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데 선사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산재해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립니다.
그 중에서도 전등사는 강화 관광에서 찾아볼만 곳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유명 사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사찰이라면 그걸로 반드시 둘러보아야할 절간으로 낙점되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요? 저로 말하자면, 기독교 세례교인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불교 사찰 둘러보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은 과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로서의 사찰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가 살아온 역사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전등사는 찾아보는데 의의가 있는 장소입니다. 신앙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강화도 여행지
강화도는 육지와 거의 붙어있는 섬이나 다름없어 섬이라기보다는 육지라는 생각이 더 익숙합니다. 또한 강화도 뿐 아니라 대모도나 석모도까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육지처럼 드나들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석모도와 교동도까지 여행이 가능한 셈이니 시간을 내어 석모도 보문사도 불러 보면 좋을 것입니다.
가시는 길
강화도로 들어가는 다리가 2개가 있는데
저는 김포골드라인 구래역에서 하차하여 70번 버스를 타고 초지대교를 건너 전등사까지 진입하였습니다.
남문으로 입장하는 것이 편합니다.
남문 입구에는 주자창이 구비되어 있으니 차량이용 시에도 이쪽이 접근성 측면에서 좋습니다.
전등사 개요
전등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로, 산이 솥발(鼎足)처럼 세 방향으로 뻗어 있는 정족산(鼎足山)하고도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삼랑산성(三郞山城)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삼랑산성은 넓이 24만 6000㎡, 둘레 약 1km 남짓한, 성으로 치면 아담한 산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 아도 화상이 진종사(眞宗寺)로 창건했으며 병인양요 때 조선왕조실록을 지켜 낸 사찰로 유명한 곳입니다. 마니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나가다가 온수리에서 다시 만나 세 봉우리를 이루는데, 이것이 정족산이고 이 안에 있는 산성이 정족산성입니다. 정족산(鼎足山)은 세 봉우리의 생김새가 다리가 셋 달린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편 전등(傳燈)은 ‘등을 전한다’는 뜻으로, 밤의 어둠을 밝히는 옥등과 세속의 무명을 밝히는 대장경인 법등(法燈)을 말합니다.
남문
전등사의 일주문 격인 남문으로 들어가면 종해루(宗海樓)라는 이름의 성루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종해(宗海)’란 모든 강물이 바다에 들어와 한맛을 내듯 불교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문의 성루에는 대몽 혹은 대프랑스 전쟁 시 사용했을 법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종해루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산성 길을 따라가면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아름다운 바다 풍광을 바라볼 수 있는 산등성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남문에서 산위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걸러가면 동문으로 이어진다. 동문에서 다시 성 내부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전등사와 사고(史庫)를 지킨 ‘순무천총 양헌수 승전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는 관람객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남문은 삼랑성(정족산성)의 성문에 해당되는데 지금은 전등사의 출입문으로 인식하게 된 모양새입니다. 왜냐하면 전등사로 들어가는 별도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등사로 올라가서 아랫쪽을 내려다보면 남문에서 이어지는 저 길을 조망할 수 있는데 그 경치가 압권입니다. 일단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종루와 함께 전등사란 편액이 걸려있는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전등사 대조루
‘傳燈寺(전등사)’ 편액이 걸린 대조루는 고려 충렬왕 때 정화궁주가 대장경과 옥등(玉燈)을 시주한 이후 전등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전등’이라는 말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의 정법안장이 스님에게 전해지는 방식을 등불에 비유한 말입니다. 지혜의 등불을 계승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선 전도자들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였는데 불교에서는 등이 그 역할을 한 모양입니다.
건물 앞쪽에 전등사라는 편액 걸려있고 대신 뒤편엔 대조루(對潮樓)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여기서 ‘대조’는 부처님이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대중을 교화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용어입니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조루는 의식을 행하는 의례 공간으로 대웅보전의 시야를 가리지 않아 앞마당이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줍니다.
대웅보전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 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입니다.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웅보전에 근접하면 높이때문에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습니다.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조각상은 벌거벗은 여인이라 나부상(裸婦像)으로 불리우지만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것은 한글 대장경 <육도집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전생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원숭이 500마리를 거느린 원숭이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 전설에 착안하여 석가모니에 대한 원숭이들의 끝없는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네 마리 원숭이상이 처마를 받들어 지붕을 들고 있게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오~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는 처음 접합니다.
원숭이 왕이라, 손오공도 그런 연결 끈에서 비롯된 이야기일수도 있겠네요...
암튼,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더욱 흥미를 끄는 내용은 3곳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만 한 손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표현방식이라 하겠습니다. 추녀의 네 모서리 부분은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불교신자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는 금을 입힌 불상을 보면 오히려 천박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인식의 기저에는 불상 조각의 천편일률적으로 표현력 떨어지는 조각품질도 한몫할 것입니다. 제가 존재의 등급 중 하급에 속하는 '심미적 실존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실력 떨어지는 만화가가 그린 듯한 불상의 모습에 비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부처에 대한 호감도 역시 희박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왜 불교는 음악과 미술을 이용하여 포교하는 테크닉에서 기독교 보다 한 수 아래인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이라고 알려진 존재는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千手千眼)으로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고 들으시는 보살님(觀世音菩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의 벽화에 등장하는 존재는 보살의 얼굴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의미로 그려진 걸까요?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은 광해군 6년(1614)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려 광해군 13년(1621)에 새로 지은 전각입니다. 지붕 끝 수막새에 도자기 연꽃 봉오리를 꽂아두어 수막새의 흘러내림을 막고 지붕 끝을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 약사불과 아미타불 ‘목조석가여래 삼불 좌상(보물 1785호)을 모셨습니다.
좌우 사자상 위에 커다란 거울이 있는데 이는 망자의 죄업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장치로 '업경대' 혹은 '업경륜'이라 불립니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 사자와 청색 사자 1쌍으로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는 형상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높이 107cm, 길이 65cm로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 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 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 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상호 비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대웅전 내부 중앙 천장에서 내려온 청동 등잔 받침은 옥등으로 불을 밝힌 정화 궁주의 등 공양을 상기시켜주는 유물입니다. 전등사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소재라고 할 수 있겠네요.
대웅전 내부 건축물은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형상불 머리 위 보개(寶蓋)는 처마가 날아갈 듯 높이 올라가 화려하고, 무칠린다 용왕과 허주에서 내려온 두 마리 용은 눈알을 부라리며 부처님을 외호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 봉황과 충량의 두 마리 용은 여의주를 부처님께 바치는 모습입니다.
아, 용 혓바닥 위에 동그란 것이 조각되어있는데 그게 여의주인 모양입니다.
부처상 뒤에 걸려있는 그림은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江華 傳燈寺 大雄殿 後佛幀)'으로 일제강점기인 1916년 고산 축연 스님이 제작한 것이라 합니다. 310 x 260 cm의 대형 사이즈를 자랑합니다. 2002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불화는 가로로 긴 화면의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그리고 그 양쪽에는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그린 삼세불도입니다. 앞에 있는 불상과 같은 부처들 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보개 주변, 공포나 종량 위에서 새들은 아름다운 꽃을 물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개를 펼친 새, 날개를 접은 새, 꽃을 바친 후 날개를 다듬고 있는 새 등 대웅전 천장에는 새들의 공양으로 시끌벅적한 풍경입니다.
대웅보전 내부의 기둥과 창방,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창호 따위의 아래위에 가로놓여 벽을 지탱해 주는 나무), 문설주, 닫집의 얇은 기둥, 판문 등을 보면 곳곳에 낙서처럼 먹물로 쓴 이름들이 빽빽한 것이 보입니다. 이것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병사들의 이름입니다. 전투 투입 전 법당에서 공양을 드리며 승리하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필체가 많은 것은 이름을 적을 수 없는 병사들 대신에 써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찰에서는 이들의 호국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이름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오~ 잘하는 겁니다. 잘한 거예요..
강설당과 주변
강설당은 1932년에 건립된 대웅전 우측에 위치한 전각입니다.
현재는 구조와 내부가 변경되어 원형을 잃었다고 합니다.
강설당 내부에는 아미타불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진 불화를 말합니다. 1918년에 제작된 이 불화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강설당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계포수 800명이 취사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800명이라.. 한번에 모든 인원이 취사하기는 힘들었을 테고 두 세번으로 나누어 식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군요...
이후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곳으로 사용되었고,
한때는 전등사 내에 설치된 승가대학 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강설당 뒤편에는 정행당이 있는데 현재 이곳은 스님들의 동안거 참선에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출입 금지 팻말이 있었습니다.
전등사 종루
전등사 안뜰(느티나무 주변)
중국 철종을 안치한 종각 앞에는 줄기가 부러져 죽은 나무 밑동에 중국 선종(禪宗)의 제1대 조사인 보리달마를 조각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달마도를 걸어놓으면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 씨앗을 심었고, 그것이 자라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에서 선불교가 태동하는 근간이 되었다.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중국종 ‘범종’이 있습니다.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입니다. 중국 종이 전등사에 오게 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물자 공출을 위해 전등사 범종을 수탈해 부평 병기창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전등사 스님은 범종을 찾으러 부평 병기창에 갔지만 전등사 범종은 찾을 수 없었고..
스님은 그 대신 그곳에 있던 철로 주조된 중국 종을 전등사로 가져와
아침저녁으로 부처님 음성을 중생들에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명부전
명부전은 약사전의 서남쪽에 있는데 창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번의 불사로 위치와 규모가 확대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형식을 지닌 팔작지붕 집입니다.
실물 석가모니는 실눈을 가진 인물이었을까요?
불상 모습을 하나같이 실눈으로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도대체 누가 저런 모범을 만들어냈는지 궁금했습니다. 저게 얼마나 답답해 보이는 모습인지 처음 묘사한 작가는 미처 몰랐을 겁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은 인물의 전형으로 '딱'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역설적이게도 저는 비호감입니다. 그런데 부처 오른쪽 상단의 금빛을 띠는 부조 조각은 뭘까요?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심판을 받는 곳을 명부(冥府)라 합니다. 명부전에는 이를 재판하는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어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도 합니다.
명부전 안에는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이 있는데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하여 총 31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저승 세계인 명부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며, 시왕은 저승 세계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을 이릅니다.
내부에는 가운데 지장보살상과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시왕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冥府殿)에 딸린 조각상 31구가 있는데, 이것들은 통째로 보물 제1786호로 지정돼있습니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1636년(인조 14)에 만들어졌습니다.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각승 수연이 중심이 돼 제작하였습니다.
경전을 보면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교를 비방하는 어머니를 위해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출했다고 합니다. 아닛! 지장보살은 여성이었군요..
이때 본 지옥의 끔찍함 때문에 육도(六道, 하늘ㆍ인간ㆍ아수라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죽은 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한 후에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을 서원했습니다.
육도의 중생이 죄를 짓지 않는 날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지장보살은 자신의 희생으로 부처가 되기를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 은혜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생이 일념으로 지장보살을 찾으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불교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이라면 바로 이 지장보살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한 삶이라도 다시 한번 구제의 기회를 주는 지장보살에게서 인간 구원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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