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이어서)
중세종교회화 2
국립서양미술관을 휘휘 둘러보던 히타이트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마츠카타 컬렉션은 인상파 화가들 작품이 메인이었는데 서양미술관측은 그 후 중세회화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여서 몸집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히타이트의 의문은 국립서양미술관을 일주하면서 어느 정도 풀리게 된다.
그것은 인상파 이후 현대미술품의 경우에는 작품 기중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립서양미술관측은 중세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무지막지한 수집에 열을 올린 셈이다. 그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그네들은 스스로를 탈아시아국가로 명명하곤 한다. 그러한 주장에 근거를 삼기 위해서 구축해야 할 한 가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설전시 미술관을 확보하는 것이다. 즉, 그들의 행동에는 '아시아의 루브르'를 만들고자 하는 전략적인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히타이트는 생각했다.
'일본인들의 판단이 옳았다!'
한국은?
21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건희 컬렉션'을 기반으로 그러한 일을 추진하려 용쓰고 있다.
'잘 되야 할 텐데...'
히타이트는 기독교 성화에 거부감이 없다. 인생의 이른 시기에 기독교 문화에 입문하여 그 그늘에서 살아온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서유럽 여행 시 각 나라의 성당이나 미술관에 가면 공통분모를 형성하는 테마가 몇 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관련된 그림, 그리고 '성모 마리아' 관련된 그림이다.
그리고 조금 더 좁혀서 보면 '피에타'라는 주제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신약의 4대 복음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비탄에 빠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담은 '피에타'는 서유럽 가톨릭 예술에서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테마로 보였다.
위에 소개한 피에타를 그린 구스타브 모로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신화나 성경 속의 장면을 즐겨 그린 화가였다.
이 작품에서 히타이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위에 나타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였다. 그리스와 함께 성령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린 비둘기에게 빛의 후광을 배경처리한 것이나 추상적 표현으로 마무리한 것이 독특했다.
그런데 작품설명서를 읽어보면 등 뒤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암시하는 두 명의 천사를 묘사했다고 하는데 히타이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왜지? 신심이 얕았기 때문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동산으로 오를 때 기진맥진하여 지친 모습을 보이던 예수님의 얼굴을 아마포천으로 닦아드린 여인이 있었다. 바로 베로니카이다. 그때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성 베로니카의 수건(아마포천)에 그리스도의 얼굴이 새겨졌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 예수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그린 유물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에서 이 아마포 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사람의 아들 모습에 가장 근접해있는 보물이었던 셈이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15세기 피렌체에서 활약한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파(Domenico Ghirlandaio's school)에 소속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보기에는 아무리 베로니카의 손수건이 신화나 전설이 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마포 천에 드러나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치 페인트로 그려낸 유화처럼 선명하게 묘사한 것이 오히려 빛을 잃는 느낌이 들었다. 꾸며낸 것처럼 여겨지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Dirk Bouts(다르크 보우츠) 화파에 의해 제작된 2단화이다. Salvator Mundi(살바토르 문디, 레오나르도 다 빈치作)와 고난을 겪는 그리스도를 결합한 것을 "Imago Salvatoris Coronati(왕관을 쓴 구세주의 이미지)"라고 하는데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그리스도 도상법은 Dirk Bouts(다르크 보우츠) 화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Bouts 스튜디오의 구성원은 이 이미지의 사본을 여러 개 만들어 슬픔에 잠긴 마돈나의 이미지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사실 14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원래 Bouts 그림의 복제품 중 하나라고 한다. 암튼 히타이트는 작품감상하는 순간, 어느 화가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고통을 느끼며 우는 인간 그리스도의 눈을 새빨갛게 묘사한 것이 인상적으로 보였었다.
'유디트 이야기' 역시 '피에타'와 함께 서양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이다. Judith(유디트)는 한국으로 치면 일제강점기의 논개를 떠올리게 하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영웅이었다. 그녀는 미모를 무기로 적장 Holofernes(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와인에 취해 누워 있는 그를 죽임으로써 고향인 Bethulia(베툴리아)를 구하였다.
작품에서 히브리 여인 유디트(Judith)가 갓 잘린 남성의 머리를 들고 차가운 시선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서양회화사에서 유디트는 조신한 모습으로부터 적나라한 나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화가 경력의 절정기에 이른 크라나흐 특유의 섬세한 붓놀림이 여자 영웅 유디트의 이미지를 잘 살려내고 있다. 유디트는 독일의 르네상스 화가 Lucas Cranach Elder(루카스 크라나흐)가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성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은 이탈리아 베로나 출생인 파올로 베로네세의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 있는 인물이 성모 마리아,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이 성 캐서린(카타리나)이다. 특별하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시간을 할애할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동경 시내의 넓디넓은 공원 속에서 프랑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전시실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국 미술관에서 누리기 힘든 호사를 즐기는 히타이트. 그는 아주 유명한 작품을 알현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이 마치 유럽의 중세 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좋은 내음을 맡는 것 혹은 향긋한 버러지가 움터나오는 봄날의 향기에 취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겪음이라 생각했다.
'아, 이 작품은 조금 유아틱해 보이는군..'
히타이트는 속사람 '람시스'가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잠시 방심했다.
"이봐, 히타이트. 그건 아니지. 이것봐. 이 화가는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젖가슴을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있잖니."
람시스가 바로 튀어나오며 한 마디 하는 것이다.
"어? 진짜 그러네. 그런데 괜찮아. 옆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돌려주고 있으니까."
"뭐. 그렇기 하지만. 근데 이 남자는 요셉이야 아님 목동이야?"
"낸들 알겠니? 람시스, 나는 성모님 젖통도 못알아본 허접한 남자에 불과한데.."
"ㅋㅋㅋ"
람시스는 히타이트의 꼬랑지 내리는 모습에 맘이 풀어진 모양이다.
'오~ 일본사람들, 유디트 작품과 살로메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네.'
'못 말리는 족속이다.'
히타이트는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었다.
그런데 살로메는 유디트와 닮은 포즈로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이 작품은 살로메가 그녀의 아버지 헤롯 왕의 잔치에서 멋드러진 춤을 추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어 보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쩐지 살로메의 살집이 푸짐하여 잘 먹고 자란 여인처럼 보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근데 헤롯왕의 딸이면 공주라는 얘기군.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세례자 요한의 목을 든 살로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티치아노의 후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티치아노(Titian)의 작품이라는 근거는 선명한 색채의 의상과 장신구, 그리고 살로메의 오른팔과 하녀의 목을 표현하는 붓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엘 그레코(본명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플로스/Domenikos Theotokopoulos)는 히타이트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그리스 화가다.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로 건너간 후, 스페인 톨레도에서 30년간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일생 동안 그렸다.
위 작품에 드러나 보이는 흔들리는 불꽃처럼 길쭉하게 늘어난 인체, 거친 붓놀림, 초자연적인 색채 등은 엘 그레코가 말년에 즐겨 그린 유형이었다.
'그랬군. 엘 그레코의 장난이 개입된 거였어.'
히타이트는 이렇게 늘씬한 남자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이야기라서 잠시 당황했었는데 그냥 넘겨도 될 듯싶었다. 또한 십자가 밑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평생 그리스어로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히타이트가 둘러보며 사진으로 담는 중세 회화 작품들 대부분이 20세기 후반에 구입한 것들이다. 마츠카타 컬렉션에 없는 작품들이 들어와 이곳 서양미술관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며 일본인들의 미술사랑에 경의를 표해야 하나 좀 당혹스럽다는 생각까지 품게된다..
돌치는 17세기 피렌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는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 인물화를 생생하면서 깊이 있는 색감(블루)과 치밀한 묘사로 제작하여 인기를 끌었다.
평생 St. Benedict(성 베네딕트) 수도회의 회원이었던 Carlo Dolci가 39세에 제작한 이 작품에서 히타이트가 매력을 느낀 것은 청색이었다. 색상이 주는 매력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손을 접은 성모의 포즈는 티치아노의 마돈나에서 찾을 수 있으며, 티치아노 이미지의 출처는 16~17세기 스페인에서 매우 유행했던 마돈나에서 찾을 수 있다.
"오, 요하네스 베르메이르도 있군.."
이 그림은 Felice Ficherelli의 작품을 복사한 것으로 초기 로마 순교자인 Saint Praxedis 또는 Praxedes를 묘사하고 있다. 1655년에 제작된 베르메이르의 초기 작품이다.(2014년 경매 회사인 Christie's는 새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며, 그들의 의견으로는 이 작품이 베르메이르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했다고 한다.)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대부분 작품의 사진촬영이 가능하지만 일부 사진 금지를 표시하고 있었고 특이하게 전시실 내부(아마도 르 코르지뷔에 건축물이라서?)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작품의 경우 사진 촬영 금시 표시가 있어서 멀찍한 곳에서 잽싸게 찍어야 했다.
원래 매춘부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개종한 여성이다. 매춘부라는 게 맞나? 이설이 많아서 헷갈린다. 암튼 그녀는 그리스도의 몸에 기름을 바르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의 발을 말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곁을 지켰던 인물로 바로크 시대에 특히 인기 있는 그림 주제였다.
상파뉴는 1648년과 1657년의 다른 두 작품에서 같은 주제를 묘사했다. 상파뉴의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하늘을 향한 헌신적인 경외심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기도할 때 입을 부분적으로 벌리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른쪽 전경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하는 냄비(향유함), 성경, 십자가가 놓여 있다.
페터르 파울 루벤스 화가는 17세기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아이들은 조카(형의 아이들)로 추정된다. 대형 유화를 제작하기 위한 습작으로 추측되는 작품에서 그는 빠른 붓놀림과 생생한 묘사로 아이들의 볼살을 포착하였다. 일반적으로 Rubens의 사실주의는 투명한 색과 불투명한 색을 나눌 때 명암의 색조 및 물감의 두께 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주제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헤럴드 도우의 초기 작품이다. 비눗방울, 해골, 모래시계, 깃털 달린 모자, 박, 기타 정물 요소들은 이 작품의 주제가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덧없음)을 암시하는 <바니타스(vanitas)>임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바니타스란 필연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죽음이나 변화의 상징을 포함하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장르를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눗방울을 부는 소년에게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일반적인 바니타스의 이미지와 약간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근데 어디 날개가 있는 거지? 안 보이는데..'
히타이트는 한참동안 그림 가까이 다가가서 캔버스 내부를 살펴보아야했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바, 어두운 영역에 정물 요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이 Dou 작업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피터르 브뤼헐의 장남이 농민화가로 유명한 동명의 아버지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100점 이상의 버전이 있는 이 작품은, 플랑드르 풍경화의 가장 잘 알려진 구도의 하나이며, 본 작품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설경의 플랑드르의 농촌에서 겨울 놀이에 열중인 아이들의 모습이 가득하다. 그들은 얼어붙은 강에서 독락 돌리기나 스케이트를 지치고 있다. 강의 양안은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고, 우측 해안가의 큰 나무 옆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새 덫도 시야에 들어온다. 화면 앞 좌측부에는 뚫려있는 얼음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스케이트를 타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위험요소로 작용하는 거 아닌가? 낚시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심판이란?
Paris는 사람이름인 듯하다. 그가 심판하는 의미가 담겨진 모양인데..
하지만 히타이트는 이내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냥 그림을 있는 그대로 놔두자.'
따져본다느니 분석한다느니 하면서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그림에게도 히타이트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다.
시골의 허름한 여인숙 앞에서 여행자들이 휴식하는 장면이 정겹게 그려져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이삭 반 오스테데는 그의 형이자 화가였던 아드리안 밑에서 그림을 배운 뒤, 야외의 농민생활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개성을 확립하였다. 28세에 요절했지만 35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18세기 전반, 공원이나 전원에서 사랑에 대해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청춘남녀를 묘사한 장르인 페트갈랑트(fêtes-galantes)가 등장했다고 한다.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우아한 연회)는 아연화(雅宴畵)라고 불리기도 했다. 암튼, Lancret(랑크레)는 이 전통의 계승자였다. 이 장르에 관하여 그보다 한발 앞섰던 화가 와토(Jean-Antoine Watteau·1684~1721)의 작품이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찬 것과 달리 Lancret의 작품은 더 가벼운 목가적인 장면을 즐겨 다루었다.
Claude Lorrain(클로드 로랭)은 17세기 프랑스 고전 회화의 거장이었다.
이 작품은 목가적인 자연을 무대로 다양한 빛과 공기의 뉘앙스를 그려낸 것이다. 중세가 느껴진다.
중세작품을 연속해서 감상하던 히타이트는 불현듯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멍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동아시아인으로 살아오면서 축적시켜보지 못한 기후, 풍광, 문화에 대한 섭취와 소화는 단번에 성취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작품을 늘 걸어놓고 생각나면 와서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면,
언젠가는 눈이 트이고 개안이 이뤄지지 않겠는가'
히타이트가 상설전시작품을 내걸 정도로 충분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제대로된 미술관의 존재를 선진국 판단 요소의 하나로 삼는 이유이다.
'한국은 언제 그런 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까?'
"빨라도 한 세대 이상은 걸리겠지."
불쑥, 람시스가 또 나타났다.
"한 세대? 30년 말이냐? 그렇게 오래?"
히타이트는 람시스의 말에 충격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리액션을 해버렸다.
그렇게 대꾸한 히타이트,
다시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 본다. 나무그늘에 화관을 쓴 목양신 판이 앉아 있고, 그 앞에서 반인반수의 사티로스와 요정(님프)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축제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하체가 체크무늬처럼 묘사된 근육질의 상반신을 가진 존재가 반인반수 사티로스인 듯하다.
마리 가브리엘 카페(Marie-Gabrielle Capet)는 프랑스혁명 전후의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이 작품은 22세때 그려진 그녀의 자화상으로 자신감 넘치는 예술가의 풋풋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유행하던 세련된 파란색 새틴 드레스와 파란색 리본이 어울려 로코코의 화려함이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여기서 새틴(Satin)이란 광택이 도는 매끄러운 소재를 뜻한다. 본래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크 섬유로 짜낸 옷감이었으나, 지금은 인조 섬유로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제작된 당시에는 실크섬유로 짠 드레스를 입었겠지. 마리 가브리엘 카페는 대혁명 후 살롱(관전)에 참가한 최초의 여성 화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초상 화가로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히타이트는 서양미술관에서 이름만 알고 있던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실물 작품도 만났다. 사이즈가 그다지 크지 않은 작품들이라 강한 임팩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힘이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낀다.
그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일뿐 아니라, 19세기 낭만주의 대표자로 손꼽혔던 인물이었다. 동시대에 활약했던 후배화가(인상주의자들)에게는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붓놀림과 색의 광학적 효과를 묘사한 작품이 새로운 사조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또한 그의 이국적 취미에 대한 열정은 상징주의 예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참조사항으로 인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42년 들라크루아는 유명한 여성 소설가 조지 상드(George Sand)의 집에서
상드의 아내와 딸을 성모 교육의 유화 모델로 삼은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10년 후에 그린 같은 주제의 작은 스케일 작품이다. 차이점이라면 전작보다 풍경을 더 강조하고 이미지에 개를 추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들라크루아는 극적인 액션과 화려한 색채로 가득 찬 대작 작품으로 유명한데 이는 그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요한 밤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그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 태생인 아리 셰페르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였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인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30)을 주제로 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민속의상을 입은 그리스 처녀들은 외부 전투로부터 동굴에 숨어 암벽에 걸려있는 아이콘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ugène Delacroix의 걸작 <The Massacre at Chios(키오스섬의 학살, 1824)>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의 그리스 독립 전쟁을 묘사한 또 다른 사례이다.
쿠르베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들 중 가장 반항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1860년대 이후에는 풍경과 사냥 장면을 그린 사실주의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쿠르베는 귀족적 전통이나 부르주아 취미로 인식되던 '사냥'을 민중의 현실에 기반하는 '살아있는 예술'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그런 행적 때문인지 쿠르베는 '사냥꾼 화가'로도 불렸다.
이 작품은 눈 덮인 숲을 무대로 덫에 걸린 여우를 그린 작품이다.
야생동물의 아픔을 각인하듯 여우의 경직된 몸을 꼼꼼한 필치로 묘사한 것이 관람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프랭크 브랭긴 역시 히타이트가 처음 접하는 화가였다. 그는 세기말 장식 예술 운동을 배경으로 타블로와 벽화, 판화에서 실내 장식, 가구 디자인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한 예술가였다. 활약한 분야를 보니 히타이트가 몰랐던 인물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 화가는 바다나 배, 그리고 조선소나 항만 노동자를 소재로 하는 회화를 다수 남기고 있어, 카와사키 중공업의 초대회장이었던 마츠가타가 매료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츠카타 컬렉션에는 무려 400점의 브랭긴 작품이 포함되었는데 1939년 창고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마츠카타 코지로의 초상>은 마츠카타와 브랭긴이 런던에서 만났을 무렵, 그리고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는 1916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본 작품은 캔버스의 뒷면에 「1시간으로 그린다」라고 쓰인 것처럼, 빠른 브러시 격판 덮개로 모델의 모습이 포착한 것이다. 모델인 팔걸이의자에 앉은 마츠카타는 당시 50대 초반이었다. 파이프를 감싸고 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에서 그가 화가와 친밀한 사이였음을 엿볼 수 있다. 화면의 색조는 갈색을 기조로 하고 있지만, 배경을 장식하는 튤립의 꽃과 잎의 장식성이 화면에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림실력이 빼어난 건축가였다. 이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그린 작품으로 원래 사진촬영 금지였는데 찍어놓고 보니 촬영 금지 딱지가 붙어있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유명한 근대건축가로만 알아왔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서양미술관에서 뜻밖에도 그가 남긴 그림은 접하는 행운을 잡은 셈이다.
히타이트 입장에서는 추상화에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스탈이었지만
중세회화 전시실에 뜬금없는 근대작품이 걸려있어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 아니라해도 시선이 끌렸을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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