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의 세션은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 공포와 죽음, 풍경화, 외로운 이들과 다리 위의 소녀들 그리고 초상화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부터 별도의 그루핑으로 작품을 소개할 작정입니다.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
이 시리즈는 삶의 순환과 관련하여 생식, 수정, 배아, 생명의 나무, 유년기, 청년기, 매혹, 키스, 이별, 절망, 절규, 그리고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의 백미에 해당되는 작품들이 시리즈형태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만, <스크림> 이 녀석은 독불장군처럼 한 작품이 모든 관객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Two Human Beings. The Lonely Ones
전시회 후반부에 동일한 주제의 작품이 다시 전시되는 중복된 현상이 보입니다.
같은 주제의 작품은 재편집하여 정리합니다.
평소에 뭉크의 작품을 감상할라치면 판화는 제켜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판화가 주 관람 point로 제시되어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입니다. 판화작품만 가지고 뭉크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인데 어찌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판화작품도 자꾸 들여다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판화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이건, 예기치 않은 '성과'입니다.
남자는 옷을 입었는데 여자는 발가벗은 상태입니다. 사연이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이들은 왜 숲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인지...
아, 이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고 지내던 영국거주 한국여성이 알려준 말이 생각납니다.
유럽애들은 공원에서도 그짓을 벌이곤 한다고...
과연 이 그림의 (여) 주인공은 흡혈귀일까요?
궁금해집니다.
머리카락이 붉게 색칠된 게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여인이 남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고 있는 게 문제를 증폭시킨 건 아닐까요?
그러나 피를 흘린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없는 '작품 제목'입니다.
아무래도 작가의 의도를 왜곡하여 판단 내린(혹은 작가의 의도하에) 평론가나 감상자들의 견해인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의 원제목은 <사랑과 고통(Love and Pain)>이었습니다. 뭉크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스타니슬라브 프지비셰프스키가 이 작품을 가리켜 <뱀파이어>라고 불렀는데 1894년 스톡홀름 전시 때 이 이름을 (누군지 모르지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뭉크는 '이것은 여성이 남성 목에 입을 맞추는 것일 뿐'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오.. 그렇다면 작가가 의도하여 '흡혈귀'의 이미지를 덧씌운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후 제작된 같은 유형의 작품들에 뱀파이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 줄줄이 사탕처럼 역거져 나오는 걸 보면 나중에는 작가도 그런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순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석판화입니다. 전시회에 내어준 소장자의 요구사항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작품을 그리 보관해 온 이유인지 유리액자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사진 찍을 때 애를 먹게 하는 유리액자..
마돈나를 그린 뭉크의 대표작은 따로 있기 때문에 상세 해설을 덧붙이지는 않습니다.
다음 기회에 화가들의 전체 작품을 조망해 보는 포스팅의 일환으로 에드바르 뭉크를 다룰 때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보고 음미하고 내면을 다독이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오마이갓 제스처를 취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 Ashes Ⅱ!
이 작품 <AshesⅡ>는 단순 석판화가 아니라 '핸드 컬러드 판화'로 제작된 것입니다.
'Hand colored Lithograph'가 뭐냐구요?
별거 아닙니다. 판화 위에 작가가 다시 채색하여 작품의 독자성을 부여한 것인데, 뭉크가 최초로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일종의 실험적인 작품 제작 방식인 거죠. 하지만 이 간단한 조치가 작품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판화 위에 채색작업을 하게 되면, 이는 벽돌공장에서 벽돌 찍어내듯 만든 판화가 아니라 세상에서 단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유화에 버금가는 지위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서프라이즈!
이번에 전시되는 뭉크의 핸드 컬러드 판화는 유럽에서도 공개된 적이 없는 규모이기 때문에
주목할만한 사안입니다.
여기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봅니다.
바로 이 멘트죠~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은 뭉크가 처음으로(? 아마도..) 연정을 품었던 유부녀 밀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오~ 이런..
그렇다면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파묻은 못난 남자는 뭉크 자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예술의 한 장면으로 승화(?) 시켰다구요? 그냥 쪽팔림을 감수했다고 하는 게 더 현실적인 표현입니다.
실패한 사랑, 혹은 불륜의 후유증..
뭉크가 타고 남은 <재>로 묘사한 작품의 이면에는 그런 내막이 숨겨져 있습니다.
'앗차, 관계를 맺지 말았어야 하는 건뎅..'
이런 거니?
뭐, 이런 시츄에이션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이 발동됩니다.
역시 수작업으로 채색(수채화 & 파스텔) 작업을 한 판화작품입니다.
식민지시대의 청년 지식인 윤동주가 자아성찰을 위하여 매일 구리거울을 닦고 닦았듯이 마치 연단의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에드바르 뭉크가 그리고 또 그렸던 누이 소피에의 임종 직전 모습 '병든 아이'
뭉크를 보고 감정이입하려는 사람은 건너뛰고 지나갈 수 없는 작품 <병든 아이>가 등장합니다.
병마와의 싸움으로 많이 지친 듯,
아이는 흐트러진 모습이고 앞머리는 정신없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그래도 소피에는 죽어 하늘에서 남동생이 그려주는 자신의 모습을 미쁜 마음으로 받아주었을 겁니다.
고맙고 소중한 남동생에게 축복하였을 것입니다.
남자가 질투심을 느끼는 이유는?
그림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을 찬찬히 더 살펴봅니다.
질투심이 만땅으로 폭발할만한 상황입니다.
아니, 남자의 상상의 세계인가요?
에드바르 뭉크가 창작해 낸 그 유명한 컨셉트 중 하나 '멜랑꼴리'
정말 '멜랑꼴리'하게 등장합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작품 속 수심가득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남자는 뭉크가 아닙니다.
삼각관계의 늪에 빠져버린 그의 친구 야페 닐센입니다.
뭉크는 친구의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는지 그림 속 배경과 인물표정의 묘사가 압권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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