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중남미

Joaquín Clausell(호아킨 클라우셀) / 2 - 스튜디오, 기타

hittite22 2025. 4. 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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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 이어서)

 

 

 

 

Joaquín Clausell(1866~1935)

 

 

 

 

호아킨 클라우셀은 누구인가? 2

 

호아킨 클라우셀은 1866년 멕시코 산프란시스코 데 캄페체에서 카탈루냐 출신의 상인 호세 클라우셀(José Clausell)과 캄페체 출신의 마르셀리나 프라코니스(Marcelina Franconis)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망으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돕기 위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불안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보였으며 이는 후일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16세에 그는 당시 캄페체 주지사였던 호아킨 바란다(Joaquín Baranda)와 공개 연설을 하며 대립하여 주에서 추방당합니다.(16세에 주지사와 대립? 우리 문화적 환경과 매우 달랐던 모양입니다) 암튼 그는 이로 인하여 멕시코 시티로 가서 설거지 알바를 하며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먼저 국립기술학교에서 공부했고, 마지막으로 법학대학원에서 공부하여 1892년 26세에 변호사 공부를 마쳤습니다. 졸업 후 재학 중 사고 쳐 감옥을 다녀온 내력으로 변호사 시험에 응시 못하게 되자 엘 데모크라타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도중에 기사사고로 다시 벨렌 교도소(Belem Prison)에 수감되었습니다.

 

재판 당일 도망친 그는 미국을 떠나 뉴올리언스, 뉴욕, 마지막으로 파리로 망명아닌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1896년, 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습니다. 그들처럼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을 하기까지 합니다.

 

1896년 말 멕시코로 복귀하여 마침내 전문 시험을 응시하지만 1901년까지 학위를 취득하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그는 1899년 멕시코 시티의 산미겔 아르칸헬 교구에서 앙겔라 세르반테스(Angela Cervantes)와 결혼합니다.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앙겔라의 아버지인 산티아고 데 칼리마야 백작의 궁전에 살았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집의 최상층에 그림 스튜디오를 마련해 줍니다.

 

그는 변호사로서의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었다가 친구인 헤라르도 무릴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권유로 1920년에서 1925년 사이에 그림 그리기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1935년 11월 28일 라구나스 데 셈포알라에서 산책하다가 산사태 사고로 질식사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습니다.

곡절로 점철된 한 멕시코 화가의 인생사였습니다.

 

 

 

인물화

 

Xochimilco D.F., México, 1915, Early 19th Century, Oil on Canvas, 43 × 28 cm

 

 

정물화(1편)

 

Jarrón con flores (Homenaje a Vincent Van Gogh)

 

 

The Tower of 1000 Windows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98년, 파리 망명에서 돌아온 직후 클라우셀은 산티아고 데 칼리마야 백작(호세 후안 세르반테스)의 딸인 안젤라 세르반테스와 결혼했습니다. 부부는 백작의 "궁전" 중 한 곳에서 거주하였는데, 당시 안젤라는 남편의 그림과 그의 보헤미안 사교계에 대응하기 위해 두 개의 다락방을 남편이 맞춤형 스튜디오로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클라우셀이 사망한 후 다른 목적으로 개조되었지만, 1960년대에 멕시코 시티 연방 지구 정부가 이전 궁전을 수용하여 멕시코 시티 박물관으로 바꿨습니다. 건축가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Pedro Ramírez Vázquez)가 복원한 박물관은 1964년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여전히 클라우셀의 벽화로 덮여 있는 4개의 스튜디오 벽은 박물관 영구 컬렉션의 중심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명소 중 하나입니다. 벽화에 The Tower of 1000 Windows라는 제목을 붙인 곳은 바로 박물관이었습니다.

Clausell은 수년에 걸쳐 스케치, 색상 테스트 및 인물 사진을 포함한 많은 이미지를 만들었으며 그가 제작한 이미지들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도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작업들은 무계획성으로 순간순간의 감정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관성도 없고 목적송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한 인간의 미술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특이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의 네 벽에는 이국적인 풍경도 있고 그가 인상파 스킬로 제작한 풍경화도 포함됩니다. 동물그림이나 여성 누드화, 젊은 초상화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인물화는 한 점도 없다시피 하는데 이곳에서 여러 점의 인물화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이미지와 아담과 이브의 상징적 표현 등의 종교화도 목격됩니다.

 

종합적으로 벽화를 장식하는 무질서한 이미지들은

호아킨 클라우셀의 무의식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The Tower of 1000 Windows, 1898~1935. Museo de la Ciudad

 

그의 스튜디오에 방문한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회화작품이라기보다는 예술가가 자신을 구성한 모든 인물과 관계망에 대하여 기록한 일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일기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사망하고 난 후, 개인의 기록(묘사)은 종료되고 하나의 작품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화가가 만지고 눈에 보이게 할 수 있는 표현 영역의 많은 측면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있습니다. 이미지는 차례로 나타나는데 서로 겹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흐릿해지기도 하고, 서로 섞여 사라지기도 합니다. 작은 그림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 그림 속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작품도 발견하고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그의 인물화도 만나게 됩니다.

 

바다 풍경, 산, 숲, 해변, 하늘을 발견하고 인간의 모습, 상징, 표지판으로 채워져 있는 낯선 요소들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분류될 수 없는 특이한 유산입니다.

 

멕시코 시티에 가보는 날이 오면 당근 찾아가서 직접 살펴보고 오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성경에 쓰여있는 말이 불현듯 떠오르네요.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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