실레의 여타 자화상과 달리 격한 선이 없고 표현 방식도 절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레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쉽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이 자화상은 실레가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며 활동할 때 그린 것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가 22세에 그린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세기말 현상과 전쟁에 따른 불안한 시대의 감성을 포착한 작품으로 인지되고 있습니다. 불안한 듯 살 떨리는 실루엣, 생채기 내듯 긁고 문질러 표현하는 기법, 빨갛게 익은 꽈리의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져 극한 불안과 공포감을 드러냅니다. 여기까지가 에곤 실레의 표정에 대한 정형화된 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각도로 한 번 들여다봅니다.
혹시 젊은 남성이 또 다른 젊은 여성을 훔쳐보는 시선인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어깨를 살짝 돌리고 관람자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자신감과 연약함이 복합적느오 내재된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해설하는 평론가들이 언급하였듯이 불안감이 가득 찬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모습이 정답이겠지요. 암튼, 이 자화상은 사는 곳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젊은이들이 공감(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든..)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꽈리 열매(중국 등불 식물)가 있는 자화상>은 가늘지만 날카로운 선과 색상이 균형 잡힌 구성을 자랑하며,
각 선은 그 자체의 연속이나 상응하는 대응물을 찾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머리카락과 몸은 서로 거울처럼 보이고, 이미지의 수평 가장자리에서 다듬어졌으며, 어두운 부분은 밝은 붉은색 꽈리 열매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균형을 더욱 잘 보여주기 위해 실레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고, 그의 시선은 관찰자를 향해 비스듬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아티스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을 연약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같은 시기에 그린 자신의 모델이었던 Wally Neuzil(발리 노이칠)의 초상화와 한 쌍으로 제작된 것 같습니다.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두 작품을 나란히 서 있는 걸 감상한 추억이 새롭습니다.
꽈리는 주로 관상용으로, 뿌리와 열매는 약용 또는 식용으로 쓰입니다.
꽃말이 '거짓'인 꽈리라는 이름은 조선에 "꽈리"라는 소녀가 죽은 후 무덤에서 꽃이 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Self-Identity and Crisis as an Artist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연필을 잡을 수 있는 아기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에곤 실레입니다.
그의 드로잉은 클림트마저 찬사 할 정도였는데,
클림트는 실레의 드로잉 실력은 본인보다 높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에곤 실레가 뒤틀린 자세로 쭈그려 앉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머리와 상체, 왼팔과 다리, 엉덩이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풍부한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과 오른쪽 발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찡그린 이마와 머리카락을 비롯해 몸 곳곳에 표현된 구불구불하고 소용돌이 같은 선은 다른 어느 화가에게서도 나타나지 않는 실레 화풍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한쪽으로 몸을 돌려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특이한 요소입니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 가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돋보이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실레는 황토색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린 듯한 이 작품에 <스스로를 보는 이> 또는 <죽음과 인간>이라는 두 개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인데 그 뒤로 두 번째 자아가 겹쳐진 유령같이 그려져 있습니다. 죽음을 상징하는 유령인데 인물(첫 번째 자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어 주인공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매몰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분석을 하자면,
주인공은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자아에서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작가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아래에서 뻗어 올라온 '손'에 집중하도록 유도합니다. 뒤에 겹쳐져 보이는 유령의 존재는 희미하게 암시적으로만 드러날 뿐, 오로지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손을 내면 심리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한 모습입니다. 또한 주인공의 고통과 불안함, 자아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두운 색조와 날카로운 선을 채택하였습니다.
'손'이란 무엇입니까?
붓질을 하는 화가든, 형상을 빚어내는 조각가이든, 예술가에게 '손'은 창작 활동에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에곤 실레가 작품에 그린 '손'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화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중요한 소재인 것입니다. 동일 공간에 전시된 레오폴트 뮤지엄 소장 조각작품인 '손'은 에곤 실레가 손의 동작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과 연관성을 감안하여 실어와서 함께 전시 중인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반 메슈트로비치는 구부림과 각도가 다른 긴 손가락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묘사해 손에 대한 강력한 생명력을 부여했습니다.
작품제목은 '시인'으로 뽑았는데,
그려진 자화상 모델의 표정과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잘 매칭이 되지 않습니다.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려진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의 시인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왼쪽으로 심하게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흰색의 배경 공간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를 하고 있는데요, 어디를 쳐다보는 걸까요.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 걸친 실레의 육신은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의 시그니처 제스처인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붉은색으로 그려진 배꼽과 성기의 모습이 드러나 보입니다.
삼인초상이라..
왜 뜬금없이 '삼인성호(三人成虎, 거짓된 말도 여러 번 되풀이하면 참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뜻)'라는 말이 떠오르는지..
아, 이번 대선 승리한 쪽에서 '삼인성호'란 고사성호를 유행시킨 인물(조 아무개 씨)을 세상에 풀어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그냥 튕겨져 나온 단어일 뿐입니다.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터넷 서핑으로 가져온 작품사진입니다. 제목이 '계시'인데, 잘 해석이 되지도 않거니와 에곤 실레라는 화가의 성향으로 볼 때 어울리는 주제도 아닌 것으로 여겨져서 세부 설명이나 해설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헤르만 엥겔에게 보낸 편지에 남긴 내용 중에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언급된 게 있습니다.
"계시!"
특정 존재의 계시. 시인, 예술가, 현자 또는 영매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림은 자체 내부에서 빛을 발산해야 하며,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을 평생 동안 소모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빛이 소진되어 타 버리면, 더 이상 빛나지 못합니다.
뒤돌아선 인물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된 존재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주문에 걸려 그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무릎을 꿇고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위대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들이 발하는 오렌지색이나 다른 색의 아스트랄 빛은 무릎 꿇은 작은 인물과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합쳐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제 그림 '계시록'에 대한 몇 가지 설명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뒤통수만 드러낸 인물은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
설명문으로 보아 뒤통수를 드러내 보이는 인물이 계시를 받는 사람인데 그는 무릎을 꿇은 자세라는 겁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무릎 꿇은 모습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힘들었는데..
암튼, 그런 전제에서 보면 얼굴을 드러내 보이는 인물 2인이 계시를 내리는 지위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2인이지? 서로 부부지간인가?
오른쪽 인물은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는지 붉은색입니다. 생뚱맞은 생각이긴 하지만 제 눈에 비치는 계시를 내리는 존재들의 마스크는 꼭 아프리카인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왼쪽의 키가 커 보이는 존재는 발이 땅에 닿은 건지 허공에 떠 있는 건지 역시 불분명합니다.
작가가 직접 제목을 정하지 않은 그림이었던 <애도하는 여인>은 우울하면서도 투쟁적인 표정으로 그림 밖을 응시하는 인물을 보여줍니다. 머리는 어두운 천으로 가려져 있고 윤곽과 대조되는 창백한 안색은 거의 두개골의 인상을 피부밖으로 표출해 낸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두 번째 인물의 프로필이 부분적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색상은 배경의 붉은 색조와 거의 어우러지고 입을 삐죽 내밀고 눈썹을 추켜올린 생김새는 마치 실레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OMG.
그런데 이 실레 초상으로 보이는 얼굴에 추가된 붉은 머리카락은 당시 그의 파트너였던 발리 노이칠(Wally Neuzil, 1894–1917)의 것으로 해석하는 설명들이 있습니다. 뭐, 그럼 저 여인은 누구인데요? 뒤죽박죽이 되는 느낌이 들면 해석을 자제해야 합니다.
암튼,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의 속성은 상호 교환 가능해지고 선은 모호해집니다.
실레는 초상화와 자화상에서 정체성을 투사와 관습, 그리고 이러한 규범에 대한 의문으로 형성된 불안정한 개념을 즐겨 표현하였던 화가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초상화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자아를 찾는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실레는 어떤 작품에서 이 주제를 노골적으로 중심 모티프로 삼기도 했습니다. 다 좋은데 그럼 이 여성은 누구일까요?
"Mourning Woman"은 단순한 여성의 애도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상실의 감각을 포착한 표현주의적 초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해석한 뒷면 인물의 머리카락이 노이칠의 머리색과 일치한다는 전제에서 살펴볼 때 이 작품의 모델은 에곤 실레가 결혼하기 전의 연인이었던 빌리 노이칠이며, 뒤에 드러나는 또 다른 자아는 실레 자신을 그린 것이라기 보다 노이칠의 자아 혹은 내면의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듯싶습니다.
1913년, 에곤 실레(1890~1918)는 그의 작품에서 당시까지 탐구되지 않았던 대형 그림, 즉 미완성 그림 두 점인 <만남>과 <개종 II>를 그렸는데, 이 두 점은 현재는 분실되거나 단편으로만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 아쉬운 일입니다.
후자의 기념비적 풍경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어깨에 천을 두른 반나체의 여성의 뒷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원작인 <개종 II>는 설교하는 중앙 인물을 둘러싼 약 12명의 실물 크기의 인물을 묘사한 대작이었다고 하네요.
대작(大作)의 목격자 오토 베네시(Otto Benesch, 1896~1964)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인물들은 완전히 허구였지만 현실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실레와 가까운 친구, 클림트, 제 아버지를 알아보았고, 소년의 모습에서 저도 알아봤습니다. 그들은 모두 수도사처럼 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본 여성 누드도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스타일과 모티프와 관련하여,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느껴지나요?
(계속)
에곤 실레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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