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에 대한 히타이트의 생각은 뭐랄까, 유보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의 서울집 거실에 걸려있는 클림트의 키스 복사본 그림을 보면서 항상 장식적인 묘사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평가를 보류했었던 터였다.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을 보는 나름의 원칙이나 기준을 갖추지도 못한 아트 잡배 수준에 머물렀던 히타이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 좋으면 끌리고 그렇지 아니하면 멀리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이니 남들이 클림트, 클림트 한다고 덩달아 좋아한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왜 클림트 그림을 보러 비엔나까지 간 것이냐고?
오, 노노..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엔나로 행차한 것은 그의 딸 한나가 에곤 실레를 좋아한다니까 에곤 실레 그림을 보러 레오폴트 미술관을 찾아간 것일 뿐이었다. 클림트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는 가지도 않았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도 웃기는 거였는데, 그곳에서 미술관 내부 사진촬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레오폴트에 가니 그곳에도 클림트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히타이트는 그렇게 하여 뜻하지 아니하게 비엔나 MQ지구에서 클림트 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작품감상


'어떤 게 클림트다운 거라고 규정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 그림은 클림트 답지 않은 작품으로 여겨졌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클림트 작품으로 분류한 건 아닐까..'
레오폴트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몇몇개가 걸려있었는데 첫 번째로 마주한 그의 그림은 미술인생 초기에 그린 것으로 평소 알고 있던 그림스타일과 달라서 히타이트는 언뜻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히타이트는 챗GPT에게 클림트의 작품 <과수원(Orchard)>에 관한 해설을 부탁해서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주워 담을 수 있었다.
ChatGPT의 답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과수원(Orchard, 1898)>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 미술과 상징주의 미술 사이에서 두 사조를 연결해주는 포지션에 자리잡은 초기 작품이었다.
19세기 서양미술은 인상주의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던가. 이 작품에도 그 시대적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짧고 리드미컬한 붓터치나 풍부한 색감에서 그런 경향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는 것으로부터 클림트가 꽃피운 장식미술의 전조를 느낄 수 있다.
1897년 빈 분리파(Secession) 창립을 주도하면서 클림트는 기존 미술생태계인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었는데, 빈 분리파 창립 직후에 제작된 작품 <과수원(Orchard, 1898)>은 시기적으로 볼 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그려낸 것이다. 즉 새로운 사조로 뛰어들기 직전 기존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미술 관점으로 그린 탐구적 단계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아트 잡배 히타이트는 <과수원(Orchard)> 작품에서 반복적인 패턴을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ChatGPT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마음먹었다.
'클림트의 작품을 접하면서 조금씩 알아가보는 거지, 뭐..'

'변두리, 즉 그림의 주변 일화부터 하나씩 머리에 입력해보자.'
그렇게 생각한 히타이트는 이 작품에 대해, <클림트가 정사각형 형식으로 그린 최초의 풍경화>라고 입력했다.

미술사가에 따르면,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1899년 잘츠부르크 할라인(Hallein in Salzburg) 근처 골링(Golling)에서 평생의 연인으로 지낸 플뢰게(Flöge)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한다. 작품 제목 <연못가의 아침>에 해당하는 장소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동쪽인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역의 호수로, 클림트가 자연을 탐구하며 많은 영감을 얻은 장소 중 하나였다. 또한 클림트는 이 지역에서 연인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와 함께 사적인 삶의 행복한 순간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연못가의 아침>은 해안선의 섬세한 밝은 녹색 톤과 물 표면에 반사된 청분홍빛으로 가득차 있다. 클림트는 대자연의 색감, 바꿔 말하면 초록색과 파란색 계열의 조화를 풍부하게 묘사하는데 주력한 듯하다. 히타이트는 작품 아터제에서 표현한 밝은 청록색 물결이 더 아름답게 보여졌는데 암튼 이 작품에서도 고요한 아침 호수에 드러나는 빛의 변화를 부드럽고 차분한 색조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읽어볼 수 있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색조 - 흰색으로 깨진 파스텔 색상 -는 1900년 이후 그의 팔레트에서 드러나는 색상에 담긴 미묘하고 차분한 성향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워밍업을 마친 히타이트,
이번에는 클림트의 유명한 호수 Attersee(아터제)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 한 점을 들여다 본다.

"오, 이 그림은 자주 접했던 클림트의 호수 풍경화야.."
히타이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클림트 작품이 등장하니 반가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반복되는 청록의 색감과 표현방식이 인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켜요"
딸도 한 마디 거들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On Lake Attersee(아터제 호수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전통적인 풍경화 방식을 벗어나 장식적이고 추상적인 미학을 탐구한 결과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히타이트가 생각하기로 '장시적인 미학'은 반복해서 그어진 밝은 청록색 물살에 기인한 것이라 여겼다.
뿐만 아니라 평면적 구도, 독특한 색채, 자연에 대한 독자적 해석은 이 작품이 그의 풍경화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현대 미술사에서 클림트의 자연주의와 상징주의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일부 미술 평론가들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의 플라토닉 러브에 과다 감정이입하여, 이곳 풍경화를 펼쳐놓고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연정에 대해 침이 마르지 않도록 이야기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히타이트의 관심사 역시 그런 장삼이사의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Litzlbergkeller(리츠베르크켈러)>는 그가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역의 아터제(Attersee) 주변에서 제작한 풍경화 중 하나이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Litzlbergkeller는 Litzlberg라는 작은 마을과 연관이 있으며, 이 지역은 클림트가 여름철 창작을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레스토랑'이라 지칭한 사례가 있는데 히타이트가 조사한 바로는 그러한 용처라는 명확한 정보가 없다.
"Keller"는 독일어로 '지하 저장고(셀러)'를 뜻하며, 전통적으로 와인 또는 음식 저장용 건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작품명인 'Litzlbergkeller'라는 이름이 붙은 장소가 당시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렸던 특정 저장고나 작은 건물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Litzlberg에는 관광지로 발전된 지역이 있으며, 근처에는 다양한 식당과 호텔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클림트가 그림에 담았던 장소가 오늘날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는 곳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클림트는 풍경화에서 종종 그랬듯이, 묘사에서 사람의 모든 증거를 제거하고 자연의 구조에만 초점을 맞추어 민감한 분위기의 그림을 만들었다.

하나치(Hanáci) 소녀의 작은 이미지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모라비아(Moravia) 하나(Haná) 지역의 전형적인 머리 스카프를 두른 초상화는 머리 스카프, 드레스 및 배경을 가볍고 바람이 잘 통하는 스타일로 칠함으로써 얼굴의 세밀한 묘사와 단색으로 렌더링 된 배경을 연결했다. 소녀가 옆으로 시선을 돌리는 방식은 이미지에 자연스러운 성격을 부여해 주는 일종의 장치에 해당한다.
모라비아(Moravia)는 현재 체코 동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체코의 주요 세 지역(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중 하나이다. 모라비아는 다양한 민속 전통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모라바(Morava) 강에서 '모라비아'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아울러 하나(Hana) 지역은 특히 체코의 민속 음악, 의상, 춤이 풍부하게 발달한 곳으로 전통 축제에서 이러한 문화가 여전히 보존되고 있는 장소다.

이 시대 대부분의 남성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이목구비를 지닌 노인의 초상화이다. 의뢰받은 작품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밝은 곳과 어두운 곳 사이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섬세한 조명 효과를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예쁘장하게 차려입은 작은 소녀 초상화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사진의 특성을 모방하여 그린 작품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19세기말~20세기 초)는 사진 매체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던 때였으며, 당시 예술가들은 사진이 제공하는 새로운 구도와 명확한 디테일을 참고하기 시작했다.
히타이트는 사진 특성을 모방했다는 말에 꽂혀서 다시 클림트를 스터디한다.
1) 클림트는 드로잉과 제작 과정에서 사진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드로잉 작품에서 모델의 자연스러운 자세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지을 수 있다. 또한 클림트는 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인물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진적 심도를 연상시키는 구도를 자주 사용했다. 아울러 이 작품처럼 클림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린 소녀를 약간 낮은 곳에서 포착하고, 다양한 광원을 비추어 입체적인 표면 부조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당시 사진관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2) 이 유화에서 클림트는 육안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작은 디테일을 통해 소녀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잘 잡아냈으며, 실크 드레스의 고급진 외관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는 금박과 장식 패턴이 줄어들고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도 젊은 소녀는 비교적 단순한 배경에 위치하며, 부드러운 색채와 질감이 강조되었다. 소녀의 표정은 관조적이면서도 약간의 수줍음이 느껴지며, 클림트는 이를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는 붓질로 표현했다.
3) 유화 <Seated Young Girl>에서 클림트는 부드러운 붓질과 얇은 색층을 통해 피부의 투명감을 표현하는데 능숙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그림은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배제된 반면, 인물 자체의 형태미에 집중한 것을 볼 수 있다.
1903년에 제작된 Jurisprudence painting은 클림트의 가장 잘 알려진 학술 작품 중 하나이다. 이 벽화에서 그는 우화적 인물과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여 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묘사했다. 이 그림은 법학 분야와 법과 법률 연구에 대한 대학의 헌신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작품을 들여다보자.'
히타이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며 대형화면 앞으로 다가섰다.
1) 법조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정의의 저울'과 '눈가리개'를 한 정의의 인물처럼 상징적 이미지로 둘러싸여 있다.
2) 중앙 인물의 양쪽에는 법의 다양한 측면을 나타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상징주의와 사실주의를 혼합한 클림트의 특징적인 황금빛 장식 스타일로 실행된다.
이 그림은 클림트가 빈 대학교를 위해 작업한 더 큰 벽화의 일부였지만, 엇갈린 반응을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대담함과 혁신적인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시대에 너무 현대적이고 논란이 많다고 비판했다.
대학을 위해 제작된 다른 벽화와 함께 법학 그림은 클림트가 더 상징적이고 복잡한 작품으로 전환하는 것을 반영하는 핵심 작품으로, 그의 초기 작품과 키스와 같은 후기의 더 유명한 작품, 그리고 그의 그림의 황금기를 연결한다.
이 작품은 빈 대학교를 위해 제작되었지만, 대학에서 거부했기 때문에 원래 위치에 설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클림트가 예술을 통해 상징적, 사회적 주제를 탐구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1900-1901년에 완성된 <의학>은 삶, 죽음, 치유라는 주제를 다룬다. 클림트의 경력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생각을 자극하는 작품 중 하나로, 인간의 상태에 대한 냉엄하고 강렬한 탐구가 특징이다.
<의학> 중앙에는 건강과 청결의 그리스 여신 히기에이아가 다른 인물에 둘러싸인 채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상징주의가 풍부하다. 한 면에는 질병과 죽음의 파괴적인 힘을 상징하는 고통과 쇠퇴의 이미지가 있다. 다른 한 면에는 의학과 치유의 실천이 제공하는 희망과 안도감을 볼 수 있다.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당시 논란을 야기한 누드 인물이다.
한편, 그림에서 가장 불안한 측면은 죽음과 질병의 묘사에 있다. 어두운 이미지에 쇠퇴 중인 다양한 인물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서 관람객들은 불쾌감을 느꼈다. 이는 의료 행위를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그림과 결부된 에피소드에 따르면 이 작품은 비엔나 대학의 거부로 캠퍼스에 걸리지 못했다. 대학은 클림트가 의학과 인체를 묘사한 방식, 특히 질병과 죽음을 그래픽으로 묘사한 방식이 너무 과감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엔나 대학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클림트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상징주의와 장식적 스타일을 혼합하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히타이트의 딸이 오묘한 색상의 대작 앞에 가서 섰다.
"오, 이 작품은 아름답고도 스릴이 넘치는 구성이군.."
히타이트는 드디어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안녕하세요? 클림트 씨."
"히타이트, 자네의 영혼이 느껴지는군. 여기서 인간의 삶을 직관해 보시게나."
클림트에게 아는 체하던 히타이트는 뒷골이 땅기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저 해골바가지가 날 건드렸나?'
해골과 정상인간이 1:9의 대결구도로 배치되어 있는 이 작품은 클림트의 현존하는 그림 중 두 번째로 큰 것이다.
초안은 1908년부터 작성되었으며 클림트가 48세이던 1910년부터 유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은 1911년 로마 국제 미술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다음, 1912년 드레스덴에서 <죽음과 사랑>으로 전시되었고
이후 제목을 <죽음과 삶>으로 바꿔서 부다페스트(1913), 만하임(1913), 프라하(1914), 베를린(1916), 스톡홀름(1917), 코펜하겐(1917/18) 등지에서 전시되었다.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였는지 여러 번(1912/13 및 1916/17) 재작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 왼쪽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검은 십자가 망토를 두른 꼽추모양의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반대편 오른쪽에는 9명의 남녀가 엉켜있다.
삶의 여러 단계를 하나의 다채롭고 풍성하게 장식된 타원형으로 비빔밥처럼 섞어 놓았다.
여기에는 사랑에 빠진 부부,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 노부인이 포함되어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을 여러 번 다시 그리면서 첫 번째 버전에서는 '죽음(해골)'이 후광 머리를 숙인 채 내성적이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마지막 버전에서 '죽음(해골)'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곤봉을 든 채 공격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선은 9인 그룹의 왼쪽 가장자리에 있는 소녀에게 향하여 있다. 그리하여 소녀는 공포로 휘둥그레진 눈을 뜬 채 두 손을 가슴으로 치켜올린 모습이다. 꿈같은 상태로 공중에 떠서 눈을 감은 8명의 나머지 인물들은 소녀와 해골이 마주하는 내막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히타이트는 생각한다.
'죽음'이 도적과 같이 임하리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하네.. 에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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