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작품감상
이제 1층으로 내려간다.
1층에는 로댕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 로비와 그외의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갱의 작품도 만난다. 인상파 잔치가 벌어지는 형국이다.
폴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짧은 시간을 보낸 후 1889년과 1890년에 다시 원래 활동했던 브르타뉴를 작품 창작의 장소로 낙점했다.
1889년 프랑스 북서부의 퐁타방에 머물렀던 이 시기에 고갱은 자기를 방문한 에밀 베르나르의 작품에 자극을 받았고 이내 명료한 윤곽선의 색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은 타인으로부터 배우거나 흡수하는데 굉장히 열린 자세였던 것 같다. 즉, 틀루아조니즘은 고갱의 개발기법이 아니라 에밀 베르나르에게서 빌어온 것인데, 단순히 빌어왔을 뿐 아니라 그 기법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고갱이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두 브르타뉴 소녀>는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1889년 가을 브르타뉴 타운 르 풀두(Le Pouldu)에서 제작된 것으로, 캔버스 안에는 그 지역의 옷을 입은 두 소녀가 묘사되어 있다. 브르타뉴 지방은 아마도 프랑스의 여타 지역에 비하여 소외된 탓인지 소녀들의 경계하는 듯한 눈길과 튼실한 맨발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고갱이 소녀들에게서 발견한 소박함과 야생의 편린을 작품으로 보여준 것이다.
앞선 작품 속의 두 소녀 모습에서 살펴보았듯이, 영국 해협과 대서양이 맞닿아 있는 프랑스 북서부 지역인 브르타뉴는 19세기에 들어와서도 프랑스와는 다른 켈트족의 문화색이 짙은 고대 풍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근대 문명이 미치지 않은 소박한 세계를 선호하던 고갱이었기에 그곳 브르타뉴의 퐁타방(Pont-Aven)지역에 마음끌리지 않았겠는가. 고갱 씨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그곳 퐁타방에서 살았다.
작품 <브르타뉴 풍경>은 1888년 가을, 아를의 반 고흐를 만나러 떠나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브르타뉴 체류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인상파 스타일에서 자신만의 평면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나타내는 작품이다. 팔레트는 차분하고 터치는 인상파의 터치와 비슷하지만 개체의 형태는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큰 색상 블록으로 표현되어 있다. 고갱이 브르타뉴에 머무는 후반부에 나타날 변화된 스타일을 예고하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히타이트는 작품의 좌측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묘사된 일꾼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다. 어딘가 엉성하고 대충 그려진 느낌이 들어 웃음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아, 고갱 씨가 나에게 웃음을 선사할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인데..'
고갱 씨의 작품인가 했었는데...
히타이트가 중얼거릴 정도로 샤를 코테의 이 작품은 얼핏 보면 폴 고갱이 그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독특한 문화와 생활 방식을 유지한 브르타뉴 지역의 여성들 모습을 평면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샤를 코테 역시 에밀 베르나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걸까? 아니면 코테는 고갱을 흉내낸 것일까. 인상화 화가들의 얽히고 설킨 영향력 수수의 관계는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히타이트가 무슨 행렬을 그린 걸까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작품에서 샤를 코테는 성모님과 아기의 동상을 어깨에 메고 가는 어린 소녀들의 어둡고 깊은 명상에 잠긴 표정을 담아내었다. 무슨 종교의식인 모양이다. 암튼, 히타이트가 보기에 Cottet의 작품은 리얼리즘과 고조된 감정을 통합하는 특별한 감성의 표현에서 밀레와 초기 반 고흐의 작품을 닮아 있었다.
나비파의 화가였던 세뤼지에는 1888년에 고갱을 찾아 처음으로 브르타뉴 지방으로 갔으며, 그곳에 체재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도 브르타뉴 특유의 의복이나 코아후(머리장식)를 착용한 여성들이 물가에 모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관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초목의 녹색 및 바위 표면의 푸른 빛이 강면의 붉은 색 및 지면의 황토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비자연주의적인 색채의 선택이나,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색면, 형체의 단순화 측면에서 우리는 고갱이 에밀 베르나르의 화풍을 모방했던 <크로아조니즘> 양식의 잔향을 발견할 수 있다. 알고보면 크로아조니즘의 영향을 입은 화가들이 한 둘이 아니었네.
'그런데, 고갱 뿐 아니라 다른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서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네.
브르타뉴 여인들은 어딘가 동양적인 내음이 나는 듯해..'
고갱을 스승으로 삼았던 나비파의 화가들 중에서 모리스 드니는 이론적 지주였으며, 경건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화의 쇄신에 이바지하였다. 이 작품을 제작한 1890년, Denis는 처음으로 살롱에 참가하였고 아울러 아래 소개한 그의 유명한 그림 정의가 포함된 에세이를 출판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볼 때 특정 순서로 조립(조합)된, 색상으로 뒤덮여 있는 평평한 표면이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후기인상파로부터 받아들인 기법인 점묘법 외에도 수직으로 배열된 구성과 시그니처 형태에서 일본 우키요에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점묘법을 통해 구현된 모자이크 같은 장식 효과나 종교적이면서 도상적인 형상을 표현한 것은 모두 이 시기 드니 작업의 특징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은 친숙한 일상에 부여된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 채워져 있어 드니의 상징주의 기법을 훌륭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점묘법에 영향을 받아 그린 위 작품 <암탉과 어린 소녀> 제작 시기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에 작업한 <글씨를 쓰는 소년>이다. 모리스 드니는 후기로 가면서 종교적 작품제작에 매진하였다. <글씨를 쓰는 소년>은 그런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장식적인 기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기존 화풍과 비교하면 머리카락 끝부분에 잔상처럼 남아있는 장식미의 흔적을 제외하면 그냥 곱상한 이미지의 소년을 묘사한 그림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았다.
한 여자가 디지탈리스 식물과 나무로 둘러싸인 숲에 서 있다. 세로로 배치된 키가 큰 캔버스는 나비파 화가 Ranson(랑송)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장식적인 구성으로 만들어졌다. 캔버스의 4면은 태피스트리를 연상시키는 장식적인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 이 그림이 원래 태피스트리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나비파 화가들은 그림의 평면적 특성과 평면적 이미지의 장식성을 매우 중시했으며 중세와 후기의 태피스트리를 작품 창작의 가장 좋은 모델 중 하나로 간주했다. 자줏빛이 도는 종 모양의 꽃이 피는 식물인 디지탈리스(폭스글로브)는 전경 전체에서 큰 형태로 자라고 있다. 이 식물의 잎은 고대부터 심장의 강장제로 알려져 있으며 작품 속에서 이 식물의 꼬임 동작은 나비파의 장식적 미학을 구현한 것이다. 나비파는 일본과 중세 유럽의 장식미술을 연구한 결과 평면적 요소와 곡선을 많이 사용하여 결국 아르누보 양식을 탄생시켰다.
키스 반 동겐, 들어본 화가 이름인데 히타이트 머리에는 선명하게 그 화가의 정체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경우 아는 화가라 말하면 안 된다.
1920년대 반 동겐은 유행하는 사회, 거리 풍경, 세련된 옷을 입은 여성을 묘사하는데 주력했다. 그 사례의 하나가 이 작품 <카지노 홀>이다. 작품 속에는 동겐의 이 시기적 특징을 대변하는 가늘게 늘어진 형태의 길쭉한 인물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배경에 있는 인물과 전경에 있는 인물의 크기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높은 유리창과 함께 얼굴 특징보다는 옷차림에 주의를 기울인 듯한 점 등이 이 작품을 장식적인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화가 로랑(Laurent)은 학생 시절 쇠라(Seurat)를 만났고 그에게서 배운 색상 이론을 기반으로 점묘주의자(Pointillist)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Puvis de Chavannes(퓌비 드 샤반드)의 영향으로 상징주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만년에 Laurent는 부르주아 생활을 테마로 삼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높은 테라스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을 묘사한 작품 <테라스의 두 여인>은 로랑의 후기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관찰되는 로랑의 섬세한 붓놀림은 학생시절 쇠라에게서 배운 기법에 기초한 것이다.
이 작품의 모델인 다케코 쿠로키(Takeko Kuroki)는 마츠카타 코지로(Kojiro Matsukata)의 조카였다. 당시 Takeko는 일본 재무성의 국제 통화 상황 조사관인 남편 Sanji Kuroki와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열렬한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쿠로키 씨는 지베르니 아틀리에서 클로드 모네에게 마쓰카타를 소개한 인물이었다. 그 인연으로 마츠카타는 많은 작품을 모네로부터 직접 구입할 수 있었다. 히타이트가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만난 여러 점의 모네 분신들은 그렇게 아시아의 품에 안기게 된 셈이다. 저 여인이 마츠카타 컬렉션에 포진하고 있는 다수의 모네 작품의 탄생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가 아망 장(Aman-Jean)은 왜 기모노를 입은 Takeko의 초상화를 그렸을까?
일본인들은 서양땅에소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다녔단 말인가?
아니면 화가의 요청에 따라 기모노 복식을 차려입은 것일까?
히타이트는 뜬금없이 그런 궁금증을 뭉게구름처럼 정수리 위로 떠올리고 있었다.
화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면 구것은 아마 모네와도 연결되어 있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자포니즘 열풍인 탓이겠지.
21세기 지구별에 울려퍼지는 K-팝, K-Art의 물결처럼...
후지타 쓰구하루...
역시 히타이트 귀에 한번 채집된 이름이었다.
20세기초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일본화가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냥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가자. 곁다리일 것 같으니.
19세기 후반 덴마크를 대표하는 화가인 Vilhelm Hammershøi는 아내 Ida의 뒷모습을 자주 그렸다.
아, 그래 그런 화가가 있었지.
덴마크 화가는 거의 친숙한 인물이 없었는데 특이하게 뒷모습한 주구장창 그렸던 화가라 뇌리에 박힌...
작품을 보면, 두 개의 방을 잇는 문이 이쪽으로 열려있어 그의 아내 Ida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이다는 피아니스트였나?
전체구도는 Vermeer(페르메이르)의 영향은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이미지의 비현실감이 17세기 네덜란드의 친밀한 풍속화와 구별되는 요소이다. Ida의 머리 위에 걸린, 무엇을 표현했는지 애매한 동판화가 수수께끼같은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르누아르는 작품에 꽃을 자주 넣었고 특히 장미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건 인정.
히타이트는 딸과 함께 서유럽 미술관 순례여행을 떠났던 201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미술관에서 완전 꽃으로 둘러싸인 <책 읽는 소녀>그림을 감상한 기억이 새로웠다.
가장 예쁜 그림을 그리는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은 기증자 우메하라 류자부로(Umehara Ryuzaburo)도 이러한 꽃 사랑을 공유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거친 붓놀림으로 그린 자줏빛 빨강과 파랑 색상의 조화는 이 작품이 르누아르 말년에 만들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볼살이 많고 통통한 스타일은 미술애호가라면 다 인지하고 있는 르누아르가 좋아하는 여성상이었다.
작품 <미친 여인>에서 보는 바와 같이, Soutine(수틴)의 인물화는 극도로 변형되고 폭력적인 붓놀림과 강렬한 색상 대비가 특징이다. 그는 대상의 개성과 성격을 시각화하는데 매우 능숙한 기술을 발휘한 화가였다.
작품 <매드우먼>에서 동그랗게 뜬 눈, 일그러진 얼굴, 팽팽하게 긴장된 어깨와 팔, 거칠게 흐트러진 머리는 서로 조합되어 전체 구도에 묘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여성의 붉은 의상과 수틴의 거친 붓놀림이 그러한 인상을 더욱 고조시킨다. 동향의 화가 샤갈이 그의 민족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작품에 진하게 표출하였던 것에 비하여, Belarusian painter(벨로루시 화가) 수틴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빈곤과 억압에서 비롯된 박해 콤플렉스 때문인지 분출하는 그의 표현은 항상 폭력적으로 나타났다.
'소박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프랑스 화가 앙드레 보샹은 원예업에 종사하면서 40대 중반 이후 독학으로 회화에 입문하였던 인물이다.
오, 그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화단에 입문한 화가는 앙리 루소, 한 사람뿐인 줄 알았더랬는데 또 있었단 말인가!
1921년 살롱 도튼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건축가 겸 화가인 르 코르뷔지에였다고 한다. 보샹은 신화나 고대사를 주제로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운하의 풍경을 그린 것인데 정물화를 연상케하는 느낌이 있다.
장 필립 아르튀르 뒤뷔페(Jean Philippe Arthur Dubuffet)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미학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 접근 방식은 소위 "하위 예술"을 수용하는 반면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피했다. 그는 예술 운동 art brut의 창시자와 이 운동이 낳은 작품 컬렉션(Collection de l'art brut)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다작의 예술 경력을 쌓았고 평생 동안 많은 전시회에 출연했다.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에서 태어나 파리와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한 피카소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공인받고 있다.
일생 동안 피카소는 창조와 파괴의 순환을 따랐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입체파의 구조주의를 해체하거나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작품은 1960년 4월에 제작된 <누워있는 나부> 연작의 하나이다. 이 해체주의 연작에서 피카소는 여성의 신체를 머리와 가슴, 복부, 엉덩이, 양팔, 양다리 등 각 부위로 떼어내고 다시 그것들을 퍼즐처럼 조합함으로써 인체의 재구성에 도전했다. 평론가들은 비입체주의적 관점에서 누드 여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하고 있다.
조제프 페르낭 앙리 레제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여 파리의 미술 학교,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배웠다. 인상파 마티스, 세잔의 영향을 받아 1911년경부터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여,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기계적인 동적 미를 흡수하여 명쾌한 구도로 정물·인물을 그렸다.
폴 시냐크은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다. 그 후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점묘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다. 여기서 점묘법이란 색채의 명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물감을 섞지 않고 작은 점을 화면에 배치하는 기법을 말한다. 미술 하수 히타이트에게는 쇠라의 작품보다 시냐크의 그림이 육안으로 조금 더 알아보기 쉬운 느낌이었다.
시냐크는 1892년 Seurat(쇠라)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H. E. Cross의 노력 덕분에 그 이듬해에 지중해 요트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는 여행에서 작은 어항 생트로페를 발견하여 이후 10년 동안 생트로페와 파리 사이를 오가며 그림을 그렸다. 이 기간 동안 Signac의 그림은 선형적 엄격함이 부드러워졌고, 네오 인상파 스타일을 특징짓는 독특한 안료 점의 크기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후 Pointillists의 첫 번째 목표였던 광학 혼합을 능가하여 개별 터치의 특성과 그 사이의 대비를 강화했다. 생트로페 항구를 묘사한 이 작품은 이 시기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로, 신인상주의에서 시냐크의 출현을 알리고 야수파의 탄생을 암시하는 세기 전환기를 대표하는 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단의 보수진영을 대표하는 부그로는 대작 역사화로 아카데미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었다.
사랑스러운 소녀를 그린 작품으로 영국 미술수집가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데 모델에게 그리스 조각의 포즈를 취하게 하여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Pierre Puvis de Chavannes(피에르 퓌비 드 샤반드)의 <가난한 어부>는 같은 제목의 오르세 미술관 소장 작품을 변형한 것으로 차분한 채색, 평면, 색면을 사용한 간결한 구성 등 작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히타이트는 종교화로 착각했을 정도로 작품 분위기에서 성서적 삘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적 속에 머리를 숙인 어부, 곁에서 잠든 아기의 모습은 성경 속의 한 장면이라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 싶었다.
저곳은 혹시 갈릴리 호수가 아니었을까?
이상, 히타이트의 설레발이었다.
50세 이후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북부의 지베르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정원을 짓기 시작했다. 수목과 꽃을 심고 연못에는 수련을 키웠으며 그것을 반복해서 그렸다. 날씨와 시간에 따른 수면의 끊임없는 변화는 작가의 관심을 끈다. 이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 그는 이미 거의 20년 동안 수련을 그렸다. 세세한 부분을 과감하게 배제한 물 위의 꽃과 그림자의 표현은 미래의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을 예견하는 혁신적인 모네를 담고 있다.
미술관의 넓은 공간, 그곳에 들어가 멀찍하니 서서 대작을 감상할 때, 깊은 감흥이 내면으로부터 움터 나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겪음은 인터넷이나 화집으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도 대작으로 그려진 것은 커다란 뮤지엄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비로소 그 작품의 멋과 맛과 진가를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다.
히타이트는 중얼거린다.
'이런 기분, 이런 느낌을 맛볼 수 있으니 일개미를 불러 모으는 여왕개미처럼 유명 미술관 역시 세계 도처로부터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닐까?'
모리스 드니는 1908년 브르타뉴 지방 페로스 기렉(Perros-Guirec) 해안가에 별장 '실렌시오(Silencio)'를 구입하여 매년 여름 가족과 함께 보냈다. 이 작품에는 해안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가족들이 그려져 있는데 화면을 채우는 햇빛의 반짝임이나 대범하고 양감 넘치는 나체 표현에는 드니의 고대 미술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 있다. 한편 고유색에 얽매이지 않는 풍부한 배색, 무늬와 같은 물결 묘사에는 세기말의 나비파로부터 이어지는 드니의 장식예술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Bonnard는 장식 효과를 최대한 활용한 대규모 캔버스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 그림은 1990년대 초에 NMWA에 기증되었으며, 파리의 주요 미술상인 Bernheim-Jeune(베른하임 준) 형제의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4점의 그림 중 하나이다. 시대를 초월한 목가적 풍경을 담은 다른 3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노동자들이 모이는 파리 근교 아니에르를 무대로 한 활기찬 도시의 '현대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파리의 센 강 하류에 있는 뇌이(Neuilly)의 다리를 배경으로 삼았다. 이 지역은 많은 공장이 있던 19세기에 개발되었으며 Bonnard는 활기찬 현대 도시 생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이 설정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년의 모네는 지베르니 연못가에 아틀리에를 짓고 '대장식화' 제작에 몰두한다. 높이 2m, 총길이 90m의 장대한 <수련> 대장식화는 현재 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중 <나무 그림자>와 관련이 있으며, 수련 못의 수면에 버드나무가 거꾸로 비친 광경을 그린 것이다.
1921년 마츠카타가 모네에게서 구매했다.
그후 오랫동안 로댕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던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북부 시골마을로 옮겨졌으며 그 와중에 크게 손상되었다. 적국인 재산으로 프랑스 정부에 강제 접수된 마츠카타 컬렉션 작품 중의 하나이지만 심하게 손상되어 전쟁이 끝난 후에 작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환 작품 목록이나 프랑스 유치 작품 목록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2016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발견되었고 2017년 마츠카타 집안은 이 작품을 국립서양미술관에 기증하였다.
................
히타이트는 사유해 본다...
'왜 마츠카타 컬렉션을 전시하는 국립서양미술관에 고흐 작품은 1점도 안 보이는 걸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히타이트가 놓친 거였다.
바로 이 작품, <장미>!
일본인들은 고흐의 작품을 유달리 좋아한다. 고흐가 일본의 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고 우키요에를 그의 그림에 직접 그려 넣기도 해서인지 일본인들은 고흐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고흐인 만큼 마쓰가타 컬렉션도 고흐 작품을 건너뛸 수 없었을 것이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장미(Roses)〉는 1889년 작으로 화폭 전체에 초록이 가득하다. 초록 풀이 가득한 정원에 분홍빛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다.
고흐가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갱과 크게 다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1888년 12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1889년 5월 고흐는 정신분열증으로 아를 인근의 생레미(Saint-Remy) 병원에 입원한다. 이 그림은 입원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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