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화가에 대한 이해를 얻는 방편으로
화가의 삶과 궤적을 간략하게나마 훑어가도록 합니다.
Pegi Nicol Macleod(페기 니콜 맥레오드)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 리스토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윌리엄 W. 니콜은 글리브 컬리지에서 교사로 일했고 오타와 기술 고등학교에서 교장까지 지냈습니다.
그녀는 오타와의 카르티에 스트리트 공립학교와 리스가 컬리지에 다녔고 오타와 미술 협회에서 프랭클린 브라우넬의 지도를 받으며 3년간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1922년경 몬트리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1년간 공부를 계속하는 동안 5개의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27년에는 서쪽 앨버타로 여행을 떠나 스토니 인디언들 그림을 그렸습니다. 1928년, 그녀는 마리우스 바르보 박사와 함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스키나 강으로 더 멀리 가서 서부 해안 인디언들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가티노 강과 언덕을 따라 많은 그림을 그렸고, "장거리 달리기(The Long Run)"라는 작품으로 1931년 윌링던 상을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는 스파크스 스트리트에 있는 라일 코트니 스튜디오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1932년, 그녀는 이튼스에서 첫 몬트리올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바르보 박사가 각색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이야기의 삽화를 그렸고, 이 이야기는 1933년 초 라 프레스(La Presse)에 실렸습니다. 그녀의 그림 30점은 오타와 미술 협회(Ottawa Art Association)에서 전시되었으며, 1933년에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937년, 그녀는 노먼 맥레오드(뉴브런즈윅주 프레더릭턴 출신)와 결혼합니다.
맥레오드 부부는 결혼 직후 뉴욕 아파트로 이사하였는데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들에게 딸 제인이 태어납니다.
자화상
페기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식에게 보다 전통적인 기대를 걸었던 부모는 실망이 컸습니다.
페기는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찾아 다양한 스승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독학했습니다. 그녀가 만난 캐나다의 젊고 자유로운 예술가와 작가들은 페기의 독립심을 키워주고, 그녀의 자발적인 실험 정신과 극적인 시도를 격려했습니다. 페기의 친구 마조리는 부모님을 괴롭혔던 것은 그녀의 그림 때문이 아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부모님은 그녀의 그림 그리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페기가 읽는 책, 연주하는 음악, 생각하는 모든 것, 행동하는 모든 것이 부모님의 교육 방식과는 어긋났죠."
실제로 페기가 1927년에서 1928년 사이 CPR의 지원을 받아 서부로 미술 탐험을 떠났을 때, 어머니는 페기가 여행기를 쓴 책을 파기했습니다. 페기가 수입이 부족하거나 다른 도시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여 부모님이 다락방에서 살도록 허락했을 때조차도, 부모님은 페기의 그림과 스케치북을 습관적으로 버렸습니다. 그러자 반항심으로(아니면 그저 습관적인 충동으로) 페기는 다락방 바닥을 파란색으로 칠했습니다.
그러므로 페기는 사회적 관계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그녀의 작품에 관심 있는 후원자들의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시와 희곡을 썼고, 열정적이면서 낭만적인 만남도 가졌습니다. 그중 하나는 당시 불법이었던 낙태로 이어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리처드 피니와의 5년간의 관계는 너무나 강렬해서 완전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최우선 과제는 활기 넘치는 사회생활 내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생생한 색채와 유동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일상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꽃다발처럼 정지된 대상에서 에너지를 전달하거나, 분주한 거리 풍경의 활기찬 혼돈을 현실 초월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데 능력을 보였습니다.
위에 보는 바와 같이,
그녀는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과시하는 의기양양하고 솔직한 표현을 숨기지 않았기에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페기가 노먼 맥레오드와 결혼하고 나서야
부모님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예술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1937년 뉴욕에서 딸 제인이 태어나자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의 초상화를 수십 점 그렸지만, 동시에 고된 가정생활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일본과의 태평양 전쟁)한 뒤로는 자신의 주요 고객층인 캐나다로 그림을 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남편 노먼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마침내 가장 성공적이고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뉴욕에서 그녀가 목격한 행동과 사건들은 너무나 다양했고, 전해져온 감각들은 변화무쌍했습니다. 이 모든 자극에 대한 그녀의 민감성은 88번가 창문에서 마주치는 혼란스럽고 분주한 모든 것을 캔버스에 담아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캔버스는 움직이는 인물들로 가득 차고, 때로는 구불구불하고 우아하게, 때로는 흔들리고 불규칙하게 선과 형태로 채워졌습니다.
전쟁 중 가난의 고난을 직접 경험했던 그녀는 1947~1948년에 주변 거리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기반으로 뉴욕 빈민가를 탐구하는 110점의 그림 연작, 맨해튼 사이클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여 가난하고 포위된, 혼란스럽고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작품들이 탄생합니다.
인물화
풍경화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Pegi Nicol의 만화경적 비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캐나다에서 독보적이었습니다.
<School Orchestra>는 콘서트에 참가한 인물들의 서정적인 움직임과 역동성을 생생하게 포착해낸 작품입니다. 캔버스에서 관악기의 선율이 마치 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로라 브랜든(Laura Brandon)은 "페기의 그림은 재즈와 같습니다. 주제가 무엇이든, 그녀의 색채와 선은 복잡하고 때로는 활기차면서도 불협화음을 이루는 조화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잊을 수 없는 그녀만의 특징입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전후 풍경
1940년 10월 프레더릭턴(Fredericton)에서 전쟁 미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시작한 페기 니콜 맥레오드는 기지 생활의 활동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 여성들을 로마 신화의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에 비유하였습니다. 전쟁을 다룬 희귀 작품인 "벙크스(Bunks)"는 이 여성 군인들이 동료애를 드러낸 순간의 강인함과 활력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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