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작품감상
중세 종교화를 보면 성인들의 얼굴에 후광을 표시하는 금색으로 된 둥근 원을 그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세상에서도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키스 해링은 단지 선을 죽죽 그어 빛나는 아기를 창작했다.
유화 작품에서도 그런 빛나는 작품이 있다.
미술관 안에 걸려 있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유독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림,
그리하여 멀리서 보아도 바로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이 있다.
바로 뮌헨 노이에 피나코텍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풍경화와 해바라기 그림이 그러했다.
"아, 이렇게 아름답고 힐링되는 풍경그림도 있나?"
"진짜 멋져요."
"그치, 멋지지? 근데 고흐 엉아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물감에 형광액을 뿌리기라도 했나?
왜케 그림에서 빛이 나지?"
히타이트는 반 고흐가 마지막 거주지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에서 그렸던 풍경화에 첨벙 빠져버렸다.
더구나 고흐가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라니..
더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히타이트는 반 고흐의 작품감상에 진심이었다.
마치 초대받은 손님이 주인의 친절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처럼.
고흐의 임파스토 기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close up 사진를 들여다 보며 히타이트는 생각했다.
'반 고흐는 물감에 물을 적지시 않고 원액 그대로 캔버스 위에 처바른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입체감이 도드라진 고흐표 풍경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하늘과 들판이 동등한 정도로 임파스토 기법이 발휘되어 있다. 고흐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임파스토 기법이 발휘된 정도가 다르다. 어떤 작품의 경우 배경은 일반 유화색칠처럼 하번 칠한 것으로 마무리된 반면 포커스를 맞춘 사물이나 인물묘사에는 엄청난 물감 찍어바르기 향연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히타이트의 그림 감상법!
고흐의 작품을 만나면 그는 꼭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는다. 다른 화가들 작품과 달리 입체감이 묻어나오는 그의 붓터치를 보다 더 실감하기 위해서..
"한나야, 신기한 거 하나 알려줄께. 고흐그림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쓱쓱 싹싹' 기분내키는 대로 붓질한 느낌을 받아. 그런데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기가막히게 멋진 풍경이 살아나는 거야. 그래서 반 고흐의 그림은 고급져 보이지."
"정말.. 와, 이런 게 있었네요. 그런데 고급지다는 표현은 좀 오버하는 거 아녜요?"
"아냐, 아냐. 예를들어 고갱의 합성주의 그림을 보면 평평한 면에 색을 입힌 것이라서 가까이서 보든 멀리서 보든 차이를 못느낀단다. 그런데 고흐의 그림은 그렇지가 않은 거야. 이런 기술은 어떻게 탄생한 걸까? 고흐의 머리 속에는 멀리서 보면 어떤 형상이 맺혀질지 영화관 스크린처럼 떠오르는 장면을 펼쳐놓으며 붓질을 한게 틀림없어. 이건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닐까 싶네."
한나는 반 고흐를 향한 히타이트의 막무가내식 사랑을 말리지 않았다...
"우와~ 이 작품이 이토록 멋진 캔버스였어? 교과서나 사진으로 볼 때는 그저 평범한 그림으로 보였는데. 이렇게 감각있고 인상적인 풍경화로 다가올 줄이야.."
히타이트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경험한 사람처럼 기뻐했다.
"오~ 정말 현장에서 감상하니 느낌이 확연히 달라요. 이래서 미술관 나들이를 하는 거군요."
"그래. 그렇게 미술관 나들이를 하다보면 순례자의 길도 걷게 되지."
"ㅋㅋㅋ"
'비교해보면, 위의 작품은 오베르 마을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이것은 아를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프랑스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차이가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가? 나는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단지 대수롭지 않은 자연의 나무요 식물들처럼 여겨질 뿐인데 고흐가 붓질로 직조해낸 그림을 보면 대단한 느낌과 울림을 가져다 주는 건 분명히 알아차린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 그의 붓질과 화폭사이에 숨겨져 있기에 작품을 보는 사람 눈에서 평소 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움터나오게 하는지...'
이상, 히타이트 내면의 울림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 고흐의 임파스토 기법이 한 겹 두 겹 편차를 두며 실행된 것이 드러난다. 즉 흰 꽃은 가장 나중에 덧붙이듯 물감을 찍어 바르며 임파스토 기법의 최종단계를 수놓고 있다. 그게 멀리서 보면 신비한 아름다움과 입체감을 불러 일으키며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의 족속처럼 청색피부를 가진 나무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도대체 저런 피부를 가진 나무가 있을까? 아님 빈센트 반 고흐 아저씨가 가진 상상력의 소산인가?
히타이트는 한국에서 경기남부 지역을 산책할 때 줄기가 왼통 새빨간 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매우 놀랐고 인상적이었었다. 그런데 청색피부를 가진 나무기둥이라니...
히타이트가 주장하기를
단언하건대, 고흐의 그림은 현장에서 보면 더 멋있다.
<아를의 풍경> 역시 사진으로 볼 때 허접한 것이라 단정하고 제켜놓는 작품인데 현장(미술관)에서 실제로 감상하는 순간, 오 이런 멋진 그림이라니.. 히타이트는 결국 반 고흐, 그가 그린 웬만한 그림은 모두 괜찮고 멋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된다. 아무리 아트 잡배에 불과하더라도 고흐의 작품을 만나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끌림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고흐에게서 나온 것은 모든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겸허한 자세로 알현해야할만큼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들이요, 챙져야 할 명작이라는 사실이다.
노이에 피나코텍에서 고흐 아저씨는 정점을 때린다.
독일에서 고흐의 명작을 한 전시실 안에서 이렇게 많이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히타이트 씨의 설레발이 계속되지만 딸 한나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있다.
히타이트는 독백처럼 말한다.
고흐에게는 여러 버전의 해바라기가 있는데 그 모든 해바라기 작품들은 제각각 독립적으로 감상하면서 가슴에 새겨야 할 명작이지. 그림의 모델이 된 생 해바라기는 똑 같은데 작품마다 붓질의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볼 필요가 생긴 것이다. 노이에 피나코텍의 해바라기는 노랑색과 더불어 배경으로 칠해진 옥빛 색감으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으며 세련된 느낌마저 일렁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다른 작품에서 강하게 표출되는 노랑색이 이 해바라기 작품에는 덜 사용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해바라기는 화사한 느낌이 살아나 있는데 비하여 노이에 피나코텍 작품은 은은한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히타이트로서는 두 작품을 비교해보았으나 노랑색의 사용법 차이 외에는 특별나게 다른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고흐씨가 그린 작품의 크기는 대체로 작다. 네덜란드 시대의 인물화는 거의 책받침 정도의 크기다. 이 해바라기 작품처럼 길이가 1m정도 되는 그림이 그의 작품 목록에는 그리 많지가 않다. 히타이트는 고흐가 동생 데오로부터 후원을 받아 생활도 하고 그림도 그렸던 넉넉치 못한 삶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마 모네의 수련 연작처럼 대형 작품을 그릴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까? 고흐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두번 세번 처바르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건 마치 건축을 세워 올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함으로써 고흐씨는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이겨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히타이트만이 알아차린 고흐 씨의 비밀이었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해바라기 씨는 거의 3층 건물처럼 물감이 쌓아올려져 있다.
25년 3월 초까지 예당 한가람 전시실에서 열리는 '불멸의 화가 고흐전'에 가보면 이렇게 3층 건물을 쌓아 올리듯 처바르고 찍어 바른 꽃그림을 볼 수 있다.
히타이트는 고흐의 기법을 살펴보고 살펴보면서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었다.
고흐는 그림을 그릴 때 어땠을까, 예를들면 붓질을 쓱쓱 빠르게 거침없이 해댄 것일까? 아니면 때에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한 땀 한 땀 쳐바른 것일까? 고흐처럼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진면목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릴려면 물감을 층층이 쌓아올릴 때 한 번 칠하고 뒤로 물러나서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 지 확인하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물감을 또 처바르는 과정을 거쳐야할 것만 같았다. 만약 내가 그림그리기에 뛰어들었다면 그런 고민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엄청 많은 시간투자를 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은 분위기와 색감이 다르네요."
고흐의 대표작들을 감상하고 나자 딸이 비로소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응, 네덜란드 시대에 그린 작품이지. 그때만 해도 고흐는 밀레나 렘블란트 그림을 모사하는데 열중이었지. 밀레가 대체적으로 어두운 자연풍경을 많이 그렸잖니."
"그래요. 고흐 작품의 진면목은 파리로 나온 이후부터 드러났죠."
"그래서 나는 네덜란드 시대의 작품은 거의 연습수준에 불과한 거라 치부해버렸어. 하지만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네덜란드 시대 작품도 어느 정도 보아줄만 하네.."
"전 이 공방의 창밖으로 보이는 성당 모습이 눈에 익어요. 여기가 누에넨인가..."
"그래. 누에넨의 베짜는 사람. 같은 모티프로 그린 작품이 또 있지 아마.."
고흐 할아방의 초기작품.. 히타이트는 그의 초기 작품은 칙칙하고 어두워서 그다지 선호하거나 애정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땐 특히 그런 선입견이 가중되고 중첩되어 내면에 켜켜로이 쌓여왔다. 그런데 현장에서 실물을 대면하면 의외로 초기작품에도 그만의 매력이 스며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 히타이트는 화가들의 인생역정을 떠올려 본다.
유명 화가 중에는 초기작품과 화가인생의 정점에 올랐을 때의 작품 사이에 커다란 괴리감(?)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괴리감이라기 보다 서양화단의 대가들이란 초기에 비하여 절정기에 그려진 작품에서 자신의 그림실력이 일취월장 발전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빈센트 반 고흐와 에드워드 호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초기 그림실력을 비교하면 고흐가 호퍼보다 더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사견?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내가 단정적으로 확신해서 하는 말이다.
"으앗, 고갱의 작품인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네.."
고갱의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히타이트가 착각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는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아방가르드 나비스 운동, 생테티즘, 클루아조니즘에 영감을 준 프랑스 화가이다. 파리에서 태어났고 1888년 여름, 퐁타방(Pont-Aven)으로 여행하여 폴 고갱(Paul Gauguin)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예술가 그룹에 합류했다. 퐁타방 예술가 집단에 있는 동안 그는 고갱의 감독하에 부적(The Talisman)으로 알려진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순수한 추상에 가까운 클루아조주의의 극단적인 실천이었다. 미술사조측면에서 보면 그는 Les Nabis(나비스) 그룹의 일부인 후기 인상파 화가였다.
"진짜 고갱의 작품도 나타났네."
히타이트는 타히티 시대가 아닌, 퐁타방시대 고갱의 작품들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작품 <Four Breton Women>을 노이에 피나코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큰 기쁨이었다.
조금 더 살을 붙여보자.
빈센트 반 고흐의 친구였던 외젠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였다. 살아 생전 고갱은 끝까지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제 고갱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인상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색채와 합성주의 스타일의 개척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고갱의 유럽시대 그림을 좋아한다는 것은 클루아조니즘이나 합성주의 스타일에 나름대로 매력을 느꼈다는 얘기가 된다. <네명의 브리톤 여성> 역시 합성주의에 기반한 작품이었다.
<Der Radrennfahrer>.. 해석하면 '자전거 타는 사람'이 된다.
아, 이거 작품 제목으로 맞는 걸까?
히타이트는 작품과 제목이 매칭되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추가해 본다.
덤으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 작품은 <Le Cycliste>라고 불리며 당시 자전거 타는 사람이자 기수인 Gaston Colin(가스톤 콜린)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아항.. 그럼 자전거 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전거 타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조각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제목인 모양이다.
호들러의 이 그림은 제네바 호수 북쪽 기슭에서 론강 어귀를 바라보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텅빈 공간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대자연의 원초적인 힘이 느껴진다.
앙리 에드몽 크로스는 본명이 Henri-Edmond-Joseph Delacroix(앙리-에드몽-조제프 들라크루아)였다. 당시 유명 화가 외젠 들라클루아와 혼동되는 걸 피하려고 크로스라는 성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처음 자연주의자였으나 1891년 조르주 쇠라가 죽고난 후 분할주의(점묘)에 헌신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를 포함하여 다른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헬레네 폰 노스티츠(Helene von Nostitz)는 살롱니에르이자 중요한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뮤즈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그녀의 가장 중요한 저서 "구 유럽에서"(1924)에서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이전 귀족과 예술가들의 고도로 교양 있는 삶을 묘사했다. 그럼 로댕과의 관계는?
Henry Clément van de Velde(앙리 클레망 반 데 벨데)는 벨기에 화가, 건축가, 가구 및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그의 작품에서 그는 아르누보 식물 형태를 사용하고 산업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폴 세잔의 정물화다. 아름답기는 한데 조작된 혹은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매력을 담아낸 느낌이 든다.
그래서 히타이트는 세잔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톨루즈 로트렉.. 불구의 몸으로 물랑루즈의 포스터를 전문으로 그렸던 남자.
이런 작품도 있었네..
클로드 모네는 1874년에 아르장퇴유의 다리를 그렸다. 아르장퇴유의 오래된 도로 다리는 보불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주철, 석회암 잔해, 콘크리트로 된 현대적인 구조물로 대체되어 철도와 함께 작은 마을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렸다.
모네는 산업과 인구 증가로 인해 아르장퇴유에 변화가 생긴 것을 한탄했지만, 그 배경의 현대적인 측면을 낭만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그 지역과 그 시대의 특징으로 예술에 수용했다.
여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 르누아르, 그는 인물묘사에 선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초상화에도 인물의 윤곽을 드러내는데 선이 사용되지 않았다.
히타이트는 그렇게 그림을 그리려면 창작에 더 어려움이 따르지 않았겠나 싶은데, 놀랍게도 르누아르는 화가 생활 60년동안 6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럼 1년에 100편씩? 벽돌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듯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설마..
스케치, 크로키 등 간단한 작품까지 포함해서 6천점이라는 얘기겠지.
르누아르는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이자 인상파 화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여체를 그리는 데 있어서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붓 터치로 유명하다. 기법이 매우 독특한데, 윤곽선이 모호하도록 문질러 부드러운 형태를 창조하면서 고전적인 조화를 추구하였다.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를 통해 모네, 시슬레, 바지유,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게 된 르누아르는 그림 자체를 즐기며 유쾌하게 떠드는 소리, 사랑스러운 밀담의 모습, 편안한 휴식과 유희가 공존해 있는 즐거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낙천적인 르누아르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고 대중이 즐기고 좋아하는 예술에 가치를 두었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미술을 통하여 의도하는 성과를 추구했던 평론가, 관객으로부터 비난받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히타이트는 예술, 특히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분야라는 전제하에 르누아르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르누아르는 1900년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화가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잡아매고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창작에 임하여 기쁨을 잃지 않았다.
점묘화!!
테오 반 리셀베르게의 작품 <포츠담 근처 상수시 공원의 분수>를 둘러보던 히타이트는 갑자기 뇌리에 번개불처럼 스쳐지나가는 상념의 일깨움을 느꼈다.
혹시, 고흐는?
히타이트가 보는 관점에서 그는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형태론적인 미학이 드라나는 작품을 제작했었다. 바로 그점,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직관적인 추론 하나가 불현듯 머리속에 떠올랐다. 어쩌면 반 고흐는 당시 유행하던 점묘화가들의 기법이 뒤로 물러서서 감상할 때 점점이 찍어 작업한 내용물이 멋진 풍경으로 치환되는 걸 경험하고 자신의 작품에 도입한 것이 아닐까?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궁리질이었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담은 세잔의 자화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라파엘로와 뒤러처럼 잘 생긴 용모를 한 거장들의 자화상을 보다가 세잔의 자화상을 보면 뭐랄까, 아무리 인상이 좋지 않더라도 이왕이면 좀 착하게라도 그릴 것이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히타이트가 보는 자화상 속 세잔의 모습은 참 예술가답지 않다. 그의 인상은 마치 심술궂은 고리대금업자나 감옥의 교도관을 연상시킨다. 세잔은 이처럼 비호감형인 자기 얼굴을 평생 30여 점이나 그렸다. 그나마 〈서른여덟 살의 자화상〉은 세잔의 자화상 가운데 덜 심술궂게 보이는 작품에 속한다. 세잔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스승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소개로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한 뒤였지만 그의 화풍은 차츰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히타이트는 고흐 작품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고갱, 모네, 드가 그리고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는 시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입체파라든가 추상화라든가 미술에 지나친 작가 개인의 이데아를 쑤셔 넣으려 용쓴 흔적이 보이는 작품은 왠지 불편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면 이러한 성향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정도까지 취향이 변질되지 않았다. 고흐 씨의 초대에 감사한 마음을 품으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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