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유럽

Toulouse Lautrec(툴루즈 로트렉) / 1 - 물랭루즈 명성의 산파

hittite22 2025. 4. 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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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루즈 로트렉을 아십니까?

한국의 톨루즈 로트렉이라 불렸던 손상기 화백을 소개할 때 잠깐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남부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소년시절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 후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던 19세기 후반의 인상파 화가입니다. 상징주의(Symbolists) 화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조해 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장애인 화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파리지앵들의 생활과 밤 문화를 생생하고 솔직하게 묘사한 톨루즈 로트렉의 그림들은

지금도 당대를 대표하는 창작의 한 유형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톨루즈 로트렉은 누구인가?

1864년 11월, 툴루즈-로트렉은 프랑스 남부 알비(Albi)에서 귀족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15살인 1878년, 의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진 후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뼈가 잘 부러지는 희귀병(osteogenesis imperfecta)으로 1년 뒤에는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져 영구 발육부전(發育不全)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왜소한 키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이런 운명적 재앙은 그의 유년기 사고보다는 귀족 가문의 사촌이었던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근친결혼에서 비롯된 유전적 요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는 편입니다.

 

로트렉은 아마추어 데생 작가였던 아버지와 삼촌들을 따라 일찍부터 그림을 익혔으며, 그가 선호했던 주인공은 사냥과 말, 주변 인물인 가족들이었습니다. 1868년에 그의 부모가 이혼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취미로써 화려한 장비를 갖춘 운동 애호가이자 사냥꾼이었는데, 아버지 친구이자 화가였던 프린스토(Rene Princeteau)에게 미술 교육을 받습니다. 1880년까지 기법과 화풍이 다양한 창작품을 생산하였으며, 1881년 바칼로레아(대학합격 자격시험)에 합격한 툴루즈-로트렉은 1882년, 훗날 파리예술학교(Paris Academy of Art)의 교수가 된 보나(Leon Bonnat, 1833-1922)의 화실에 들어가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이후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의 화실로 옮긴 뒤, 그곳에서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1868-1941)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등을 사귀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1890년까지 주로 인상파(Impressionism)의 영향을 받은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1883년 하류 계급의 삶에 빠져 살며 풍경화에는 무관심했던 로트렉은 도시 생활과 공연, 창녀촌을 주요 테마로 삼기 시작합니다. 1884년에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거리 몽마르뜨르(Montmartre)에 정착하여 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 1834-1917)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분할하고 주제의 중심을 이동시키며, 주변적인 상황을 연상하게 만드는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로트렉의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하여 1887년부터 각종 전시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1888년과 1890년, 툴루즈-로트렉은 '브뤼셀 살롱(Brussels Salon, 브뤼셀 미술전)'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받아 자신의 창작품들을 전시하게 됩니다. 1889년에는 '앙데팡당전(Salon des Independants, 독립전)'에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 반 고흐, 루소(Pierre Etienne Theodore Rousseau, 1812-1867)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종종 전시회로 기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툴루즈-로트렉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1년 파리 몽마르트에 붙여진 '무랭루즈(Moulin Rouge)'의 홍보 포스터였습니다. 신체적 결함으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굴곡진 인생여정을 통과해 나가던 당시 로트렉에게 있어서 카바레(공연장) '물랭루주'의 배경과 연예인들은 작품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1891년에는 첫 판화를 창작하였고, 1893년에는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면서 1896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894-7년 사이에 로트렉은 유럽 타국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 때 런던과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톨레도(Toledo), 벨기에 브뤼셀, 네덜란드의 할렘(Haarlem)과 암스테르담 등을 돌며 고야, 렘브란트, 브뤼헐(Jan the Elder Brueghel)의 작품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대 화가였던 고갱, 고흐 등과 교류하며 함께 전시회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897년의 휴가 여행 도중에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킵니다. 오~ 이런... 결국 1899년에는 알코올 중독과 불규칙하고 문란한 사생활로 인하여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릅니다. 로트렉은 반 고흐처럼 폐쇄된 병동에서도 작업을 지속하였으며, 1901년 9월, 37세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고흐와 같은 나이인가요? 고흐와 같은 정신병원 신세를 졌고.. 

제가 로트렉을 언제부터 선명하게 기억하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즉 그의 이름을 알기 전에 저는 아마도 그의 작품을 미술책이나 기타 자료 혹은 매체를 통해 접했을 것입니다. 아마 한국인들에게는 영화로 먼저 알려졌지 않는가 싶습니다.

 

2001년에 상영되었던 "물랭루즈(Moulin Rouge)"라는 영화에 등장했을 겁니다.

물랭루즈는 19세기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파리에 실존하는 공연장의 이름이며, '붉은 풍차'를 뜻하는 물랭루즈는 영화의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화 '물랭루즈'는 성공을 꿈꾸는 아름다운 뮤지컬 가수이자 창녀인 샤틴(Nicole Kidman, 니콜 키드먼의 역할)과 그녀에게 매료된 젊고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Ewan McGregor, 이완 맥그리거의 역할)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툴루즈-로트렉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예술가로 잠깐 등장하지만, 이는 당시 로트렉과 물랭루즈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였음을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낭만과 사랑, 마약, 매춘 등 환락 산업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던 곳입니다. 현재 물랭루즈가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된 데에는,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리,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로트렉의 공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작품

 

 

위 사진은 로트렉이 그린 물랑루즈 포스터의 하나이자 그를 소개하는 책 표지이기도 합니다.

책이 비쌉니다. 영어 원서이고 인터넷 해외주문으로 4만 원이 조금 넘네요.

112페이지로 두껍지는 않습니다. 

 

 

툴루즈-로트렉은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유화작품으로 남긴 자화상은 이 <거울 앞의 자화상>이 유일한 사례일 것입니다. 유화 외에는 아이러니와 허세 섞인 소수의 풍자화를 남긴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 유일한 자화상에서 조차 그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자화상을 그리기 꺼린 이유인듯합니다. 왜냐하면 유럽 화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자화상 그리기'인데 로트렉만 그것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Artist's Mother, 1883, oil on canvas, 94.0 x 81.0 cm

 

로트렉의 어머니, 아델-조에-마리-마르케트 타피에 드 셀레이랑 백작부인(Countess Adèle-Zoë-Marie-Marquette Tapié de Céleyran, 1841-1930)은 오드(Aude) 지방의 오래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툴루즈-로트렉과 셀레이랑이라는 두 가문은 18세기부터 서로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델은 사촌인 알퐁스-샤를-마리 드 툴루즈-로트렉-몽파(Alphonse-Charles-Marie de Toulouse-Lautrec-Monfa) 백작과 결혼했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낳은 후 부부는 헤어졌고, 아델은 이혼한 후 초상화가 그려진 말로메 성(Malromé Château)에서 살았습니다.

 

The Dancer in her Dressing Room, 1885, Private Collection

 

<분장실의 댄서>는 1885년에 제작된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의 유명한 작품으로 후기 인상주의의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그림입니다. 툴루즈-로트렉의 작품은 19세기 파리의 활기차며 한편으로는 추잡한 나이트라이프, 특히 댄스홀과 카바레에 대한 통찰력 있는 엿보기를 제공합니다. 이 작품은 댄서의 분장실에서의 솔직한 순간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우아함을 지닌 댄서로, 그녀의 복장은 그녀가 공연을 준비 중이거나 공연 후 휴식을 취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녀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 중에 모자를 쓴 남자가 있는데, 그는 관찰자이거나 후원자인 듯 보이며, 그의 관심은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표현과 제스처는 모호하게 마무리되어 시청자가 툴루즈-로트렉의 붓으로 포착한 순간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Ballet Dancers, 1885~1886, Oil on plaster, transferred to canvas, 153.5 × 152.5 cm
Ballet scene, 1886, oil on canvas, 102 x 152 cm [Thiel Gallery]
a portrait of the Emile Bernard.1885, Oil paint on canvas, 54 x 44.5 cm [National Gallery]

 

에밀 베르나르는 예술적 대담함으로 명성을 얻은 툴루즈-로트렉의 동료였습니다. 그는 1885년 파리에 있는 코르몽의 아틀리에(Cormon's atelier)에 들어갔지만 1886년 봄에 퇴학당했습니다. 베르나르는 이 초상화를 위해 20번이나 앉았는데, 로트렉은 그를 급진적인 예술가라기보다는 젊은 부르주아로 묘사했습니다.

 

아마도 로트렉이 몽마르트르의 뤼 콜랭쿠르(rue Caulaincourt)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로 이사한 1886년에 그린 것 같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편리하고 자유로운 주제를 표현하도록 서로를 위해 앉는 것은 일반적이었습니다. 베르나르는 후에 고갱과 함께 평면주의 화풍을 개척한 인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미술적 재능에서 고갱에서 딸렸음인지 평면주의는 그가 처음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사람들은 고갱의 업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Jeanne Wenz, 1886, oil on canvas, 80.7 × 59.5 cm

 

툴루즈-로트렉은 미술 학생시절인 22세에 이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는 분홍색과 녹색을 강조한 미묘한 채색을 사용하여 모델 잔 웬츠의 전신을 묘사하였습니다. 이는 르네상스 초상화에서 발견되는 구성적 기법입니다. 웬츠는 화가 페르낭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툴루즈-로트렉의 동료 학생이었던 프레데릭 웬츠(Frederic Wenz)의 여주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예술가이자 툴루즈-로트렉의 모델이 된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오, 수잔 발라동과 연결된 인물이었군요..

 

 

카르멘 고댕(Carmen Gaudin)

 

The Laundress(세탁부), 1886, oil on canvas, 93 x 75 cm, Private Collection

 

작품 <섹탁부>는 19세기에 하층 계급이 겪어야 했던 거친 삶과 노동 조건을 보여줍니다. 비록 이 작품이 엄청난 문화적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까지도 유럽 노동계급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La Blanchisseuse>는 Henri de Toulouse-Lautrec의 1886년 작품으로 200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24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La Blanchisseuse의 모델은 Carmen Gaudin이 포즈를 취했습니다.

 

카르멘 고댕은 몽마르트 출신의 노동자였습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은 로트렉의 관심을 즉시 끌었는데, 그는 평생 붉은 머리 여성을 존경했다고 전해집니다. 로트렉 회고록을 출판한 프랑수아 고지(François Gauzi)는 로트렉과 라슈(Rachou)가 그 젊은 여성을 처음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 단순하게 노동자처럼 차려입은 어린 소녀, 하지만 구리색 머리카락 때문에 로트렉은 멈춰 서서 열광적으로 외쳤다: – 그녀는 멋지다! 정말 살찐 것 같아요! 그를 모델로 삼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1884년, 로트렉의 요청에 따라 앙리 라슈(Henri Rachou)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로트렉과 함께 사용하던 가네롱 가의 스튜디오로 데려왔습니다. 라슈는 나중에 툴루즈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임명되었습니다. 로트렉은 이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최소한 5점의 유화 초상화와 수많은 드로잉을 제작했습니다.

 

"A Montrouge"–Rosa La Rouge, 1886–1887. Oil on canvas, 72.1 x 48.6 cm

 

툴루즈 로트렉은 화려한 파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 모델 카르멘 고댕(Carmen Gaudin)은 카바레 공연자 Aristide Bruant의 노래로 대중화된 초라하고 살인적인 캐릭터인 매춘부 Rosa La Rouge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한때 파리 몽마르트르 인근에 있는 브루앙의 나이트클럽 르 미리톤(Le Mirliton)에 걸려 있었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카르멘을 그립니다. 튀어나온 턱이 그녀의 늠름한 성격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Red headed woman in the garden of Monsieur Foret, 1887, 71.4 x 58.1 cm [Norton Simon Museum]


이 그림은 툴루즈-로트렉이 1887년 여름 친구의 정원에서 야외에서 그린 작은 그림 모음 중 하나입니다. 그해 7월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는 "하늘이 불안정해서 우리에게 무관심을 뿌립니다. 이는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야외 그림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여줍니다."라고 불평했습니다. 오~ 이 화가님께서 작품제작에 협조 안해준다고 위에 계신 그분에게 툴툴거렸군요.

 

그렇게 제작된 이 작품에서 툴루즈-로트렉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인 카르멘 고댕의 특징을 잘 포착해 낸 듯합니다. 그녀의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과 창백하고 날카로운 특징은 1880년대 후반의 그의 그림에서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La Rousse in a White Blouse, 1889, Oil on canvas, 60.5 x 50.3 cm [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은 인상파 화가 그룹에 속하는 아티스트입니다. 그는 19세기 후반 파리의 삶을 가장 잘 포착한 화가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화류계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라고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몽마르트르의 변두리 보헤미안적 분위기가 끊임없는 레퍼토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단순히 일화의 연대기로 보지 말고 시대를 초월한 가치에 대한 탐구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마드리드의 티센-보르네미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흰 블라우스를 입은 라 루스>에서 로트렉은 자신이 1884년 클리시 거리(avenue Clichy)에서 발견하여 매료된 노동자 출신의 소녀 카르멘 고댕(Carmen Gaudin)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무력하고 우울한 모습을 강조하는 하얀 피부는 그가 묘사하고 싶어했던 유형의 젊은 여성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로트렉의 여러 작품에서 모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결함 때문인지 인상파의 야외 그림을 피했던 로트렉은 앙리 라슈(Henri Rachou)와 함께 rue Ganneron에서 공유한 스튜디오에서 이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스튜디오 배경은 눈에 띄지 않고 모든 관심은 모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모델은 단순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뿐이지만 구성에서 전달되는 우울한 분위기는 이 작품을 걸작의 반열로 올려놓았습니다. 섬세한 터치와 자연스러운 붓놀림은 인상주의에서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Young woman with red hair, 1889

 

로트렉은 툴루즈 백작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유전적 요인으로 인하여 상체는 어른이지만 다리는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그림 그리는 데 관심이 있었고 재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아이들의 놀이에 참여할 수 없었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는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수습 기간 동안 그는 자신만의 기법과 예술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파리에서 열린 에드가 드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두아르 마네의 전시회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루이 앙케탱, 에밀 베르나르, 빈센트 반 고흐와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장애는 그를 알코올 중독으로 몰고 갔고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았습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중간 세계와 매음굴에서 찍은 초상화입니다. 페르 포레 씨의 정원에서 만들어진 위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젊은 여인은 그의 최애모델 카르멘 고댕입니다.

 

그는 후기인상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파리의 연극단인 물랭루즈(moulin rouge)의 포스터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몽마르트르 연예인은 유명인이 되었고 광고용 평판 인쇄 매체가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는 36년에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죽었습니다.

 

Vincent Van Gogh in a Paris café drawn, 1887, 54 x 45 cm [Van Gogh Museum]

 

이 작품은 고흐와 로트렉이 신뢰와 우정을 나누며 자신들의 작품에 열의를 보일 때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로트렉의 나이 22세 되던 1886년 가을 무렵 이들의 우정이 생성되어 4년 후 브뤼셀에서 2인 전을 갖기도 하였지만 그들 사이의 우정은 시간적으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6년 3월 파리에 도착해 곧 코르몽의 화실로 찾아갔으나 그해 가을까지는 로트렉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가 로트렉을 만나게 된 뒤부터 1888년 2월 아를로 갈 때까지 두 사람은 절친으로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7년 말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이 초상화는 파리의 바 or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한 고흐의 개성 있는 옆얼굴을, 파스텔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까칠까칠하고 긴장된 표정을 일련의 사선으로 그린 수법에 관심을 가진 빈센트 반 고흐가 아우 테오 반 고흐에게 사도록 권유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Waiting At Grenelle, 1887, oil on canvas

 

한 여성이 압생트 한 잔과 함께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언뜻 보면 카페에서 기다리는 것 같지만, 벽에 기대어 있는 캔버스는 이 장면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연출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인물의 특징을 숨기고 굽은 어깨와 우울한 시선을 강조하는 특이한 시점을 선택했습니다. 흐르는 물감의 물감과 눈에 보이는 목탄 밑그림이 이미지의 매력을 더하여 침울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강조합니다.

 

The redhead in a white blouse, 1888, oil on canvas

 

Riders on the Way to the Bois Du Bolougne, 1888, 62 x 43 cm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Portrait de Suzanne Valadon, 1885
At the Cirque Fernando, The Ringmaster, 1888, oil on canvas

 

1880년 초 페르난도 서커스장에 구경갔던 로트렉은 서커스의 매력에 빠지게 됩니다. 서커스장은 당시 인상파 화가와 삽화가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페르난도 서커스장의 여자 곡마사>는 로트렉이 그린 최초의 야심적인 대형 작품이었습니다. 말 등 위에 앉아 있는 여자 곡마사의 모델은 쉬잔 발라동이었습니다.

작품을 본 벨기에의 화가 테오 반 리셀베르는 "이 작은 난쟁이는 결코 형편없다고 할 수 없다. …… 한 번도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것들을 그린다. 페르난도 서커스장, 창녀 및 기타 등등."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물랑루즈의 창시자인 조제프 올레는 로트렉의 서커스 연작 시초가 된 이 작품을 구입하여 복도에 걸어 두었습니다. 로트렉은 완벽함을 좋아했는데 특히 육체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그의 열정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이는 신체적 핸디캡을 안고 있었던 자신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The Morning After, 1889, Oil and black chalk on canvas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몽마르트르의 변두리에 있는 술집의 한구석에 압상트 병과 글라스를 앞에 놓고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팔을 턱에 괸 채 생각에 잠긴 표정을 담았습니다. 나중에 파리에 처음으로 나온 피카소는 로트렉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이런 경향의 그림에 감명과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오래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짧은 시간에 간결하게 그린 듯 색감의 여운이 엷은 감을 주며 구도적으로는 2년 전에 그렸던 <고흐의 초상>과 흡사합니다. 졸라의 '목로주점'과 '니나'등으로 대표되던, 당시의 자연주의 문학과 상통하는 시대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Woman with an Umbrella, 1889
Ball at the Moulin de la Galette, 1889, Oil on canvas, 101 x 89 cm

 

춤추는 무희와 그 무희의 모습에 빠져 있는 신사의 모습을 답은 작품입니다. 물랭무즈에 명성을 배앗기기 전 물랑 드 라 갈레트는 파리장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무도장이었습니다. 그림 소재를 찾던 화가들도 자주 찾았던 명소였습니다.

 

At the Moulin Rouge- The Dance, 1890, oil on canvas
Lady with a Dog, 1891
Portrait of Honorine Platzer, 1891
Justine Dieuhl, 1891
Woman Combing her Hair, 1891, Oil on cardboard, 43 x 30 cm. d'Orsay, Paris
La Goulue at the Moulin Rouge, 1891, Oil on cardboard, 79.4 x 59 cm

 

이 그림은 라 몸 프로마주와 여동생의 팔짱을 끼고 물랭루즈로 들어서는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본명이 루이즈 베버인 라 굴뤼는 독프 접경지역인 알사스 출신으로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세탁부 생활과 페르난도 서커스 단원 생활을 했던 인물입니다. 라 굴뤼는 갈레트에서 르누아르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캉캉춤에 기원을 두고 있는 '자연주의 카드리유'라는 독특한 춤을 유행시켰습니다. 다리를 머리 위에 두는 춤인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다리를 최대한 벌리면서 끝을 맺는 춤입니다. 로트렉은 라 굴뤼가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8년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라고 속삭이던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로트렉은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여러 점 그렸으며 그중 다수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At the Moulin Rouge : The Two Waltzers, 1892, Oil on cardboard, 93 x 80 cm
Jane Avril Leaving the Moulin Rouge, 1892, Oil on cardboard, 55 x 86 cm
Corner Of Moulin De La Galette, 1892, oil on cardboard on wood, 100.5 x 89 cm

 

이 그림에서 로트렉은 물랭 루즈보다 덜 유명한 몇몇 뮤직홀이나 카바레의 대기장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물랭 드 라 칼레트를 그린 것이라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화면에는 무희와 매춘부들이 손님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사이를 서성거리고 있으며 길고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중산모를 쓴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로트렉은 평소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기보다 몇몇 인물들에게만 집중하고 있는데 제각기 다른 유형의 세 여인들 간의 대조를 테마로 삼은 듯합니다.​

로트렉은 인물들을 아래부터 위로 올려다보면서 배경을 차단하여, 공간의 문제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전경에 앉은 여인의 침울하면서도 몽상적인 표정으로 인해 로트렉의 다른 그림에 비해 슬픈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 한편으로는 드가의 <압생트 L'Absinthe>나 마네의<서양자두 La Prune>(1877년)를 연상시킵니다. 

At the Moulin Rouge, 1892, Oil on canvas, 141 x 123 cm

 

물랭 루즈는 1889년 10월 5일에 개장했는데, 이 날은 파리의 벨 에포크(황금기) 중 가장 중요한 날의 하나로 기록됩니다. 흥행주이자 기업가인 샤를 지들러가 소박한 대중무도장인 렌블랑슈 자리에 거대한 종합 유흥지를 건설한 것입니다. 넓은 댄스 플로어에서 당시 인기댄서들을 볼 수 있었으며 갖가지 독특한 공연으로 유럽 전역의 청중을 끌어들였고 로트렉 역시 이 유희의 공간을 즐겨 찾게 되었습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왼쪽 끝의 붉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비평가 에두 아르 뒤자르댕이고 그 오른쪽에 있는 여인이 스페인의 댄서 라마카로나입니다. 그 옆에 사진작가인 세스코, 이어서 로트렉의 친구인 모리스 기베르의 모습이 보입니다. 뒤쪽에 붉은 머리를 손질하며 뒤돌아서 있는 여인이 라 굴뤼입니다. 라 굴뤼 왼쪽에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로트렉과 그의 사촌동생 타비에드 셀레이랑 입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인물은 '녹색과 황색의 칸델라'라는 평을 받는 넬 양의 얼굴입니다. 가면처럼 보이는 것은 특수한 조명효과 때문입니다.

 

In bed, 1892, Thinned oil on cardboard
In Bed: The Kiss, 1892
The Bed (Le lit), 1893, oil on canvas
Portrait of Monsieur Boileau, 1893, oil on cardboard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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