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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 - 성모성지 (1) / 대성전 건축 스토리

hittite22 2025. 3. 15.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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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Botta, Chiesa di Namyang(Namyang Church)

 

가시는 길

 

대중교통편으로 접근성이 아주 좋습니다.

  • 지하철 1호선 - 수원역 - 환승센터 4 승강장 1004번, 1004-1번 → 남양성모성지 하차
  • 지하철 1호선 - 수원역 - 환승센터 6 승강장 400번, H404번 → 남양성모성지 하차
  • 4호선 - 금정역 - 4번 출구 - 330번 - 남양성모성지 하차
  • 사당역 10번 출구 1002번 - 남양성모성지 하차
  • 동탄역(동측) 1000번 - 남양성모성지 하차
  •  

남양성모성지 들어가는 길

 

남양성모성지 개요

 

남양성모성지는 병인(1866년) 박해 때 이름 없이 순교하신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순교성지이며,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입니다.

 

남양성모성지 map
진입로

 

초봉헌소

 

초봉헌소 밖 동산에 세워진 성모자상
초봉헌소 전경

 

좁은 길을 따라 마음을 정돈하듯 진입로를 계속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초봉헌소'입니다.

형형색색의 '초'를 구입해서 봉헌드리는 장소인데

'초' 구입 비용은 2000~3000원 정도로 저렴해서 누구나 부담없이 봉헌드릴 수 있습니다.

초가 예쁘고 색깔들이 형형색색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묵주 기도의 길

 

대성당으로 오르는 길
묵주 기도의 길

 

전체적으로 묵주기도의 길은 빛의 신비(1~5단), 고통의 신비(1~5단), 환희의 신비(1~5단), 영광의 신비(1~5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섭렵하려면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듯싶습니다. 진입로에서 마리아 대성당으로 접근하는 왼쪽 소로(小路)에 조성된 것은 빛의 신비-묵주의 길입니다.

 

 

마리아 대성당

 

마리아 대성당 전경

 

이제는 거의 전설이 된 이야기인데 저 육중하게 솟아오른 붉은 벽돌 대성당은 건축을 사랑한 사제 이상각 신부와 ‘영혼의 건축가’로 불리는 마리오 보타(당시 78세)의 만남으로 성사되었습니다. 여기에 신자들의 헌신이 더해져 2020년 마리아 대성당은 역사적인 준공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대성당의 타워모습

 

성지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마리아 대성당의 타워는 높이가 50m이며, 붉은 벽돌 50만 장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1300여 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대성당 내부 신자석에는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창을 통하여 시시각각 다르게 비치는 빛이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좀 설레발친 표현인가요? 가서 확인해 보시지요...

종탑-2019년 11월 4주차 [close up]

 

대성당의 전면 두 기둥 사이에 설치된 종은 모두 7개입니다.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7개의 종은 각각의 음계가 있어 망치로 두드릴 때마다 멜로디가 생음악으로 연주됩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시간에 한 번씩 종소리가 연주하는 음악은 ‘파티마의 성모’ 찬가입니다. 그리하여 매시간 정각이면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에서는 작은 망치가 두드리는 7개의 종소리 음악이 화성의 들판으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이곳 화성 들판에서 멀지 않은(아니, 쪼매 멀다고 해야 하나? ^^) 지역에 이춘재에 의해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 그리하여 그 유명한 봉준호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탄생했던 현장이 잠들어 있는데 그곳까지 종소리가 전파되어 나갈는지...

 

대성당 진입부

 

남양성모성지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한국에서 설계한 첫 번째 종교시설이었습니다.

그 양반 나이가 많아서 한국에서 또 다른 종교시설을 디자인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보타는 해외에서 종교 건축물의 대가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그가 카톨릭 신자라서 그런지 축조한 건축물 중 성당이 가장 많습니다. 프랑스의 에브리, 이탈리아 토리노의 산토 볼토, 베르가모의 요한 23세, 스위스 몬뇨의 산 지오반니 바리스타, 스위스 타마로 산타마리아 엘리 성당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한 성당들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신자들 좌석

 

설교단 쪽에서 신자들 좌석을 바라다 본 모습입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유럽에서 만나는 서양식 성당은 절대로 이런 컨셉이 아닙니다. 파사드로 들어가면 정면에서 마주하는 끝부분에 주제단이 배치되어 있으니까요. 건축물 전체를 놓고 보면 그곳은 후진, 성당건물을 제일 뒤쪽에 해당합니다. 저는 항상 서양에서 2천 년 이상 고수해 온 성당 내부구조에 대한 물음표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왜 주제단을 성당 건물의 정면(파사드) 쪽에 배치하지 않은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남양성모성지의 마리아 대성당은 파사드측에 주 제단이 위치해 있으므로 신자들은 맨 뒤로 가서 입장해야 주제단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게 맞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허접한 사견입니다...

 

 

마리아 대성당 건축 스토리

 

이상각 신부와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 마리오 보타(왼쪽부터). [출처:중앙일보]

 

마리아 대성당 건축 스토리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위 사진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언급해야 합니다.

마리오 보타의 설계, 반지의 조각과 성화 등으로 널리 알려진 남양성모성지 성모 마리아 대성당.. 이 성당의 봉헌 계획을 세우고 건립을 추진해 온 주인공은 한국의 이상각 신부였습니다.

 

마리아 대성당에서 미사드리는 장면

 

몰랐던 사실인데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무명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지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8대 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간행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조선인 4명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김 필립보(1818~1868), 박 마리아(1818~1868), 정 필립보(?~1867), 김흥서 토마(1830~1868).

 

그러나 이곳에는 4명 이외에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본산에서 결정한 건지 한국 가톨릭에서 추진한 건지 모르지만, 이들 무명 순교자가 잠들어 있는 남양 순교지는 1983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상각 신부가 1989년 성역화 사업을 이어받아 대성당 건설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1991년 10월 7일, 이곳은 한국 천주교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성모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유럽에 가보신 분들은 알겁니다. 각지에서 숱하게 만나게 되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들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1991년에 처음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곳 남양에서요..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 전경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

 

성지로 선포된 지 20주년이 되던 2011년, 이상각 신부는 대성당을 봉헌할 계획을 세웁니다.

“저는 새로 지을 성당이 따뜻한 위로와 치유를 건네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현대인 대부분이 그렇듯, 성지에는 상처 입고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많이 오시거든요.”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 전경 2

 

이상각 신부는 자신의 컨셉을 만족시키려면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인 빛과 소리, 공간 구성을 우수한 건축물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할 건축가로 낙점된 사람은 빛의 건축가로 알려진 마리오 보타였습니다.

 

이상각 신부는 프로젝트 수행을 위하여 건축 공부를 했으며, 성당의 본고장 유럽으로 ‘건축 여행’을 떠나 자신의 성당 건설 꿈을 키웠습니다. 1995년 르코르뷔지에 건축 기행에서 마리오 보타의 건축물을 봤고, 1998년 발스 온천장을 방문하여 건축가 춤토어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놀랍게도 세계적인 대 건축가들이 이상각 신부의 열정에 응답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순교지에 성당을 짓겠다는 신부의 뜻에 공감하였고, 최소의 보수로 건축 설계를 약속한 것입니다. 비용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과 대출로 충당했습니다.

 

 

십자가상과 제단화

 

Giuliano Vangi in the Pesaro studio

 

줄리아노 반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격리기간 동안, 페자로에서 남양성모성지에 세워질 대형 나무 십자가 작업을 했습니다. 십자가상의 높이는 3.6m이고 남양성모성지에 세워지면 9m 높이에 서게 됩니다. Vangi에게 이 작품은 죽음을 맞이하는 동시에 삶을 기념하는 몸, 그 자체로 부활의 성격을 지닌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줄리아노 반지의 예수 그리스도상
예수 그리스도의 눈[close up]

 

젊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Vangi는 그의 조카를 모델로 세웠습니다. 매우 큰 눈, 고요하고 관통하는 시선, 맑은 새벽의 그늘을 지닌 머리카락과 수염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상은 그렇게 탄생되었습니다.

Vang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십자가형을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로 원했습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십자가형이 증언하는 고통의 특징을 제거했습니다. 수많은 연구와 테스트를 거쳐 부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수태고지 성화 앞에 선 반지

 

3천 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는 녹지로 둘러싸인 남양성모성지의 마리아 대성당을 위해 Vangi와 Botta는 독특한 설치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반지는 나무 십자가와 함께 길이 40m, 높이 3m로 제작된 두 개의 거대한 유리 패널에 실크스크린 기술을 사용하여 실험적인 성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마치 공중에 있는 것처럼 대성당에 매달린 두 개의 작품은 매우 무거운 유리판으로 제작되었는데 현장에서는 강철 케이블로 걸러놓도록 하였습니다. 반지가 디자인한 최종 작품 두 점은 <수태고지>와 <최후의 만찬>인데 Casinina PU의 Montanari 유리 공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마리아 대성당에 설치된 반지의 작품
T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상

 

줄리아노 반지는 T십자가 위에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습니다. 위 사진처럼요..

 

예수 처형 당시 당시 로마인들은 두 가지 형태의 십자가를 사용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열 십자형 십자가와 이 ‘T’자 모양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열십자 중 ‘†’형 십자가는 ‘라틴 십자가’라고 부르며 서방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반면 열 십자 중에서 가로세로 길이가 같은 ‘+’ 형은 ‘그리스 십자가’, ‘비잔틴 십자가’ 혹은 ‘정교회 십자가’라고 불리우며 해당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개한 ‘T’자형 십자가는 헬라어 알파벳 ‘타우’(대문자 Τ, 소문자 τ)를 닮아 ‘타우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암튼, 십자가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성 안드레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는 X자형이라 이 십자가를 가리켜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태리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타우 십자가를 특별히 사랑해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나 제3회 회원들은 타우 십자가를 많이 착용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럼 줄리아노 반지도 친 프란치스코회 신자일까요?

 

수태고지 앞모습
수태고지 뒷모습
최후의 만찬 앞모습
최후의 만찬 뒷모습

 

<최후의 만찬>은 실제 어떤 분위기였을까요? 우리는 성스러운 작품이므로 고상하거나 혹은 이별전야임을 인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 우울한 면까지 드러나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할 수 있을듯한데.. 그런데 이 작품의 뒷면은 마치 난장판 5분 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어수선한 분위기입니다. 아, 줄리아노 반지 아자씨 맷집이 대단하군요... 겁 없이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반지 아자씨 남양성모성지 제단화가 유작이 되었습니다. 꽤 연로하셨거든요. 아마 지금쯤 하늘나라에 가서 '위에 계신 그분'을 만나고 있을 텐데 혼나지나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수태고지받는 동정녀는 한국처녀처럼 묘사했습니다.
제단 앞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대성당을 방문한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충격을 받게 됩니다. 왜냐구요?

바로 ‘21세기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당시 91세)의 십자고상과 성화(聖畵)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십자가 예수상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비하여, 줄리아노 반지가 조각한 예수 십자고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를 보면 낯설게 느끼거나 조금 심하면 충격적인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십자가 뒤에서 거꾸로 박은 날카로운 못은 손과 발을 뚫고 나와 45도가량 하늘로 솟아 나와 있습니다. 물론 성당 바닥인 아랫 편에서 치켜 올려다보려면 잘 드러나 보이지는 않겠지만..

암튼, 이상각 주임신부는 이를 가리켜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못이 아니라 빛이었던 것 같다”라고 해석했습니다.

 

발등의 못!

 

저는 십자가상을 볼 때마다 저곳에 매달린 죄수들이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꽤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의 체중이 있는데 양쪽 손을 못으로 박은 것만으로 사람 체중을 받쳐줄 수 있느냐는 거죠. 얼마나 십자가 위에 사람을 균형 잡히게 유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움터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발등의 저 못인가요?

 

설마요..

설사 발등에 못을 단단히 박았더라도 결국 체중에 의해 못 박힌 손바닥 살점이 아래로 처지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매달린 사람은 더욱 고통을 받게 될 것이 자명할 것이 아닌가요? 차라리 목에 밧줄을 매어 십자가 세로 막대에 묶어주는 배려(?)라도 해줄 것이지... 아, 이런 잔인한 로마군병 놈들...

 

 

천장에 줄로 매달려 있는 ‘최후의 만찬’과 천사가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를 그린 성화는 신기하게도 뒷모습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알고 보니 보타와 오랫동안 작업해 온 반지는 ‘최후의 만찬’을 재해석하면서 유리로 장식되는 점을 감안하여 뒷모습까지 그리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에 초대받은 제자들은 청바지 같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배신할 것”

이라는 예수의 말에 서로 수군대며 서로 손가락질하는 순간이며 그런 소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홀로 앉아 있는 듯한 예수의 쓸쓸한 뒷모습이 눈에 처연하게 들어옵니다.

 

 

한편, ‘수태고지’ 그림에 등장하는 존재들 중 천사의 포스가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지 않나요? 심지어  뒷면에 드러나는 천사의 모습에도 그런 파워가 느껴집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수태고지 그림에선 한복 입은 여성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신도들을 위한 반지 아저씨의 배려이니까..

 

마리오 보타 추정 인물

 

그런데 '최후의 만찬'이 장면에서 백발머리를 한 뚱뚱한 몸집의 아저씨, 누구를 닮지 않았나요?

제가 보기엔 마리오 보타를 모델로 삼은 듯합니다.

 

최후의 만찬 작품에다가 줄리아노 반지는 마리오 보타와 이상각 신부를 모델로 그린 인물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찾아들 보시지요.

 

이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듯한데..

 

그런데 드러낸 뒷모습을 보니 허리에 살집이 너무 많습니다.

다이어트 좀 하시지..

 

 

 

대성당 내부 풍경-보타의 설계

 

대성전 옆 벽체쪽으로 서구성당의 소예배당같은 공간이 있고 각 인종별로 제작된 성모상이 있습니다.

 

컨셉은 좋은데 대성전의 제단화나 십자가고상과 품질차이가 나는 듯하여 언밸런스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가운데 성모상, 왕관을 쓰고 가슴에 심장이 빨갛게 장식처럼 달려있는 게 파티마(Patima) 성모상입니다. 좌측은 피부색이 유색인종에 가깝습니다. 오른쪽은 베트남 삘이 나는 의상과 모자를 쓰신 성모상입니다. 그럼 검은 성모상은요? 아, 못 봤습니다. 조각상은 아니고 부조 하나가 조금 검게 보이는 듯한 게 있었는데 그거였나요? 글쎄 제가 바라본 시선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암튼 살짝 아쉬웠습니다.

 

천장과 신자석

 

마리오 보타는 대성당 본당 천장의 루버(Louver)는 미늘판을 붙인 것으로 직사광선이나 빗물을 방지하고 통풍, 환기를 목적으로 설치하는 건축 구조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광원으로부터 수평방향으로 나오는 직사광을 차단하여 눈부심을 방지할 목적으로 설치하는 차광기를 말합니다. 원래 중세 유럽의 건축물에서 통풍을 위하여 지붕에 설치한 돔 모양의 채광창이나 작은 탑 등에 설치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신자석 장의자도 디자인이 심플한 게 보기에 괜찮았습니다.

저것도 마리오 보타 아저씨의 작품이었을까요? 

 

천장 설계 컨셉

 

건축가 마리오 보타는 제단에서 발생하는 소리가 깨끗하고 정확하게 대성전 뒤쪽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천장을 이루는 구조를 트러스 type으로 설계하고, 소리가 반사되어 다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소리가 건축면을 통과할 수 있는 마감 방법을 고안하고 적용했습니다. 즉, 천장구조 사이사이에 틈을 만들어내는 목재 루버로 트러스를 감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시각적으로는 원래의 디자인을 살리는 한편, 음향 설계 측면에서는 대성전 내부에 소리 울림을 전달되지 않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천장상세 1

 

이처럼 ‘소리’를 감안한 디자인의 일환으로 남양성모성지 대성당의 천장과 벽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벽은 막혀 있지 않고 뚫려 있습니다. 그 사이를 단풍나무 패널이 촘촘히 에워싸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대성당에 들어서면 마치 거대한 오디오 스피커나 악기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아, 제가 직접 현장에서 바라보고 있으면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네요.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바보처럼 건축에 문외한임이 들통나는 순간입니다. 암튼, 현장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실제 미사드리는 시간이 아니라서 소리가 울리고 그 음향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어떻게 에코가 만들어지지 않고 깔끔하게 들리는지 체험해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천장상세 2

 

가만히 고개를 들어 안면에 뚫려있는 동공으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트러스 구조 사이로 또 다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둥글게 말린 천장 사이를 가로지르는 천창(창문)이 있는 탓입니다.

 

아래에 소개한 사진처럼 예수상 뒤쪽, 수직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둥근기둥의 천창을 통과해 내려오는 두 번째 빛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회 공간을 두루 밝히는 천장 사이사이의 빛은 대성전 공간이 지하(맞나요? 잘못 말한 건가?)이고 또 벽면에 창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해 줍니다. 이미 벽면의 창은 없어도 내부는 충분히 밝았습니다. 이 지점은 마리오 보타 아자씨가 옆동네 안도 다다오 씨의 설계철학을 커닝한 걸까요?

 

십자가 창틈으로 빛이 들어와서 본당을 밝혀줍니다.

 

안도 다다오가 만들어낸 빛의 교회와 다른 빛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당은 빛의 세계입니다.

 

대성당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번 내부 모습을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자알~ 만들어진 대성당임은 틀림없다.'

저는 마리아 대성전이 십자가상과 제단 위의 성화까지 현대적 감각을 잘 살려내어 지은, 한국 가톨릭 성당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곳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구 유럽의 여행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성당을 방문하며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고 발바닥 화기를 식혀내듯, 한국에 들어오는 여행자들도 그런 기능을 하는 마리아 대성당을 방문하고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대성당 뒷모습

 

대성당 뒤편

 

마리아 대성당을 나가 뒤편으로 얼굴을 내밀면 반원형 공간이 드러납니다.

배면 코트입니다.

 

배면 정 중앙에서 바라본 모습

 

아마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대성당 외곽으로 오솔길을 따라 주욱~걸어 들어와서 이곳 계단을 타고 내려간 다음 미사에 참여하러 'IN 성당'할 것 같았습니다. 서구 성당의 후진으로 먼저 걸어 들어와서 파사드를 향하는 것입니다. 성당전체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저 붉은 벽돌이 마리오 보타 아저씨의 전매특허 건축물인 걸 입증하는 것입니다.

 

마리오 보타식 붉은 벽돌건물의 미학

 

평소 붉은 벽돌이라 하면 값싼 재료로 인식하였는데

대성당을 건립하여 세워 놓은 걸 보니 그래도 꽤 정갈하고 반듯하게 시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정에서 만나는 일반 건물들처럼 그냥 막 대충 쌓아 올린 것은 아님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옆구리를 따라 나 있는 오솔길로 내려옵니다.

 

 

마리아 대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남양성모성지는 마리아 대성당만 있는 게 아니죠.

드넓은 대지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기다립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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