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아시아

박수근(朴壽根) / 1 - 시장풍경과 여인들

hittite22 2025. 4. 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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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朴壽根, 1914~1965)

 

 

 

박수근은 20세기의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작품을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흑백과 여백으로 대표되는 동양화, 이를테면 색을 도외시하고 선을 위주로 묘사하는 미술작법을 싫어합니다. 더구나 언뜻 보면 까칠까칠한 화강암식 질감이 화면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인물 표정이나 제스처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서 감상에 불편을 초래합니다. 거의 쉽지 않은 미션, 미션 임파서블 같은 작품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개취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 화백은 김환기 화백의 추상화가 역대 한국서양화의 경매 최고가를 거듭 경신하는 기록을 제조하기 이전,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였음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지만 7세 때 아버지의 광산업 실패로 가난속에서 자랍니다.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을 때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도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학하여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한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합니다. 당시 '선전'에서의 입선은 조선인이 화가로 인정받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매우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어 어려운 살림을 도맡는 생활의 고삐에 묶여야 했습니다. 그런 탓인지 1933년부터 연이어 세 차례 낙선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21세 때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는 늘어난 빚더미로 피신하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박수근은 춘천에서 홀로 살면서 정진하여 1936년 제15회 선전에서 수채화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선을 합니다. 이 시기에 박수근은 금성 집에 왔다가 빨래터에 있는 김복순을 보고 결혼을 결심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승낙을 받고, 1940년 2월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 후 아내 김복순은 몇 시간씩 그림 모델이 됩니다. 당시 박수근은 주로 맷돌 돌리는 여인의 모델로 아내를 세웠습니다. 결혼 3개월 만에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되자 박수근은 아내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합니다. 휴일이면 평양의 화가들과 어울려 스케치도 나갔고, 일본 유학파들인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등과 함께 ‘주호회’라는 그룹을 만들어 1944년까지 매년 동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결혼 이듬해인 1941년 박수근은 아내를 모델로 그린 <맷돌질하는 여인>으로 제20회 선전에서 입선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평양에서 해방을 맞은 박수근은 도청을 그만두고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금성은 공산 치하였기에 기독교 신자인 박수근은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박수근은 홀로 남하합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두 아이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 아내와 서울에서 재회합니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화방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던 중,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이때 후일 소설가로 대성한 박완서를 만났다고 전해집니다. 미군 PX에서 근근이 모은 돈으로 박수근은 창신동에 작은 집 한 칸을 마련했고 전쟁과 피난으로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습니다. 휴전 이후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여 남한 미술계에서도 화가로 인정받습니다. 이때 특유의 굵고 검은 윤곽선에 황갈색의 색채와 두터운 질감, 명암과 원근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40세인 1954년부터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작품이 팔려나갑니다. 주로 한국에 온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작품을 샀는데 그의 그림에서 한국의 정취를 느꼈다고 합니다. 단골 고객은 미국 대사관 문정관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부인이었고, 캘리포니아 거주하는 마가렛 밀러 여사가 특히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밀러 여사는 귀국 후에도 우편을 통해 박수근의 그림을 계속 사주고 화구를 부쳐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박수근 화풍은 원숙해져서 독특한 질감의 표현방식으로 독자적인 조형성을 이룹니다. 해외에 작품이 소개되기 시작하여, 뉴욕 월드하우스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 <노상>, <풍경>이 전시되었고, 반도화랑 창설에 중심 역할을 했던 미국인 실리아 짐머맨이 소장했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 ‘동서미술전’에 출품됩니다.

연이은 해외 전시회 출품 소식에 국내 미술계도 박수근의 작품에 주목합니다. 1959년 그는 국전의 추천작가가 되어 심사를 거치지 않고 국전에 출품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현대작가 초대전 작가로 선정되었고, 1962년에는 제11회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서양화 공모작들을 심사했습니다. 그러나 국전의 파벌 싸움과 심사 잡음이 가시지 않자 다시는 심사를 안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드러난 것입니다. 같은 해 주한미공군사령부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렸고, 그중 몇 점이 홍콩 인터내셔널호텔의 인터하우스에 선을 보여 ‘동양적인 유화’라는 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박수근의 화단 내 위상과 예술적 평가는 높아졌지만,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박수근은 과음으로 인하여 신장과 간이 나빠졌으며 왼쪽 눈에는 백내장까지 발병했습니다. 위 사진에서도 그런 기미가 나타나고 있었군요. 치료비가 없어 악화된 뒤에야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재수술 중 시신경을 잘라내면서 실명합니다. 이후 한쪽 눈으로만 그림을 그렸으며, 다른쪽 눈마저 침침해져 가는 악조건에서 완성한 작품이 <할아버지와 손자>입니다. 병세는 악화되어 신장염과 간염 진단을 받습니다.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 회복이 어려워 집으로 퇴원한 뒤 세상을 떠납니다. 향년 51세. 유해는 경기도 포천군 동신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2004년 4월 15일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으로 옮겨졌습니다.

 

독서, 1950, oil on hardborad, 20.1 x 13cm, Private Collection

 

박수근 화백이 그린 유일한 <독서> 그림의 모델은 작가의 큰 딸 박인숙입니다. <아기 업은 소녀>의 모델도 어린시절의 박인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후에 자라서 아버지를 따라 서양화가가 됩니다. <독서>는 단발머리에 치마저고리 차림의 어린 소녀가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고사리 손에 책을 쥐고 읽는 모습이 담긴 따뜻하고 정겨운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색상이 잘 반영되었는데

이후 그가 추구한 단색화에 가까운 거칠은 질감화에 비하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층-풍선 터뜨리기, 2017년, 117x 93 cm [박성남 作]

 

내가 느낀 점을 박수근 화백의 아들도 똑같이 느꼈던 것일까요?

아버지 박수근 화백의 작품과 같은 화풍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색채를 더 하였습니다. 

 

장남 박성남, 1952, oil on hardboard, 28 x 21cm

 

<장남 박성남>은 박수근 화백이 그린 다섯살 된 아들 박성남의 초상화입니다.

원래 둘째로 태어났으나 첫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장남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일흔의 나이가 된 박성남(70)씨 역시 아버지처럼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화가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아버지 박수근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번돈으로 마련한 창신동 당고개집으로 이사하였을 때 그린 것입니다. 개구쟁이 아들을 5~6시간이나 앉혀놓고 그린 이 상반신 초상화에는 화가의 애틋한 부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오른쪽) 화백과 손자 박진흥 화백(가운데)

 

화가 박성남은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4년 가나인사이트센터)에서 자신의 초상화 <장남 박성남>에 대해 아래와 같이 덧붙였습니다.

“전쟁으로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다 마지막으로 극적인 상봉을 한 후, 아버지는 가장 먼저 다섯 살 난 나를 앉혀 놓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그리셨다. 이 그림은 그 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모든 ‘아버지의 아들’의 초상이다.”

 

청소부, 1963, oil on canvas, 33.4 x 53cm

 

혹시 기억나십니까?

옛날 청소부는 리어카에 뚜껑이 달린 청소차(?)를 끌고 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했습니다. 1960년대 초중반까지 아니 일부지역에선 60년대 후반까지 그런 청소차를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작품은 2002년에 발견되었습니다. 박수근은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에 여성의 노동에 남다른 경외심을 가졌을 겁니다. 더구나 그의 시대는 전쟁으로 사라진 남성들을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졌던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부각되었으니 그의 작품에 여성이 주로 등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평론가들에게 박수근은 남성은 그리지 않았던 화가라고 인식되어 있었는데 그 편견을 깨트린 작품이 바로 <청소부>였습니다.

 

모자, 1961, oil on canvas, 45.5 x 3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모자>는 어머니가 쭈그리고 앉아서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비슷한 구도로 그려진 그림으로 <할머니와 손자(1960년대초반, 45.5 x 37.9cm)>, <할아버지와 손자(1964, 146 x 97.5cm)>가 있습니다. 그림 사이즈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가장 크고 <할머니와 손자>, <모자>는 거의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자손을 감싸 안은 팔의 궤적이 각져보이는데 할머니와 손자, 모자에서는 둥그렇게 감싸 안은 곡선의 미학이 표현되어 눈길을 끕니다.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작품성 측면에서 볼 때 세 작품 중에서 <모자>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양이, 1962, oil on hardboard, 18 x 24cm[Seoul Auction(2017.11), 3.8억]

 

작품 <고양이>는 박수근 화가가 창신동 집에서 머물 당시 기르던 반려묘를 그린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박수근은 민화를 비롯한 전통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착안하여 몇편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위 작품 <고양이>도 그런 작품활동의 일례에 해당되겠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렸는데, 이러한 고양이의 습성은 반려묘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현재에도 일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웅크린 개, 1950후반~1960전반,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이 작품은 1965년 유작전이 열렸을 때 판매된 이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개인 소장품입니다. 물감을 여러 겹 더해가며 흰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검은 선으로 몸을 둥글게 웅크린 개를 그렸습니다. 거친 선으로 개의 형상을 대충 그려넣은 선묘화입니다.

 

실직, 1961, oil on canvas, 41 x 21.5cm, 개인소장

 

1962년 용산 주한미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개인전 <(미술) Park Soo Keun>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한 남자는 구직활동에 지친 나머지 냅다 드러누워 퍼질러 있고 또 한 남자는 식구들 생계걱정으로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전체 배경에는 엷은 초록을 흩뿌려 놓았습니다. 당시 작품은 전시 후 알래스카대학교 박물관에 판매되었다가 다시 국내에 반입되었습니다. 작품 뒷면에는 작가 소개, 알래스카대학교 소장 관련 기록, 옥션 판매 기록, 전시 이력과 소장 이력이 꼼꼼히 적혀 있습니다.

 

두사람, 1960s, oil on panel, 18.5 x 23.5cm [K-Auction(2007.9), 7.9억]
한일(閑日),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2003,뉴욕 크리스티, 13억]

 

<한일(閑日)>은 장기판을 가운데 두고 둘러 모여 있는 남자들을 다룬 1950년대 작품입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한가한 날이면 남정네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장기판을 벌였습니다. 조금 넉넉한 동네에서는 바둑판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공원에 나와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노인네들에게 공공기관이 무상 대여해 주는 놀이기구가 장기판과 바둑판입니다.

한일(閑日) detail 1

 

이건희 회장 사후 삼성그룹이 국가에 기증한 회장의 컬렉션 중에서 유화 4점, 드로잉 18점과 함께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 미술관에 분산배치되어 소장 중에 있습니다. 작품 <한일>은 박수근 선생이 1959년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 출품했던 그림인데, 해외로 반출됐다가 2003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것을 삼성 이건희 회장이 구입하여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일(閑日) detail 2
한일(閑日) detail 3

 

판잣집, 1953, oil on canvas, 20.4 x 26.6㎝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

 

시장풍경

 

시장, 1950
시장, 1950년대, 23 x 13cm[K Auction(2016.6), 4억2천만원]

 

시장에서 모여 앉아있는 서민들의 일상을 포착, 척박했던 전후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유명한 아시아 미술 수집가였던 고(故) 호튼 프리먼 미국 AIG사 부회장이 박수근에게 직접 구매해 소장하던 것입니다. 작품제목 <시장>으로 제작된 그림이 두 점 있습니다. 다른 한 점은 그림 속에 피리를 불고 있는 장사치가 등장하고 있는데 상세내용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피리 부는 노인이 등장하는 시장그림을 더 선호합니다.

 

시장의 사람들, 1961, 메소나이트에 유채, 62.4 x 24.9cm[K-Auction(2007.3), 25억]

 

길 위의 사람들을 그린 <시장 사람들>은 세부 묘사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몇 개의 굵은 윤곽선만으로 표현해낸 작품입니다. 독학으로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확립한 박수근의 또 다른 걸작으로, 가족을 위해 삶의 현장에 나선 서민들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12명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작품은 박수근을 존경하던 한 외국인이 40년간 소장해오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인 소장가에게 팔렸습니다. 박수근 작품 중 비교적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작가의 다른 그림과 같이 회백색의 화강암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질감과 단순한 검은 선이 도드라집니다.

 

시장의 사람들, 1961, oil on canvas, 25 x 62cm
시장의 사람들, 1962, oil on canvas, 23 x 28cm
시장의 여인, 1963, oil on canvas, 29.5 x 28cm / Seoul Auction(2005.12), 9억

 

<시장의 여인>은 길에 쪼그리고 앉아 광주리에 무언가를 담은 채 노점을 벌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과거 우리의 시장터(시골 혹은 서울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입니다.

 

앉아있는 여인, oil on canvas, 23.6 x 21.5cm[서울옥션(2018), 5.8억]
앉아있는 여인(detail)

 

<앉아 있는 여인>은 노상에서 바구니를 앞에 두고 앉은 채 손님을 기다리는 여인을 담은 작품입니다. 일본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궁핍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당시 서민들의 일상을 거친 질감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2018년 서울 옥션 경매에서 5.8억에 낙찰되었습니다.

 

기름장수, 1953, oil on hardboard, 29.3 x 16.7cm, 현대갤러리 소장

 

화가 박수근(1914~1965)이 1953년에 그린 <기름장수> 그림 앞에서 아들 박성남(67)은 "윗집에 살던 기름장수 아주머니와 어머니가 편지를 읽는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박수근 화가는 서민의 일상적 모습을 그만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전후 한국사회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의 삶은 팍팍했습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구들이 쓰던 물건을 하나둘씩 맞바꾸던 이들은 어느새 도시에서 물건을 떼다 막막한 생계를 꾸려가는 <기름장수> 같은 장사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박수근의 작품 <기름장수> 여성은 뒷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박수근의 그림은 옆을 응시하는 측면상과 뒤만 보이는 후면상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박수근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가 몇이나 되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정면상을 담은 작품이라고 해도 눈을 아래로 깔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심리상태를 드러내지 않아 이들의 희로애락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연히 보이는 감정이 하나 있으니 바로 외로움입니다. 무표정한 이들을 둘러싼 텅 비고 울퉁불퉁한 공간이 외로움을 말해 줍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왔지만 휑한 공간에서 이들의 위치는 어정쩡할 뿐입니다. 그가 창조해낸 혹은 묘사해 낸 공간은 이들에게 상실과 결핍을 주었습니다.

 

앉아있는 여인, 1950, oil on canvas, 27.8 x 22cm
소금장수, 1956, oil on hardboard, 33 x 23.5cm

 

“왜 화가들은 우리 소재를 우리 식으로 그리려는 생각은 않고 혹은 외면하면서 서양풍으로만 그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이는 독학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한국의 대표화가 박수근 화백이 한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박수근 작품의 소재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터, 기름장수, 소금장수,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 실을 뽑는 여인, 시장 여인 같은 작품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작품만 반복되는 느낌은 저도 가지고 있는 비판적 시각인데요,

본인도 생전에 그런 지적을 듣기는 들은 모양이군요.

 

“그이는 물건을 사실 때면 큰 상점에서보다는 노상이나 손수레나 광주리장사에게서 사셨다.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기셨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늘 애처롭게 여겨 그분의 그림 소재가 모두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인지도 모르겠다.”

박수근의 아내 김복순의 말에서도 왜 그가 이런 작품들을 그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앉아있는 여인, 1963, oil on canvas, 65 x 53cm

 

위의 작품 3점은 모두 소금 파는 여인을 그린 것입니다. 50년대와 50년대 중후반과 60년대 초반에 제작된 것인데 보시면 차이가 느껴지나요? 1956년 <소금장수>와 1963년에 <앉아 있는 여인>의 차이점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물론 1950년대 초반 작춤과 1956년 작품도 차이가 있습니다. 1956년 작품이 세밀한 붓터치에서 좀 더 길게 뻗치는 느낌이 납니다.

 

1956년 <소금장수>와 1963년에 <앉아 있는 여인>표면 질감과 크기여인의 동작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 구성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진 부분, ‘박수근 마티에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화면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작품에 드러나는 느낌이 흙벽 같은 바탕이라면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딱딱한 화강암처럼 견고한 질감으로 변모해 있습니다. 즉, 1963년의 작품은 거친 화강암을 잘 다듬어 입자가 고와진 것처럼 표면질감이 한층 견고하면서 부드러워졌습니다. 결이 고운 채로 걸러낸 느낌이랄까, 뭐 그런 질감이요. 어떤 이는 이 1963년의 작품이 완성도와 세련미 측면에서 더 진보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안 볼 수도 있는데...

 

노상, 연도미상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노출되는 삐쭉삐쭉한 질감이

터프해보이긴 하지만, 더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박수근의 작품은 이 차이 말고는 초기나 말기 작품 모두 천편일률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독학 미술인의 한계일까요? 

 

노상의 여인들, 1962, oil on hardboard, 20.9 x 26.7cm[Seoul Auction(2012.3), 6.2억]

 

이 그림은 2012년 3월 20일 열린 서울옥션의 경매에서 6억 2000만 원에 거래된 작품입니다.

<노상의 연인들>은 가로 26.7cm, 세로 20.9cm의 공책(A4용지) 크기의 캔버스 안에 두 여인이 길가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 한국 여성 특유의 자애와 무던함, 그리고 애잔함이 녹아있는 박수근 작품 가운데 재질감의 표현이 절정에 달했던 1962년도 그림입니다.

 

노상, 1964, oil on hardboard, 20.7 x 29.4cm

 

 

여인들

 

 

절구질하는 여인, 1954 [detail]

 

그의 그림에는 아기 업은 엄마와 소녀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시절에는 엄마나 누이가 아이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입니다. 박수근에게 아이는 생명의 귀한 존재였고 미래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업은 소녀(1953)>나 <절구질하는 여인(1954)>에서는 엄마와 누이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1954, oil on canvas, 130 x 97cm

 

<절구질하는 여인>은 1954년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대형 화폭에 아기를 업은 여인이 절구질을 하는 포즈를 밀도 있게 형상화했습니다. 이미 1930년대부터 박수근은 절구질하는 여인을 즐겨 다루었습니다. 1936년 재 15회 선전에 입선한 수채화 <일하는 여인>과 1936년 제17회 선전에 입선한 <농가의 여인>도 절구질을 하는 여인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 앞서 1952년에 소품으로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도 아이를 업고 절구질을 하는 여인의 옆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1956, oil on canvas,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박수근은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등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는데, 특별히 <절구질하는 여인>을 많이 그린 이유는 우리 고유한 정서가 녹아 있는 향토적인 소재이자 사라져 가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절구질하는 여인, 1957, oil on canvas, 38 x 27cm
두 여인, 1960s, oil on hardboard, 27.7 x 21cm
쉬고 있는 여인, 1959
세 여인, 1960s, oil on wood, 21 x 46.4cm,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 컬렉션)
세 여인, 1960s, oil on canavas, 16.5 x 33.5cm
여인들, 1960s, oil on canvas, 16.5 x 33.5cm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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