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유럽

David Hockney(데이비드 호크니) / 1 - 자화상의 매니아

hittite22 2025. 4. 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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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ockney(1937~)

 

데이비드 호크니는?

 

 

1937년 영국 브랫포드(Bradford)에서 라와 케네스 호크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데이비드 호크니는 현재 생존해 있는 가장 유명한(그림이 비싸게 팔리는) 화가이자 20세기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던 데이비드 호크니는 40세 무렵부터 거의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공감각(Synesthesia)이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공감각이란 글자나 숫자에서 색채를 느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흑백으로 된 글씨를 보면 그냥 흑백으로 인지하지만, 공감각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 글씨에 색채가 있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능력이 화가라는 직업에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 재학 당시, 신인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단체 '영 컨템퍼레리스'(Young Contemporaries)를 통해 그의 작품이 전시되면서 영국 팝 아트는 존재를 알리게 됩니다. 그러나 호크니가 팝 아트의 흐름에 동참하였다고 하나 초창기 작품에는 인상주의 요소가 더 많이 드러나 있었고, 영국의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과 유사한 면이 많았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1961년 영국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방문한 미국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와 모험적인 사람들에게 매료되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됩니다.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작품에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64년 로스앤젤레스에 둥지를 튼 후 30여 년간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곳의 이국적 분위기에 영감을 받아 이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된 아크릴화 수영장 시리즈와 할리우드 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여러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데이비드 호크니 포토존(2019년)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도착했던 날, 호크니는 착륙하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푸른색 수영장이 여기저기 있는 도시 경관을 보고는 이렇게 담담히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기후 때문에 영국에서는 수영장이 럭셔리한데, 여기는 아닌가 보네.”

 

호크니가 물을 표현하기 위해 활용했던 소재들은 수영장과 샤워실, 스프링클러 등입니다. 이것들은 당시 남부 캘리포니아의 문화를 보여주는 오브제들이기도 한데요. 햇살 아래 반짝이던 캘리포니아의 모습은 우중충한 날씨가 유명한 영국 출신인 호크니의 작품을 더욱 밝고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두운 색감의 물감을 짙고 두텁게 칠한 호크니의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 변화가 더욱 눈에 띕니다. 작풍을 변화시킨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호크니의 성적 지향성을 밝고 경쾌하게,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호크니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순간과 영원함을 대비하곤 했습니다. 또한 굳어 있는 사물(건물들)과 그 순간 가장 역동적인 물줄기의 모습을 한 화면에 묘사하면서 그 차별성으로 드러나는 미적 표현에 집중했습니다. 단지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흥미로웠을 수도 있지만, 그의 작업 방식과 결과물은 빠르게 지나쳐가는 우리의 순간순간들도 결국 오랜 시간의 집약체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합니다.

 

호크니는 페인팅, 드로잉, 판화, 수채화, 사진 뿐 아니라 팩시밀리나 종이 펄프, 컴퓨터와 아이패드의 드로잉 프로그램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며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동성애 성향을 보인 것이나 이런 다양한 매체를 가지고 놀았던 것은 그의 성향이 새롭고 독특한 것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추론하게 해줍니다. 정물, 풍경, 친구들의 초상화나 애완견 등을 주로 많이 그렸지만, 한편으로는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나 영국 루이스의 글라인드본(Glyndebourne) 오페라 극장, 런던의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 등 무대 디자인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소위 '천재'라고 부르는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현상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다수의 사진을 붙여서 만든 작품이나 아이패드로 그린 작품은 너무 성급하게 작품제작에 반영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즉, 다양한 시도까진 좋은데 별 영양가 없는 실패작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사견일 뿐입니다. 

 

암튼, 어떤 새로운 작업을 하든 호크니는 늘 초상화 작업으로 돌아왔습니다. 1968년부터 이후 몇년 동안 호크니는 친구, 연인, 친척들을 모델로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한 등신대 초상화와 2인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호크니는 동일한 인물들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그의 가족과 고용인들은 물론 친구이자 조수였던 모 맥터모트(Mo McDermott)와 모리스 패인(Maurice Payne), 그의 작품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 and Percy)>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 셀리아 버트웰(Celia Birtwell, 1941~)과 오시 클라크(Ossie Clark, 1942~1996)도 자주 그렸습니다. 큐레이터 헨리 겔트잘러(Henry Geldzahler, 1935~

1994)나 아트 딜러 니콜라스 와일더(Nicholas Wilder)와 조지 로슨(George Lawson)의 그림도 많습니다. 그의 연인이자 발레리노였던 웨인 슬립(Wayne Sleep, 1948~), 그 기간 중 로맨틱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미국화가 피터 슬레진저(Peter Schlesinger), 큐레이터이자 오랜 친구였던 그레고리 에반스(Gregory Evans)도 호크니의 초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초상화보다 자신을 더 많이 그린 호크니는 자화상만 300점 이상 그렸습니다. 잘난 인물도 아닌데 엄청 그려댔군요.

 

1990년대에 호크니는 1999년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까지 3개월에 한번씩은 요크셔의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요크셔에서 2주 이상 머무르지 않았지만, 불치병에 걸린 그의 친구 조나단 실버(Jonathan Silver)가 요크셔의 풍경을 그려보라고 격려한 1997년 이후에는 좀 더 길게 머물렀습니다. 호크니는 처음에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렸지만 점점 더 오래 요크셔에 머물게 되면서, 2003년 경에는 요크셔 근교의 옥외에서 직접 유화와 수채화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이때 호크니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75마일 떨어진, 브리들링턴(Bridlington)이라는 해변 마을의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작업을 했습니다. 2005년 이후에 그가 그린 유화들을 보면, <한여름의 이스트 요크셔(Midsummer : East Yorkshire)>라는 수채화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그가 집중적으로 수채화 기법을 연구하고 훈련한 성과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20 x 50의 작은 캔버스를 여러 개 이어 붙인 모자이크식 대형 회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런 규모로 작품을 시각화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호크니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이용해 그날의 작업을 연구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2007년 6월에 대작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Bigger Trees Near Warter or/ou Peinture sur le Motif pour le Nouvel Age Post-Photographique)>가 왕립예술원의 여름 연례전에 걸렸습니다. 2006년 겨울에 5주간 옥외에 나가 50개의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린 작은 조각 페인팅을 이어서 붙인 작품이었습니다. 2019년 한국전시 때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호크니가 나고 자란 요크셔의 잡목림을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바라보고 있는 작품"인데 2008년에 호크니는 이것을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 기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이트에 뭔가를 준다면, 정말로 좋은 작품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 이 작품은 영국을 그린 것이라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에는 긴밀하게 일하던 조수가 약물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날 밤, 브리들링튼 집에서 호크니의 파트너와 23세의 젊은 조수 도미닉은 함께 약물 파티를 즐깁니다. 그러다 도미닉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청소용 강산성 세제를 마시게 됩니다. 이미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많은 약물을 흡입했던 도미닉은 병원으로 옮기자마자 사망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와 그의 파트너 등이 조사를 받았지만 파티를 벌이는 동안 자고 있었기에 호크니에겐 어떤 혐의도 없는 것으로 결론내려졌었고, 사건은 사고사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크게 충격받은 호크니는 브리들링튼 집을 처분하고 그 지역과의 인연도 완전히 끊어버립니다.

 

David Hockney, <Christopher without his glasses on>, 1984
Pablo Picasso, <Portrait of Emilie Marguerite Walter(known as Mémé)>, 1939 [Musée National Picasso-Paris]

 

공공연히 피카소나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밝히곤 했던 호크니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로 대가들의 스타일을 본뜬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위 그림 남성 초상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것이고 아래 여성 인물화가 피카소의 그림입니다.

 

이 작품의 변형은 피카소 작품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실제 피카소 작품인 '마리 테레즈의 어머니, 메메'는 그의 파트너 마리 테레즈의 어머니인 에밀리 마르그리트 발터를 그린 것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색채 대비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이 작품은 평범해 보이고 피카소 작품은 순수한 초현실주의처럼 보입니다. 색채는 두 작품 모두에 잘 어울리고, 명암 대비 또한 빛의 균형과 명암 모두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 작품의 목적은 관찰과 대조되는 피카소의 작품을 대중화하는 것입니다.

 

아래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패러디하여 그린 작품입니다.

 

Wheat Field Near Fridaythorpe, 2005

 

 

자화상

 

 

Self-Portrait, 1951
Self-Portrait, 1954, collage on newspaper, 41.9 x 29.8cm

 

호크니가 십대 시절(17세)에 만든 이 자화상은 신문지를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색종이 쪼가리를 오려 붙여 만든 것으로, 젊은 자신감과 강렬한 자기 탐구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정면을 향한 포즈와 옷 스타일링의 디테일에 대한 관심은 급성장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또한 그의 후기 작품, 특히 그의 다른 미디어 실험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Self-Portrait, 1954, lithograph in five colours, 26 x 29cm [The Bowes Museum]

 

언뜻 보면 또 다른 인물의 어린 시절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년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유명한 얼굴인 David Hockney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David Hockney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50여 년 전 화가가 17세였을 때 그린 이 자화상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2만 파운드(약 1000만원) 이상에 팔렸습니다.

 

Self-Portrait, 1954, oil on board, 46 x 36cm
Self-Portrait, 1955
Self-portrait, pencil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With Blue Guitar, 1977, Offset Lithograph.

 

예술가에게 자화상은 자신을 향한 관심과 고민의 표상입니다. 1977년, 마흔 즈음의 호크니는 이미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성공한 작가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는 데 강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고민이 많은 시기에 멘토를 찾듯 그는 선배 작가 피카소를 떠올렸습니다. 이미 1973년과 1974년에 피카소와 대면하고 있는 <화가와 모델>이라는 에칭 작품을 만들어 거장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작품 <푸른 기타를 그리고 있는 자화상>에서 푸른 기타는 피카소의 작품 세계에서 창작의 영감을 상징하는 모티브입니다. 조용히 책상에 앉아 푸른 기타를 따라 그리는 호크니는 ‘이제 어떤 작품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착실하게 찾아가고 있는 모범생처럼 보입니다.

 

Model with Unfinished Self-Portrait, Oil on Canvas, 152 × 152cm, 1977 [Private Collection]

 

데이비드 호크니가 1960~1970년대에 그린 초상화는 평소 친밀하게 지내는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특히 2인 초상화는 작품의 배경, 인물의 위치나 자세, 시선, 표정 등으로 심리적 관계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드러냅니다.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는 게이 커플이나 불안해 보이는 신혼부부를 그린 2인 초상에는 관계를 대변하는 결정적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델이 있는 미완성 자화상>은 다른 모습입니다. 앞쪽에는 파란 목욕 가운을 입은 남자가 햇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고, 뒤쪽엔 다른 남자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빨간 튤립 화병만이 연계성을 보여줄 뿐, 각기 다른 두 공간이 한 화면에 겹쳐져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이 ‘자화상’이니 책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호크니일 것입니다. 호크니의 동글동글한 얼굴형과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테, 그리고 차분한 헤어스타일을 보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작가 모습은 먼저 완성한 <푸른 기타를 그리고 있는 자화상>을 그대로 옮겨 온 것입니다. 자신의 앞선 작품에서 일부분을 차용한 셈입니다. 

 

호크니는 지적 호기심이 풍부하고 다재다능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미술관에 걸린 고전 초상화의 시각적 왜곡을 탐구해 책을 펴냈고, 카메라를 통한 실험에 몰두했으며, 말년에는 아이패드 그림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는 <난봉꾼의 행각>이나 <마술피리>등 오페라 무대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고, 회화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모델이 있는 미완성 자화상>에서는 모델이 누워 있는 곳을 연극 무대, 작가가 앉아 있는 곳을 연출자의 공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림의 하단은 유리 테이블 위 화병의 그림자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파란 커튼과 얇은 벽은 배경막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막 뒤 작가가 있는 곳은 묘사를 생략하고 추상화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전에 호크니가 그린 초상화는 모델의 이름이 작품 제목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모델은 단지 모델로만 불리며, 당시 호크니의 애인이던 그레고리 에번스(Gregory Evans)인지 옛 연인 피터 슐레진저(Peter Schlesinger)인지조차 애매합니다. 모델은 상대방이 편히 바라볼 수 있도록 다소곳하게 잠든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얼 하고 있을까요? 책상에 놓인 종이는 아직 백지 상태이며, 이는 미완성 자화상이라는 제목과 일치합니다.

Self Portrait, 1980, Lithograph on paper. 62.1 x 63.3 cm
Self Portrait, 1982, make-up on paper, 46 x 35.5 cm
Self Portrait 26th Sept. 1983
Self Portrait with Check Jacket, 1983
Self-Portrait on the Terrace, 1984, oil on canvas, in 2 parts, each 213.4 x 152.4 cm
Self Portrait, 1986, Home-made print in colors, 55.6 × 21 cm
Self Portrait, 1988
Self-Portrait, 1996, oil on cavas, 54.6 x 45.7 cm
Self-Portrait, London, 3rd June 1999
Self-Portrait, Baden-Baden, 10th June 1999
Self-Portrait with Red Braces, 2003, Watercolor on paper. 60.9 x 46cm [Private Collection]
True Mirror' Self-Portrait II, 2003, ink and watercolor on paper
Self-Portrait with Charlie, 2005, oil on canvas, 183 x 91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2005년 초 David Hockney는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몇 번에 걸쳐 일련의 전신 싱글 및 더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사진 참조나 준비 드로잉 없이 캔버스에 직접 작업했습니다. 그 중 하나인 이 자화상은 자신이 뉴욕에 기반을 둔 친구 큐레이터 찰리 샤이프스(Charlie Scheips)의 초상화 작업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Self-Portrait, 6 April 2012, Ink-jet printed iPad drawing, 40.6 x 30.5cm

 

경력의 후반부에 Hockney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복사기 및 팩스, 컴퓨터의 그래픽 소프트웨어, 그리고 2008년부터 Apple iPhone 및 iPad와 같은 그래픽 아트를 생성하는 새로운 기술의 잠재력을 실험했습니다. 그 때 그는 Brushes와 같은 다양한 앱을 발견하여 매우 광범위한 예술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화상, 풍경화, 정물화 등 수백 장의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David Hockney는 2012년에 Order of Merit에 임명되었고 4개월 후 Royal Collection의 Order of Merit 초상화 시리즈를 위해 iPad 그림(독특한 인쇄)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땐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 가치가 높아보이지도 않는 작업시도라 생각됩니다.

 

Self Portrait drawn on Apple iPad, 2012
Self portrait I, 13 March 2012, ipad drawing printed on paper, 94 x 71cm
Self Portrait III, drawn on Apple iPad, 2012, 94 x 71cm
Self Portrait drawn on Apple iPad, 2012
Self Portrait II, 14 March 2012, iPad drawing printed on paper, 94 x 7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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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ockney in Lucian Freud's studio in 2002.
Portrait of David Hockney by Lucian Freud(1922 - 2011), oil on canvas, 40.6 x 31.1 cm

 

2002년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2012년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열린 프로이트의 회고전에 전시되었습니다. 당시 프로이트는 80세, 호크니는 65세였습니다. 초상화는 호크니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작가는 관람객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입니다. 거장 앞에 모델로 앉는 화가의 입장? 혹은 심정은 어떠할까 급 궁금해지는군요..

 

두 예술가는 1962년, 프로이트가 명망있는 화가요 호크니가 학생이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해,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리는 전시를 앞둔 프로이트가 호크니 자화상을 그릴 때 데이비드는 4개월 동안 100시간 넘게 앉아 있었습니다. 호크니는 2011년, 프로이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헌정한 작품에서 "제가 앉아 있던 모든 시간이 작품에 겹겹이 쌓였습니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더했을 뿐, 거의 아무것도 빼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오랜 조수였던 데이비드 도슨은 2002년 몇 달간의 작품 활동을 기록했습니다. 호크니는 이후 프로이트와 도슨을 자신의 작품 소재로 삼았습니다. 같은 해 여름, 호크니는 스케치와 기억을 바탕으로 네 장의 종이에 조수와 함께 앉아 있는 영국 출신의 거장 프로이트의 두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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