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풍경화
<Death Mask of Abraham Lincoln>은 그의 대표적인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작품입니다.
역사적 인물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데드 마스크를 통하여 그의 죽음과 상징적 의미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링컨의 데드 마스크는 죽음의 물리적 증거인 동시에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형상으로, 와이어스는 이를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그의 죽음이 단순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국가의 상실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Andrew Wyeth는 1937년 뉴욕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뒤 브랜디와인계곡을 비롯하여 미국의 촌락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다룬 작품(인물화와 풍경화)으로 미국 지방주의(Regionalism) 그룹의 대표적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됩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대상의 성격과 체취, 영혼까지 느끼게 하는 놀라운 묘사력이 특징입니다.
<Public Sale(경매)>은 자동차 옆의 두 남자와 멀리 농장 건물 밖에 있는 군중을 보여줍니다. 농부의 아내가 죽은 후 농장의 강제 경매 상황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작은 오솔길조차 없는 마른 들판에는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소외감과 고독이 가득 묻어나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고독과 소외의 감정이 이곳에 빙의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호퍼는 도시민의 고독을 천착했다면 앤드류 와이어스는 시골에서의 쓸쓸함과 소외감성을 드러내 보입니다. 제 생각입니다.
신비한 밤의 풍경, 반짝이는 별, 이상하게 황홀한 인물이 등장하는 Wyeth의 으스스한 그림 <Night Hauling>은 한밤중에 랍스터 덫을 끌어올리는 밀렵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주제를 선택했고, 표현해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을텐데
와이어스는 이런 분위기와 모습을 재현하는데 즐거움이라도 느낀 것일까요?
문득 화가의 심리가 궁금해집니다.
칠면조 연못 가는 길에 등장하는 모델의 주인공은 그가 살던 동네(펜실베니아 메인코스트와 채즈포드)의 주민입니다. 앤드류 와이어스의 작품은 철저한 사실주의에 입각한 묘사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현실의 어두움과 절망 혹은 슬픔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와이어스는 에드워드 호퍼와 결이 다른 고독을 포착해 낸 미국적인 화가라 할 수 있습니다.
<Winter 1946>은 황량하고 우울한 언덕을 달리는 소년을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처럼 묘사한 작품입니다.
Wyeth에 따르면 그는 1946년 겨울 내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도 작업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은 아버지(N. C. Wyeth)가 기차에 치어 사망한 후 그린 첫 그림이었기 때문인듯합니다. Andrew Wyeth는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허공에 떠도는 그 손은 내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더듬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덕 뒤에는 Wyeth의 아버지가 사망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Wyeth는 자신이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지만
"그 언덕이 마침내 그의 초상화가 된것"
을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림 속 구도는 특별히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오랜 시간 완성하지 못하고 있던 와이어스는 어느 날 사고 현장 근처 언덕을 뛰어내리는 동네 소년 앨런 린치(Allan Lynch)를 봅니다. Wyeth는 이내 그와 함께 작품을 마무리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오래된 유모차를 발견하고 언덕 아래로 굴러갔습니다. 소년은 끔찍한 재난이 발생한 날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앤드류는 앨런을 그림에 추가했을 때 마침내 작업이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Wyeth의 풍경은 결코 색색의 폭동이 아니었지만, <Winter of 1946>은 절제되고 단조롭게 보입니다. 마른 풀이 돋은 진흙 투성이의 갈색 들판은 거의 화폭 전체 공간에 걸쳐 펼쳐져 있으며, 작은 흰색 눈 조각과 한 쌍의 고르지 않은 타이어 자국만 부서지듯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 같고 모든 감정이 마비되어 봄은 오지 않을 듯합니다. 달리는 소년의 모습조차 '겨울'의 압제적인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넣지 못합니다. Wyeth는 이 작품에 대하여 Allan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듯하고, 손이 마치 공중에 가늘게 떠 있는 혼란스럽고 상처받은 영혼을 형상화하는듯하여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소아마비로 장애가 있는 여성인 Christina Olson은 와이어스의 아내 친구였습니다. 크리스티나는 1969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삶의 대부분을 이 그림에 나오는 집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와이어스는 크리스티나의 폐쇄적 삶의 세계에서 모티브를 얻어, 인간이 원래 갖고 있는 고독과 그 고독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가려는 갈망, 그리고 두 개의 상반된 욕구가 빚어내는 현실적 불안감을 예사롭지 않은 서정성으로 풀어내었습니다. 그는 거의 이 그림 하나로 미국의 국민화가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서 몸을 약간 비튼 자세로 마른 풀밭에 앉아 있는 크리스티나 올슨은 멀리 언덕 꼭대기의 지평선에 걸쳐 있는 농가(자신의 집)의 낮은 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적에 잠겨있는 이 공간 속에 한줄기 바람이 메아리처럼 크리스티나와 집 사이에 교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훑은 바람은 들판을 거슬러 올라 집 안마당 빨랫줄에 널어 놓은 옷자락을 펄럭 스쳐 지나간 후 지평선으로 사라집니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집 밖에 없다는 현실의 한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을 바라보는 동시에 지평선 너머를 꿈꾸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가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한 생각은 그림 오른쪽 집 두 채 사이의 지평선을 향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바퀴 자국(아마도 역마차 수레 자국은 아닐는지)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와이어스의 이웃인 여성을 그린 이 장면은 와이어스가 재배치한 풍경으로 마법적 사실주의(Magic Real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법은 매우 사실적이며 정교하지만 그림은 사진과 같은 자연주의를 극복하고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작품 경향은 당시의 뉴욕화단의 추상 표현주의적인 미술과는 확연하게 달랐고 재료도 유화가 아닌 템페라로 독특하였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소녀의 모습은 물론 풍경, 집, 소녀의 팔 등 수없이 많은 그리고 다양한 에스키스를 했고 나중에는 이 모든 요소를 한 화폭에 멋지게 담아냈습니다.
"1948년 내가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지금 나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늘 알고 싶어 하는 전 세계의 애호가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앤드루 와이어스가 밝힌 이 일화는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림이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사람들은 그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내곤 했던 것입니다.
<바다에서 불어 오는 바람>은 앤드류 와이어스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주제는 창인데, 화가의 작품에서 아이콘으로의 반복, 은유로서 개인적이고 때로는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Wind from the Sea>는 메인(Maine) 해안에 살았던 Wyeth의 형제이자 친구인 Christina와 Alvaro Olson의 18세기 집에서 그렸습니다. Wyeth는 집 안의 버려진 3층 방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이 갑자기 얇은 커튼의 너덜너덜한 잔해를 살랑거렸을 때, 레이스 직물에 뜨개질을 한 새들이 순간적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포착한 장면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림은 음울하고 덧없는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기괴하기까지 합니다. Wyeth는 Christina Olson을 그렸던 것과 같은 종이에 빠르게 스케치했습니다. Wyeth는 인간 존재가 전혀 없는 작품 <Wind from the Sea>가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투명한 새는 유령 같은 존재이며 레이스 커튼이 그림의 왼쪽 하단으로 증발하는 방식을 연구하면 이것이 사실주의적이거나 순수하게 재현된 그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펄럭이는 커튼의 본체에 대한 Wyeth의 렌더링은 단순한 흰색 페인트 줄무늬로 분해됩니다. 그것은 낡아빠진 커튼의 표현이 아니라 닳은 커튼의 표현입니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1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로 와이어스의 아버지가 사망한 데 영감을 받았다고 지적합니다. 창문이 Wyeth 가족 묘지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Christina's World>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와이어스의 채드포드 집 근처에 위치한 농부 John McVey의 버려진 헛간 내부를 묘사한 것입니다. 야생 건초와 풍화된 서까래와 헛간 내부를 비추는 햇빛으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맥베스 갤러리(Macbeth Gallery)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이 그림은 빛과 분위기의 탁월한 처리,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풍부한 표현, 온도를 부여하는 태양이라는 매체의 능숙한 처리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서까래와 긴 썰매 그리고 덮혀있는 관 모양의 나무상자에서 볼 수 있는 우울함은 작품에서 놓칠 수 없는 Point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썰매와 상자는 그림에 숨겨진 내러티브를 암시합니다.
<McVey's Barn>을 포함한 그의 많은 작품들은 열린 공간이나 텅 빈 내부의 외로움을 표현합니다. 제가 벌써 여러번 되풀이하며 언급하는데 에드워드 호퍼가 현대 미국 도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을 화폭으로 담아낸 것과 묘하게 닮은 여운을 남기는 것이죠.
1950년, Andrew Wyeth는 펜실베니아 시골 상공을 나는 세 마리의 독수리 그림 <Soaring>을 완성했습니다. 그림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공포와 냉전의 만연한 긴장이 가져온 새로운 도덕성에 대한 것입니다.
놀라운 구도로 작업된 그림입니다.
신체의 윗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고 발만 그린 파격이 있습니다.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특이한 구도이지만 그림의 주인공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앤드류는 관객에게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고 권유하는 듯합니다.
초상화로서 Wyeth의 접근 방식은 관습을 피하는 것입니다.
작품 <April Wind> 속의 모델 얼굴은 가려져 있고 다리는 잘린 상태로 그렸습니다. 그의 펄럭이는 코트만이 생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돌무화과나무줄기와 아래에 있는 가지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작품 제목은 상징적이며 많은 질문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친구입니까? 아니면, 낯선 사람일까요?
작가는 주변 풍경에 대해 특이한 관점을 사용하여 그림의 신비로움을 더합니다. 빛, 희미한 구름과 하늘이 아래 언덕과 깔끔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수평선은 마치 언덕 위의 무한한 전망이나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것처럼 불가능할 정도로 정확하게 경계를 그리며 유형과 무형의 두 세계 사이를 맴도는 것처럼 보입니다.
<Roasted Chestnuts(구은 밤)>는 소년 Alan Messersmith(앨런 메서스미스)가 Pennsylvania에 있는 West Chester 근처의 202번 고속도로에 서 있는 것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Messersmith는 정기적으로 길가에서 밤을 팔던 이웃이었습니다.
진흙 속의 자동차 바퀴 흔적은 이 장소에 다른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나타냅니다. 트랙은 또한 강력한 구성 요소로서 캔버스 하단을 뷰어로 향해 열어놓는 동시에 상단에서 멀리까지 이어지는 궤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점점 길어지는 늦은 오후의 그림자는 홀로 손님을 기다리는 소년의 끈기를 보여줍니다. 낡아빠진 아미 재킷과 헐렁한 니트 모자는 추운 겨울날의 육체적인 불편함을 상징적으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Groundhog(그라운드호그)란 겨울내에 잠들었던 동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굴밖으로 나오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 미국의 입춘행사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열리는 행사로 다람쥣과 설치 동물인 그라운드 호그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2월 2일을 그라운드호그 데이라 칭하며 또 다른 말로는 성촉절이라고도 불립니다.
<Her Room>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세인트 조지 강(St. George River)과 함께 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태양 광선에 의해 조명된 Cushing의 집(Andrew와 Betsy Wyeth의..) 거실을 그린 것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뉴잉글랜드 가정의 고독을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멘트는, 에드워드 호퍼가 평생을 천착했던 현대인의 고독을 계승한 것은 아니라하더라도, 와이어스 자신이 고독과 쓸쓸함을 모티프로 삼아 작품활동을 즐겨 행하였음을 고백한 셈입니다..
두 형제가 죽은 후 여름에 만들어진 상징적인 초상화인 Alvaro는 바구니, 양동이 및 주변의 기타 생활 도구로 표현되고 Christina는 수년 동안 사용한 페인트인 파란색 문으로 표현됩니다.
<The Reefer>는 사전적 의미로 '조타수'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인물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물의 뒷모습을 통해 관람자가 인물의 시선과 감정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인물은 창문을 바라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차가운 겨울의 정취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관람자로 하여금 인물의 내면을 추측하게 만들며, 감정의 깊이를 더하는게 효과적입니다. 즉, 와이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동시에 관람자에게 감정의 여백을 남겨두어 각자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The Reefer>는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미술 시장에서 일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2012년 스키너 경매에서 이 작품이 약 $3,553에 낙찰된 바 있습니다.
<Flood Plain>은 펜실베니아 주 채즈 포드(Chadds Ford, Pennsylvania)에 있는 화가 가족 땅의 잔디와 얼음 조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경에는 오래된 건초 마차의 잔해와 함께 건초 더미가 있습니다. 두 개의 얼음 바퀴 트랙은 배경에 있는 제분소와 곡물 창고로 이어집니다.
작품 <Pentecost>에는 영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돛처럼 바람에 나부끼는 회색 뉴잉글랜드 날 두 개의 너덜너덜한 어망을 말리고 있습니다. Wyeth는 그물에서 감지한 영혼이 바다에 빠진 어린 소녀의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Pentecost>는 Wyeth의 아내 Betsy가 1979년에 구입한 Maine 해안에서 약 5마일 떨어진 어업 전초 기지였던 Allen Island에서 그렸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Wyeth의 작품 대부분에 제목을 붙인 Betsy가 그의 동의를 받아 만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섬의 원래 이름이 Pentecost Island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국 탐험가 George Weymouth가 1605년 Pentecost Sunday에 신대륙에 처음 상륙했을 때 부여한 이름이었습니다.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은 템페라 수채화로 드라이브러시(물감을 조금 칠한 브러시로 문질러 그림) 기법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입니다. 실제 작품이 걸려있는 미술관을 방문한다면 아마도 커다란 전시관 내에 나홀로 그림 앞에 서서 멍 때리기 안성맞춤인 작품인 듯합니다.
Wyeth의 가장 난해한 그림 <The Gap>은 소름 끼치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마치 봄 기운이 도달하여 무너져 내리는 얼음처럼 서리로 검게 변한 인간의 손이 보입니다.
겨울은 Wyeth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중 하나였습니다. 이 시기는 그의 우울한 감정을 살리기에 적합한 했습니다. 그 덕분에 여름 풍경도 앤드류는 겨울 풍경처럼 황량한 것으로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풍경의 뼈대 구조, 외로움, 죽은 느낌을 느끼는 계절로서 겨울과 가을을 선호합니다. 그 덮개 아래에 무언가가 숨어 있습니다. 전체 이야기가 표시되지 않습니다. "
<The Gap>에서 Wyeth는 모두 강물 속으로 사라졌고
갇힌 영혼의 상징처럼 강 표면에 그의 손만 남겨두었습니다.
Wyeth는 고전적인 의미의 자화상은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것인 경우 자신이 묘사한 대상에서 추상화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맹금류가 역시 흔적을 밝히지 않는 오리나 닭을 채고 날아 올랐던 것일까요? 그로 인하여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오리나 닭의 깃털이 공중에 흩어지는 형국처럼 보입니다. 마치 스냅사진 찍듯이 순간의 장면을 묘사해 낸 그림인 듯합니다.
저는 이 그림속에 등장하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 속에 남아있는 소아마비 소녀의 시선을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마음속 크리스티나는 2000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았던 것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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