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나라-유럽

Claude Monet(클로드 모네) / 1 - 자화상, 해돋이 이전의 풍경화

hittite22 2025. 6. 19.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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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 Monet (1840 – 1926)

 

프랑스의 인상주의 대표화가 클로드 모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지역 유명인의 풍자화를 그려 돈을 받고 팔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일당이 5프랑이었는데 풍자화 한 점에 10~20프랑 정도를 받았다고 하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한 점당 20만 원 내외의 돈을 받은 셈입니다. 싹수가 있었군요. 거참. 

1861년 모네는 징집되어 알제리로 배치를 받습니다. 당시 프랑스인은 7년간 군복무를 해야 했는데(오 마이갓)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네는 징집된 지 1년 만에 장티푸스에 걸립니다. 그러자 그의 이모가 돈을 지불하고 모네를 군대에서 빼줍니다. 돈을 내면 징집을 면할 수 있었던 시스템이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그의 이모는 파리의 예술학교에 등록시켜 주어 모네는 그림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림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지만 20대의 모네는 파리 미술계에 낙담합니다. 중세미술을 모방하기만 하는 당시의 트랜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죠. 주류 미술게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던 모네는 자신의 그림이 거부당하자 우울증세까지 느끼고 심지어 1868년에는 센 강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센 강에 뛰어들면 죽을 수도 있었나 봅니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건진 모네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화가들과 어울립니다. 특히 르누아르와 절친으로 지냅니다.

모네의 첫번째 부인은 카미유 돈시외(Camille Doncieux)입니다.

1865년 화가와 모델로 처음 만나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고, 1867년 카미유가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모네의 부모는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는 데다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가지자 가문의 치욕으로 여겨 금전적인 지원마저 중단해 버립니다.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 된 건가요? 그렇게 둘이 좋아서 결혼했으면 잘 살 것이지 1876년 모네는 사업가 겸 미술수집가의 아내인 아리세 오슈데와 불륜을 맺습니다. 뭐 서양 화가들에게 있어서 불륜이란 일상 다반사의 하나이니 그러려니 해줘야 하나요? 그러던 중 불륜을 맺기 시작한 3년 차 되던 1879년, 카미유가 골반에 생긴 종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 10여 년이 흐른 뒤 1892년 오슈데의 남편도 죽게 되자 어절씨구나 하며 두 사람은 각자 두 번째 결혼에 골인합니다. 모네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암튼, 두 번째 부인이 된 오슈데는 모네의 첫 번째 부인에 대하여 비이성적인 질투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카미유가 쓴 모든 편지와 사진을 불태워 버렸다는군요.

 

모네는 1890년 지베르니에 연못이 딸린 대저택을 구입합니다. 그가 대저택을 구입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작품판매 이외에도 1891년 10만프랑(약 1억 1천만 원)의 복권에 당첨된 것도 행운이 있었다는 얘기도 떠돌지만 루머라고 합니다. 암튼, 모네는 진정 복 받은 남자네요. 이모가 군대에서 빼줘, 예술학교에 보내줘, 결혼 후 불륜을 저질러도 아무 문제없어, 마침내 복권까지 당첨시켜 줘(루머일지라도).. 아, 참나 정말 복 받은 인간 맞을 듯싶습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게 된 모네는 이후 많은 대작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마다랄까, 모네는 60대 후반이던 1908년 경 시력에 문제가 생겼고 1912년에는 백내장 진단을 받습니다. 저 역시  3년 전에 백내장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요.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잘해나가고 있으니 저야말로 현대의학의 혜택을 입은 복 받은 놈일까요? 암튼, 모네는 1922년 완전히 시력을 상실합니다. 그지경에 이르기까지 모네는 위험한 백내장 수술을 (1923년까지) 연기하고 팔레트에 있는 물감의 위치를 외우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건 참 대단한 일이네요.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평가들은 그의 흐릿한 그림을 조롱했다고 합니다. 이후 모네는 두 차례 백내장 수술을 받고 시력이 조금 회복되었지만 색상왜곡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중 1908년 이후의 그림과 이전의 그림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듯싶습니다.

 

Claude Monet. The Japanese Bridge, 1922

 

그의 말년의 작품을 가리켜 추상의 서막을 열어젖혔다는 미술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평론가들도 있는데 저는 그건 아니다 싶습니다. 그가 시력문제 때문에 흐릿하거나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회화작품을 남겼을 뿐이지 그게 추상을 의도하여 그린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자화상

 

Self-Portrait in his Atelier, 1884, Oil on canvas (unfinished) [Musée Marmottan-Monet, Paris]

 

<His Atelier(그의 작업실)의 자화상>은 클로드 모네의 미완성 작품입니다. 모네는 풍경화와 수경화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가 그린 자화상은 매우 드물고 또 독특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비록 부분적으로 완성된 미완성품이지만, 산의 풍경을 뒤로하고 앉아있는 중앙 장면에서 작가의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자연스러운 색상과 톤이 작가의 이미지를 따뜻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합니다.

 

Self-Portrait with a Beret, 1886, oil on canvas, 46 x 56cm [Private Collection]
Self-Portrait, 1915~1917c, oil on canvas, 70 x 55cm [Musée d'Orsay, Paris]

 

모네가 그린 말년의 자화상입니다.

이미 대머리가 훤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했는데요, 가끔 가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서양화가들은 자화상을 많이들 그렸는데 마치 통과의례처럼 자화상을 그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아주 못생긴 화가는 어떻게 처신하게 될까? 

 

"어쩌지? 자화상을 그리긴 그려야겠는데 좀 미화시켜 멋진 모습으로 그릴까? 왜 사람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더 멋있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지 않나? 그런 순간을 전제로 자화상을 그리는 거지. 그런데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미화시켜 그려진 작품이라고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쪽팔리는 일인데, 그건.. 에이, 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자. 그래도 명색이 화가인데 사실대로 그래야겠지."

 

뭐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서양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자화상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얼굴 내밀게 된 거라고 우겨봅니다.

 

르누아르가 그린 모네 초상화

살아생전에 수많은 명작을 남긴 클로드 모네이지만 인상파 이후의 서양화가 중에서 자화상을 적게 그린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는 전 생애를 걸쳐서 단 3점의 자화상을 남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를 보려면 르누아르의 작품을 많이 찾게 됩니다. 르누아르가 여자뿐 아니라 남자 인물화도 참 예쁘게 그린 화가라는 사실을 모네 초상화를 보고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Claude Monet portrait by August Renoir, 1872, oil on canvas, 61.7 x 50cm [Musée Marmottan-Monet, Paris]

 

르누아르의 신문을 읽고 있는 절친 모네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초상>은

절제된 색채와 빛의 질감을 잘 살려낸 작품입니다.

 

빛은 화가 뒤편의 창문에서 빛 커튼의 여과를 통해 들어와 방 안을 쉽고 섬세하게 퍼져 나갑니다. 반면, 색은 캔버스에 매우 이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모네의 얼굴을 묘사하는 붓놀림이 빠르고 선명하며, 그림 오른쪽에서 이어지는 붓놀림은 더 길고 회색으로 변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모네라는 남자'를 매우 이쁘게 묘사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제2회 인상파 전시회(1876년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됨)를 찾은 많은 관람객들은 이 그림이 거장의 작품에 걸맞다는 데 동의했다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소설가 에밀 졸라는 "르누아르의 작품은 렘브란트에 버금가며 벨라스케스의 눈부신 빛으로 빛난다"라고 극찬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Claude Monet By Auguste Renoir, 1872, Oil On Canvas, 64.9 x 5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Portrait of Claude Monet by August Renoir, 1875,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풍경화

클로드 모네라고 하면 수련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고, 조금 더 해설이 덧붙여지는 경우 루앙 대성당 연작이 언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수련 연작이나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상화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모네의 작품은 멀찍하니 제쳐놓곤 하였습니다. 흐릿하고 특별한 의미(?) 없는 소재와 구성을 되풀이해서 그린 작품들을 발품(해외 미술관 순례) 팔거나 팔품(인터넷 서핑) 팔아 찾아보려 마음먹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선호하는 화가들의 작품 섭렵을 거의 마무리하게 되면서 그간 제쳐놓았던 모네의 작품도 훑어보게 되었는데, 의외로 그가 그린 풍경화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점묘화나 고흐식의 붓터치 기법이 스며있는 모네의 풍경화를 보면 정통 인상파 작품과 궤를 같이하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View near Rouelles, Le Havre, 1858 , oil on canvas, 46 x 65cm [Private Collection]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노르망디 르아브르(Le Havre)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는 그림에 대한 초기 재능을 보인 '말썽쟁이' 아이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1857년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모네는 예술가이자 화가인 아망 고티에(Amand Gautier)의 친구였던 이모 마리 잔느(Marie-Jeanne)와 함께 살았으며, 두 사람 모두 모네의 예술적 추구를 격려했습니다.

이듬해 젊은 예술가는 외젠 부댕(Eugene Boudin, 1824~98)의 설득에 따라 그림 여행을 위해 르아브르 북동쪽에 있는 루엘(Rouelles)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곳에서 부댕의 영향을 받아 모네는 그의 첫 번째 그림인 <라 아브르 루엘의 풍경(View at Rouelles, La Havre)>을 제작했으며 1858년 8월과 9월에 르 아브르 시립 전시회에 전시되었습니다. 이 풍경화는 이제 막 유성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빛의 묘사에 대한 관심과 컬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드러내던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unset over the Sea, 1862~1864, pastel and gouache on beige paper, 17.7 x 33.2cm [Ashmolean Museum of Art and Archaeology, University of Oxford UK]
Woods at Fontainbleau(퐁텐블로의 숲), 1863~1865, oil on canvas, 50 x 65cm [Kunstmuseum Winterthur, Switzerland]
La Pointe de la Hève, Sainte-Adresse, 1864, oil on canvas, 41 x 73cm [The National Gallery, London]

 

모네는 20대 초반, 노르망디 해안의 생트아드레스(Sainte-Adresse) 근처 라에브(La Hève) 곶으로 이어지는 방파제 너머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인근 르아브르(Le Havre)에서 보냈기에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아마도 1865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더 큰 규모의 스튜디오 그림, <썰물 때의 에브 곶(La Pointe de la Hève at Low Tide)>을 위한 습작으로 보입니다.

텅 빈 자갈 해변에는 겨울의 황량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배에 탄 세 인물이 추위에 몸을 감싸고 있고, 절벽 위 오두막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는 질주하는 범선들이 보입니다. 회색빛 구름 아래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에 검은 돛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해변의 자갈을 연상시키는 선명한 물감 자국과 배를 둘러싼 넓고 평평한 붓놀림은 마치 모네의 그림이 추구해 나갈 방향을 암시해 주는 듯합니다.

 

La Rue de La Bavolle at Honfleur, 1864, oil on canvas, 55.9 x 61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MA]
The Hospice Lighthouse, 1864, oil on canvas, 54 x 81cm [Kunsthaus Zurich, Switzerland]
Spring Flowers, 1864, oil on canvas, 91 x 116.8cm [Cleveland Museum of Art, Ohio]

 

이 작품은 모네가 일시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거의 과학적인 정확성으로 그려진 정물화는 부분적으로 구도에서 비롯된 신선함과 생생함을 지녔습니다. 어두운 배경과 분리된 채, 다 자란 모란, 화분에 심은 수국, 그리고 바구니에 담긴 라일락은 뒤쪽 제라늄에서 아래로, 그리고 바깥쪽으로 흘러내립니다. 동시에 모네의 활기찬 붓놀림은 잎과 꽃잎 위로 반짝이는 빛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Haystacks at Chailly at Sunrise, 1865, oil on canvas, 30 x 60cm [San Diego Museum of Art, CA]

 

이 작품은 해가 뜨는 시점의 농가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에드워드 호퍼가 남긴 명작 황혼에 물든 철로변 풍경화가 오버랩되어 보입니다. 혹시 호퍼는 이 작품을 보고 황혼에 물는 거대한 하늘의 붉게 물들며 흐르는 장관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요?

 

The Bodmer Oak, 1865, oil on canvas, 54 x 40cm [Private Collection]
The Bodmer Oak, Fontainebleau Forest, 1865, oil on canvas, 96.2 x 129.2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Boats in the Port of Honfleur, 1866, oil on canvas, 49 x 65cm [Private Collection]
Unloading Coal, 1866, oil on canvas, 55 x 66cm [Private Collection]
Seascape: Storm, 1866~1867, oil on canvas, 48.7 x 64.7cm [Sterling and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Williamstown, MA]
Garden flowers, Sainte-Adresse, 1866c, oil on canvas, 64.8 x 53.8cm [Musée Fabre, Montpellier]
Quai du Louvre, 1867, oil on canvas, 65.1 x 92.6cm [Gemeentemuseum, Den Haag, Holland]
Regatta at Sainte-Adresse, 1867, oil on canvas, 75.2 x 101.6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Sainte-Adresse, 1867, oil on canvas, 57 x 80.5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Terrace at Sainte-Adresse, 1867, oil on canvas, 98.1 x 129.9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르아브르 근처에 있는 생타드레스(Sainte-Adresse)의 해변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앞 쪽에 앉아있는 인물은 모네의 부친입니다. 모네는 햇빛과 바다, 인물 그리고 꽃 등을 당시로서는 대담한 방식으로 묶어 구도를 잡았습니다. 붓질이나 색채 사용법은 인상주의라기보다는 사실적인 초기 작품에 가깝습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과 비교적 균일한 크기의 수평 공간들은 깃발과 같은 단순한 구성을 강조합니다. 모네는 훗날 이것을 ‘깃발이 있는 중국식 그림’이라 불렀습니다. 1860년대의 세련된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았다면 모네와 마네, 르누아르, 휘슬러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열심히 수집했던 화려한 색상의 일본 목판화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이 구성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이는 일본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판화는 오늘날도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에 남아 있다고 하네요. 혹시 지베르니에 갈 일이 생기면 한번 확인해 볼 사안입니다. 암튼, 이 작품에서 드러나 보이는 환상주의와 표면의 2차원성이 자아내는 미묘한 긴장감은 줄곧 모네 스타일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게 됩니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에서 꽃과 빛은 모네의 첫 번째 주제였던 물과 결합합니다.

하지만 그의 붓놀림은 파리에서 제작한 작품처럼 여유롭지 않습니다. 또한 인물과 테라스, 바다조차도 기묘하게 경직되어 있고 의외로 도시적입니다. 그러나 강렬한 햇살을 다루는 모네의 붓놀림은 <정원의 여인들>보다 뛰어납니다. 그는 처음으로 그림자를 생동감을 있게 처리했으며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빛나고, 섞이지 않는 색으로 살살 문지르듯 꽃을 표현했습니다.

 

The Beach at Sainte-Adresse, 1867, oil on canvas, 75.8 x 102.5cm [Art Institute Chicago, IL]

 

위의 작품과 같은 곳의 풍경화인데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입니다.

해변 풍경이 산책하기 딱 좋습니다.

 

The Entrance to the Port of Le Havre, 1867~1868, oil on canvas, 50.2 x 61.3cm [Norton Simon Art Foundation, Pasadena, CA]

 

모네의 초기 작품인 <르 아브르 항구 입구>에 묘사된 상쾌한 바다 풍경은 1868년 파리에서 열린 국가 후원 미술 전시회인 살롱에 출품한 대형 작품(현재는 소실됨)의 스케치로 그려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성장한 노르망디 항구 도시 르아브르(Le Havre)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을 때 이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른쪽에 있는 부두와 등대로 인해 르아브르는 모네의 고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네는 이 스케치를 친구이자 기자였던 앙투안 라퐁(Antoine Lafont)에게 주었는데, 그는 1870년 6월 모네의 결혼식에 증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왼쪽 아래에 "아, 라퐁, 1870"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은 그 이유로 인한 것입니다.

 

The Cart. Snow-covered road at Honfleur, 1867c, oil on canvas, 65 x 92.5cm [Musée d'Orsay, Paris]
The Magpie, 1868, Oil on canvas, 89 × 130 cm

 

<까치(Magpie)>는 1868~1869년 겨울 노르망디의 에트르타(Étretat) 코뮌 근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후원자 루이 조아킴 고디베르(Louis Joachim Gaudibert)는 모네의 여친 카미유 돈시외(Camille Doncieux)와 그들의 갓 태어난 아들을 위해 에트르타에 집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를 통해 모네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 절묘한 설경은 귀스타브 쿠르베의 설경 성공의 결과로 탄생했습니다. 모네는 그의 작품의 초점을 대문 위에 앉아 있는 까치 한 마리라는 단순한 주제로 삼았습니다. 새는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명상적인 기분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림자와 빛은 나무, 얼음 하늘, 눈 덮인 건물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대비를 이룹니다.

 

Apple Trees in Bloom, 1872, oil on canvas
Impression, Sunrise, 1872, oil on canvas, 48 x 63cm [Musée Marmottan-Monet, Paris]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 표현이 아닌 주관적인 느낌대로 그림을 그렸던 에두아르 마네를 필두로 하여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많은 화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인상주의’라는 말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인 1874년, ‘무명 화가, 판화가, 조각가 협회 독립전시’가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아틀리에에서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 모네도 참여했는데 이때 그의 작품 <인상, 해돋이>도 전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 모네가 외젠부댕에게 그림을 배웠던 에트르타 바닷가 르 아브르(Le Havre) 항구의 해돋이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네는 해돋이의 사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해가 떠오르면서 그의 눈에 담긴 변화하는 빛의 순간성을 포착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비평가이자 기자였던 루이 르로이(Louis Leroy)는 이 작품을 보고 “인상적이다”라며 비아냥거리면서 이것은 아기 수준의 벽지만도 못한 그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던 작가들을 ‘impressioniste’라고 부르기까지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상주의’라는 예술 사조의 이름을 낳게 만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인상, 해돋이>는 해돋이 순간, 일렁이는 바닷물에 반사되는 햇빛의 역동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세부 묘사는 생략하고 해 뜨는 짧은 순간의 특별한 인상을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칠하여 나간 인상파의 효시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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