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미술관 순례

서유럽 여행 - 비엔나 레오폴트 미술관 (1) / 리차드 게르스틀과의 만남

hittite22 2025. 1. 25.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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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old Museum 전경

 


1. 레오폴트 미술관 개요

- 정식명칭 : The Leopold Museum

1) 주요 전시정책

- 19세기 후반과 그 이후의 모더니즘에 초점을 맞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오스트리아 미술 컬렉션 중 하나

- 두 안과의사 루돌프와 엘리자베스 레오폴드의 수집 활동을 기반으로 설립.

2) 건축

- 2001년, Laurids와 Manfred Ortner 

3) 입장료 

- 일반 17유로, 할인(26세 미만, 65세이상) 14유로.  

- 19세 미만 청소년 2.5유로.

- 7세 미만 어린이 무료.

- 비엔나 시티 카드 소지자 14.5유로.

4) 개관일

- 수요일~월요일 : 오전 10시~오후 6시

5) 휴관일

- 화요일

 

2. 위치

 

레오폴트 뮤지엄 위치

 

 

(들어가며)

 

 

서유럽 일주여행을 계획할 당시만 해도 비엔나는 후보지에 올라오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가 스위스 마테호른 여정을 우천 가능성이 높다는 예보로 포기하면서 스케줄 조정하는 과정에서 추가되었다. 이유는 그러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마테호른 대신에 비엔나' 라기 보다 비엔나에 레오폴트 뮤지엄이 있고, 이곳이 세계 최대의 에곤 실레 작품 소장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필수 방문지로 완전 낙점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히타이트가 에곤 실레 덕후였던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곤 실레를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동행자인 그의 딸이 에곤 실레 그림을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화가였다.

 

그래서 히타이트는 딸에게, 혹은 딸이 결혼을 하고 2세를 얻게되면 그 손자에게 자화자찬 같이 늘어좋게된 이야기가 생성된 것이다. 히타이트 왈, "내가 비엔나를, 그리고 레오폴트 뮤지엄을 여행의 주요 목적지의 하나로 포함한 것은 딸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어." 라고.

 

그런데 이후에 히타이트도 에곤 실레의 작품을 인정하고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시정의 잡배에서 아트초보로, 다시 아트초보에서 아트개안자로, 그리고 아트덕후, 아트 예찬론자로 성장하는 인문주의적 인간형에게 나타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의 하나이니까.. 

 

간식타임

 

루체른-비엔나 기차 안에서.. 식사

 

MuseumsQuartier 항공사진

 

레오폴트 뮤지엄은 비엔나 중심가의 MQ지구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항공사진의 주황색 지붕 건물 안뜰 오른쪽에 위치한 무목은 1962년 9월 20일 슈바이처가르텐(Schweizergarten)의 20er Haus(1958년 브뤼셀 세계박람회의 오스트리아관)에 20세기 박물관(현대 미술관)으로 개관한 미술관이다.

 

히타이트는 비엔나에서 무목관람은 배제했다. 그곳에는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라우센버그,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중요한 작품을 포함하는 국제 컬렉션 약 230점을 소장하고 있다. 무목이란 루트비히 비엔나 현대 미술관(Mumok, Museum of Modern Art Foundation Ludwig Vienna)의 약어였다. 쾰른, 뉘른베르크, 프라하 국립미술관 등지에서 현대미술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서 히타이트는 관람을 '사양'하였던 것이었다.

 

 

작품감상

 

 

 

비엔나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Leopold Museum(레오폴트 뮤지엄)

 

히타이트부녀의 목적지 레오폴드 뮤지엄은 흰색 사각건물이다. "MQ박물관지구(Museum Quartier)"의 좌측편에 자리한 레오폴트 미술관은 비엔나 아르누보와 비엔나 공방, 그리고 표현주의 시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비엔나에서 가장 멋스러운 문화공간 중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곤 쉴레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으며 덤으로 비엔나 분리파의 창시자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클림트의 본색은 비엔나 벨베데레에 가야만 알현할 수 있지만 히타이트는 당시에만 해도 그런 정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터였다.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던 시기였다는 것도 벨베데레를 스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었다.

레오폴트 미술관 입구 계단의 벽에 내걸린 걸개그림에는 조각가 Wilhelm Lehmbruck의 작품을 전시하는 안내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빌헬름 렘브레크는 조각계의 뭉크라고 할 수 있는 아티스트이므로 히타이트는 꽤 괜찮은 시기에 레오폴트 뮤지엄을 방문한 셈이었다. 

 

레오폴트 뮤지엄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2001년에 개관한 이곳 레오폴트 뮤지엄에서는 엘리자베스와 루돌프 레오폴트 부부가 수집한 5,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운영시스템은 오스트리아 은행의 협력을 받은 레오폴트 박물관 재단이 관리하는 방식이다. 박물관 운영비용의 40%는 정부의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하니, 사립박물관과 공립박물관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보여진다. 주요 소장품은 20세기 전반의 오스트리아 미술 작품이다.

MQ지구에 모여 있는 박물관들은 18-19세기 바로크 양식과 현대식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 중 레오폴트 미술관은 헝가리 다뉴브 강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뒤덮힌 정육면체 모양의 현대식 5층 건물로 건축되었다.

 

히타이트 씨의 딸, 이 사진에서는 가수겸 배우 유진 삘이 묻어나오네?
엘베 안에 붙어있는 층별 안내판.

 

히타이트 씨는 엘베 안에 붙여진 층별 안내도를 보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레오폴트 뮤지엄의 로고인데 자세히 보니 에곤 실레의 작품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만든 게 아닌가.

Leopold Museum logo

 

아무리 미술관에서 제정한 로고라 해도 화가 개인의 저작권이 있는데 함부로 사용해도 되나? 에곤 실레를 위한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익스큐스해준 모양이었다.

 

Albin Egger-Lienz(1868~1926), Dance Macabre(versionⅣ), 1915, casein on canvas, 202 x 244.5 cm

 

히타이트가 첫번째로 마주한 그림이다.

 

알빈 에거-리엔츠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모티브는 1809년의 무도(Danse Macabre)일 것이다. 이 티롤 출신 예술가는 그후 1906년에서 1921년 사이에 총 6가지 버전의 작품제작을 추가했다. 기본구성은 4명의 농민을 발맞춰 이끄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이 화가의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오늘날 알빈 에거-리엔츠의 전쟁 이미지는 전투와 폭력의 공포에 대한 경고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전선에서 겪은 경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Albin Egger-Lienz(1868~1926), Last Dance Macabre 1809, 1921, oil on canvas, 128.8 x 152.5 cm [Private Collection]

 

알빈 에거-리엔츠(Albin Egger-Lienz)는 애국심에 대한 열정과 전쟁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 사이를 번갈아가며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전쟁을 표현적으로 고발하는 그림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Danse Macabre>의 네 번째 버전도 포함된다.

 

작품속에서 죽음이 이끄는 농민의 행렬은 죽음의 기념비적인 상징이 된다. 줄의 마지막 사람이 뭔가 삶을 그리워하며 뒤돌아보는 반면, 다른 세 사람은 이미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복종적으로 죽음을 따르는 모습이다. 

 

Oskar Kokoschka(1886~1980), Pieta(Poster for the Summer Theatre in the International Kunstschau 1909), color lithograph on paper, 122 x 79.5 cm
Oskar Kokoschka(1886~1980), Tre Croci-Dolomite Landscape, 1913, oil on canvas

 

Robin Christian Andersen(1890~1969), Girl in a blue Dress, c.1913-1914, oil on canvas, 68.5 x 55.2 cm

 

덴마크 출신의 오스트리아 화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Robin Christian Andersen)은 자연주의, 사실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예술 사조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오, 안데르센이란 성은 덴마크에 많이 있는 모양이네..'

 

푸른 드레스 차림의 한 소녀가 회갈색의 초라해보이는 벽 앞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앉은 자세에서 침착함, 침묵의 이미지가 묻어나오고, 얼굴 표정에는 무언가 슬픔을 담은 듯하다. 눈 주위의 어둡고 붉은 기운으로 보아 어쩌면 방금 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부는 얼룩덜룩하고 따라서 건강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왜일까?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90-1969)은 에곤 실레(1890-1918), 프란츠 비겔레(Franz Wiegele, 1887-1944), 안톤 파이스타우어(Anton Faistauer, 1887-1930)와 함께 아카데미의 보수적 가르침에 반기를 들어 생겨난 노이쿤스트그루페(New Art Group)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독학으로 폴 세잔(1839-1939)의 그림을 모델로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인지 그림 구성에서 구조화된 느낌이 서려있는 것 같다. 

 

Richard Gerstl(1883~1908), Lake train with Mountain "Sleeping Greek Woman", 1907, oil on canvas, 37.7 x 39.3 cm

 

이 작품은 동쪽 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를라코겔(Erlakogel)이 보이는 트라운제 호수(Traunsee lake)를 묘사하고 있다. 히타이트는 잠자는 그리스 여성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 찾아야 했다.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트라운슈타인(Traunstein) 산맥은 호수 바닥을 향해 가파르게 경사져 있고 그 실루엣이 눈길을 끄는 여성의 옆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산등성이에 대하여 "Schlafende Griechin"(잠자는 그리스 여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늘을 보니, 비록 표현주의적으로 그려진 Richard Gerstl(1883–1908)의 풍경화인데도 구불구불 띠를 이루는 선의 흐름에서 고흐의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히타이트의 독단적인 감상인데 그때문에 히타이트 눈에는 잠자는 그리스 여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나? 암튼, 게르스틀은 1907년 여름 잘츠캄머구트 지역에서 몇 주 동안을 지내면서 점묘주의 스타일을 버리고 자유롭고 표현적인 스타일로 전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약 고흐가 권총자살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살아남아서 이 그림을 보았다면 뭐라 했을까?

Van Gogh는 그리스 여인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장면에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적 격동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아주 고요하다. 호수의 물결, 산의 고요함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다. 마치 자연이 인간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엇인가 불안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잠자는 그리스 여성의 표정에서, 그 고요함 속에도 삶의 비밀과 고통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 여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과 인간은 항상 내면의 충돌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그림이 주는 힘이다."

히타이트는 스스로 말을 만들어 내고 또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살아남은 Van Gogh는 Gerstl의 작업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들이 맺는 감정적 유대를 느꼈을 것이 분명해!'

 

Richard Gerstl(1883~1908), Lakeside Road near Gmunden, 1907, oil on canvas

 

"그럼, 반 고흐가 이 그림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딸이 히타이트의 고흐 놀이에 숟가락을 얹는다.

으음..

히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간다.

"두 화가는 모두 강렬한 색감과 감정적 표현을 중시했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작업했다고 봐야지. 만약 고흐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표현주의 풍경화 Lakeside Road near Gmunden을 보았다면

1)강렬한 색감과 붓질에 대해 감탄하고,

2)자연의 감정적 해석에 공감했을데지만

3)색채 대비와 구조에 대해서는 '여기에 노란 빛이나 더 따뜻한 색이 있었다면 더욱 빛이 났을텐데."라고 했을 것 같아.

하지만 고흐는 예술적 실험에 열려 있던 인물이라 게르스틀의 대담한 표현 방식에 대해 "나도 이런 도전을 더 해봐야겠어요."라고 공감했을거야."

 

Richard Gerstl(1883~1908), On the Danube Canal, 1907, oil on canvas, 63.5 x 47.5 cm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의 <On the Danube Canal>은 도시적인 요소와 자연이 교차하는 다뉴브 운하 주변 풍경을 담은 작품이다. 그림 속 배경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비엔나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주거용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비엔나 9구에 살았던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다뉴브 운하와 제방의 전망을 묘사하기로 작정했다.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거리에는 나무가 늘어서 있다. 게르스틀 특유의 강렬하고 대담한 색감이 두드러지며, 붓질이 다소 격렬하고 표현주의적인 그림은 한편으로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듯하며, 두껍게 칠해진 물감의 궤적에서는 다시 한번 고흐의 임타스토 기법이 오버랩 되며 스쳐지나간다. 이에 비하여 앞서 본 작품 <Lakeside Road near Gmunden>은 상대적으로 더 밝고 자연적이며 부드러운 색감을 사용한 것으로 느껴졌다. 히타이트는 얼핏 보면 비슷하게 그려진 것 같은 풍경화 여러 점을 거치면서 그 작품들 속에 담긴 서로 다른 모습을 읽어내려 애를 썼다.

 

 

Richard Gerstl(1883~1908), Tree with Houses in the Background, 1907, oil on canvas, 35 x 19.4 cm

 

작품 <배경에 집이 있는 나무>의 오른쪽 가장자리에서 Gerstl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겹쳐진 얇은 나무 줄기를 묘사하였다. 구성은 ​​분리주의와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짧고 강렬한 붓질은 매우 다른 이야기를 구술하듯 초원과 나무 잎을 스케치하고 있다. 뿌만 아니라 Gerstl은 마치 전경과 배경을 구별하지 않은 듯이 작품을 마무리 하였다.

그의 관심은 표면 질감에 꽃힌 것일까?

 

Richard Gerstl(1883~1908), Sunny Meadow with Fruit Trees, 1907, oil on canvas, 44 x 34.7 x 1.9 cm

 

"게스트롤의 풍경화, 매력있어 보여요."

작품감상에 빠진 딸이 한 마디 한다.

"표현주의 화가의 그림에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지. 그래서 내가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를 애정하잖니.."

 

히타이트의 말처럼 <Meadow with Trees>의 회화적 인상은 지배적인 녹색 음영의 다양한 종류에 의해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색상 선택과 잘린 이미지 모티프는 분리주의를 떠올리게 하며 동시에 작가는 붓놀림과 페인트 사용법을 통해 표현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게스트롤의 풍경화 5점..

마치 초대형 폭풍처럼 부녀를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히타이트로서는 레오폴트에서 뜻밖의 보물을 하나 챙기는 느낌이 들었다.

 

감상 삼매경인 둘째..
리차드 게르스틀(Richard Gerstl)의 작품 5점이 나란히 걸려있는 전시실 풍경
Koloman Moser(1868~1918), Flower Piece and Ceramic Pitcher, 1912, oil on canvas, 50.1 x 50.1 cm

 

 

콜로만 모저는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창립 멤버로서, 초기에는 그래픽 디자인, 책 표지, 우표,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03년,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과 함께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을 설립한 후, 그의 작품은 점차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후기인 1907년 이후, 모저는 다시 회화로 돌아와 스위스 예술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의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작품은 더욱 단순화되고, 색상은 제한되며, 주제는 상징적이고 내면적인 표현을 담게 되었다. 

 

꽃과 세라민 주전자를 테마로 삼은 위 작품은 단순화된 형태와 제한된 색상 팔레트로 표현되어 있다. 기하학적인 구성과 절제된 색채 사용은 그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더욱 내면적이고 상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으로 보인다.

 

히타이트는 레오폴트 뮤지엄을 돌아보는 동안, 

인상파 화가들이 득세하였던 파리 미술계의 주도권이 그 다음에 비엔나로 옮겨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Carl Moll(1861~1945), Jar of Roses, 1911, oil on wood

 

칼 율리우스 루돌프 몰(Carl Julius Rudolf Moll, 1861~1945)은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한 오스트리아 화가였다. 인상파의 점묘법에서 영감을 얻은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 중 한 명이었는데 나치 지지한 전력이 있어 제2차 세계대전 말 소련군이 비엔나에 접근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몰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애잔함이 배어 나오네..

그는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Christian Griepenkerl)과 에밀 야콥 쉰들러(Emil Jakob Schindler)의 지도를 받았는데 1892년 스승인 쉰들러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인 안나(Anna von Bergen)와 결혼하였어.

 

1897년, 몰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등과 함께 빈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빈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영향을 미쳤지. 그의 딸 마리아 에버스탈러-몰(Maria Eberstaller-Moll)이 나치 당원인 리하르트 에버스탈러(Richard Eberstaller)와 결혼한 다음에는 나치 정권을 지지하였다고 하네. 거, 참...

 

딸이 서 있는 작품.. 괜찮아 보이는데..

 

그런데 히타이트 씨는 저 작품을 담아오지 못했다.

 

Hans Schachinger(1888~1952), Coutry Child with Hat, oil on canvas

 

이 작품의 모델인 아가씨는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Robin Christian Andersen)의 작품 <Girl in a blue Dress>의 주인공이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한 감이 있었다.

히타이트 혼자의 생각일까?

 

산뜻한 실내 인테리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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