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중에서 유독 감정이입이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빈센트 반 고흐와 에드바르 뭉크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정신병력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한 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병력을 가졌던 주변 인물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으렵니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을 잘 알기에, 그리고 그런 핸디캡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결코 좌절하지 아니하고 불길 같은 열정으로 세상을 살다가 어떤 평범한 인간도 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화가 2인을 어떻게 가볍게 흘러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두 사람 중 1인 에드바르 뭉크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고,
당연하게 저는 그곳을 다녀왔습니다.
윤석열에 쓰잘데기 없는 관심을 가졌던 한국인이었다면, 이재명에 환멸을 느꼈던 한국인이었다면, 김문수의 철판에 분기탱천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준석의 치졸함에 쓴웃음을 지어본 적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차라리 빈센트 반 고흐나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에 '귀의'해보라고 권면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전시회의 정식 명칭은 <에드바르 뭉크 : 비욘드 더 스크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인류의 유산이라 할만한 명화들을 언제든지 최고의 화질로 감상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분명 원화(原畵)를 통해서 느끼는 감동이 올곳하니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갤러리의 분위기와 내음, 현장에서 원화를 보며 느끼는 작품의 크기와 색감은 결코 사진이나 LED 화면으로 맛볼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혹은 일부 그림덕후들은 명화 한 점을 보기 위해 굳이 해외의 구석진 미술관을 물어물어 찾아가는 것입니다.
일종의 ‘복제품’이라 할 수 있는 판화가 찬밥 취급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는 판화가 (너무) 많아서 - 스크림조차도 판화 작품 - 에드바르 뭉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판화작가인 줄 착각을 일으킬 뻔 합니다. 그렇게 느끼는 게 사실이기는 하죠. 에드바르 뭉크는 판화작가라 해도 무방하리만큼 많은 판화 작품을 남겼으니까요.
하지만 인정해주는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뭉크의 회화 작품을 가져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드바르의 본거지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에서 <스크림> 회화 작품을 타국의 기획 전시회에 보내줄 수는 없는 거죠. 스크림을 보기 위해 자국의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무슨 항의를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예당으로 갑니다
미술관이 버스 차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벌써 가슴이 셀레이기 시작합니다.
'아시아의 자존심'이라는 문구를 기억하십니까?
2002 월드컵 때 축구경기장 스타디움에서 보았던 카드섹션이죠.
어느덧 문화선진국으로 줄달음질 치며 달려가는 국가적 위상에 힘입어 노르웨이까지 가지 않고서도 위대한 화가의 명작을 감상하게 됩니다.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 줄은 정말 예전엔 미처 몰랐던 일입니다.
전시장 입장하기까지
버스에서 하차하여 지하통로(?)로 들어갑니다. 지하가 아니라 1층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하로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암튼, 유리문에 프린팅 된 예당 로고가 유리문을 고급지게 물들이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디자인의 힘이라고 할까?
여기도 디자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화장실 입구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식별하는 표식도 그림만으로 다 설명됩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화장실도 디자인을 잘하면 예술적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을 판단하는 척도의 하나가 됩니다.
매표소 언저리 풍경은 생각보다 한산합니다. 주중에 방문하는 사람이 챙기는 이득입니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 에드바르 뭉크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유럽 현대 미술의 대표하는 아티스트입니다.
단언하건대 에드바르 뭉크는 일생 동안 삶과 죽음, 사랑, 불안과 고독 등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감정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낸 표현주의 미술의 대가입니다. 19세기 유럽 미술의 변두리인 북유럽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독창적인 표현기법은 회화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등 그가 주로 활동하였던 독일 표현주의 예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모더니즘에서 에드바르 뭉크의 공헌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작품의 형태, 재료 및 색상과 관련하여 관행적 예술 규범을 무시해 왔는데, 이러한 처신은 동시대 부르주아와 보수적인 미술 비평가들을 도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회화에서 보이는 명백히 미완성적이며 습작처럼 보이는 특징, 그리고 판화에 에디션 넘버와 서명이 포함된 판본의 체계적인 제작을 거부한 것이 대표적인 도발 사례들입니다.
이 전시는 걸작 <절규>를 넘어 뭉크가 모더니즘에 끼친 예술적인 공헌을 돌아보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전시회를 기획한 특정인의 노림수일 수도 있습니다. 암튼, 전시장에 가면 작가의 일생을 돌아보며 그의 독특한 화풍과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표현기법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예당에서는 석판화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 작품은 뭉크 미술의 최고 권위기관 노르웨이 뭉크 뮤지엄의 소장품과 미국, 멕시코, 스위스 등 23곳의 소장처에서 온 140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작 외에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 소장가들의 숨겨진 보석과 같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초년의 삶(in Kristiania)
전시장 입구까지 나와서 관람객을 맞이해 주던 작품은 뭉크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에드바르 뭉크가 1863년 생이니까 이 그림은 그의 나이 약관 19~20세일 때 그린 작품입니다. 감히, 불세출의 대가의 작품을 앞에 두고 개인적인 감상평을 쓰자면, 별로 특별한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 평범한(?) 자화상입니다. 그림을 그린 기법에도 시선을 사로잡는 게 없고.. 인상도 그렇고.. 어쩌면 뭉크는 젊은 시절, 이성에게 어필하는 외모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발칙한 상상력까지 발동시키는 그런 그림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서구의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그들의 화가 초년병 시절 작품은 정말 초라하고 볼품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시작은 미미하였지만 나중에 창대한 결실을 맺었던 이들이 바로 위대한 화가의 반열까지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 자화상을 보면서 언뜻 그런 평행이론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 이놈의 설레발질...
아트 잡배의 기질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따라다닙니다...
이 작품도 어설퍼보인다 싶었는데 제작 연도가 위 자화상보다 더 앞섰군요.
도깨비가 끓이는 죽가마는 몽고군이 전쟁터에서 애용했던 샤브샤브 만드는 솥가마처럼 보입니다.
유럽 백인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죽을 먹는 풍습이나 전해오는 내력이 있나요? 그런 내막을 모르니 생뚱맞은 느낌마저 들게 됩니다. 그런데 도깨비는 왜 등장하는지.. 그래도 도깨비가 산타할아방의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게 귀엽게 여겨집니다. 뭐, 빌어먹는 입장에서 긍정의 계산을 깔고 뒤집어쓴 패션이겠지만요...
1880년대 후반에 그려진 작품인데, 이 시기부터 그가 그리는 풍경에는 인간의 기분과 감정을 투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그물을 고치는 남자>에서 뭉크는 풍경 위에 인물을 겹쳐 놓으며 소재 간 상호작용을 통해 외로움, 우울감과 같은 감정 상태를 표현하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겠지요?
전시회 설명자료를 읽어보았지만 크게 공감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혼자 궁리질 해봅니다.
그림의 남자 모습에서 외로움을 느낄 근거는 뭐지?
더구나 우울감까지?
마땅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 아트잡배는
혹시 전시 기획자가 뭉크의 내면을 염두에 두고 저런 표현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가지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뭉크는 물감의 투명성을 파격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자연주의와 분명하게 구분 지었다고 합니다. 전시장에서 작품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애를 먹는 것은 조명이 그림에 반사되어 작품의 본모습을 담는데 애로사항을 느낄 때입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애로사항을 느껴야 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냥 감수하고 찍어야 했던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직접 찍은 사진은 다 버리고 인터넷에서 서핑하여 사진을 같이 비교하여 보니 더 좋아 보입니다.
아, 이런 경우가...
뭉크는 자연주의 화가로부터 미술을 배우지만 자연주의 화풍으로부터 떠나기로 합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표현주의의 본성이 내면에 움터나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1849~1912)는 스웨덴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강렬한 개성을 지니고, 전세기 말의 모순과 동요에 번뇌하는 인간을 추구하였던 작가였습니다.
뭉크의 성향과 통하는 점이 있었을까요?
자화상에 팔뼈를 그려 넣은 화가는 아마도 뭉크가 처음일 것입니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은 그가 그린 자화상 중에서 자신을 가장 깔끔하게 묘사한 대신 하단부에 팔뼈를 그려 넣는 신의 한 수를 썼습니다. 오~ 이게 무슨 일이래요?
하지만 '살이 없는 뼈'는 죽은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인물도 깔끔하게 묘사하긴 했지만 배경을 왼통 검게 색칠하여 역시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그가 이 자화상을 그리던 30대 초반 이전,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죽음에 직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컨셉의 자화상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일반인들은 80살이 넘어서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된다죠.
이때부터 사람은 몸과 정신으로 또는 외관과 내면으로 '죽음'을 자신의 일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는 삶의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뭉크의 기억 중 결코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풍경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핵으로 투병하던 어머니가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의 집에서 의자에 앉은 채 창밖으로 펼쳐진 들판을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뭉크가 불과 5살인 186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드바르와 세 여동생, 남동생은 종교심에 쩔어있던 의사이자 나이 많은 남편(아버지)에게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종종 우울한 광신도로 변하는 크리스찬 아버지에게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뭉크의 이모 Karen(카렌)이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집에 들어오지만 뭉크는 그의 누나 Sophie에게 더 깊은 애정을 품었습니다. 그러던 뭉크였는데 9년 뒤(뭉크가 14세 되던 해) 결핵을 앓던 누이 소피에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뭉크는 그 일로 평생 찢긴 상처를 입습니다. 죽어가는 소피에는 침대에서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신의 병과 말년에 대한 많은 작품을 그린 뭉크는 죽는 날까지 그 의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습니다. 현재 의자는 뭉크 미술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에드바르의 비참함을 가중시켰던 것은 자신의 허약한 건강이었습니다.
뭉크역시 소년 시절 결핵을 앓고 피를 흘렸습니다.
뭉크의 가장 훌륭한 자화상 중 하나인 1895년 석판화를 다시 쳐다봅니다.
이 유명한 자화상은 검은 배경 앞에 그려져 있는데 그의 머리와 성직자처럼 보이는 옷깃이 드러나 보입니다. 작품 상단의 얇은 흰색 띠에는 그의 이름과 연도가 표기되어 있고, 아래의 해당 띠에는 뼈만 남은 해골 팔이 있습니다.
에드바르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인생의 대부분을 정신 질환으로 인해 시설에서 보냈고, 위 자화상을 그렸던 시기에 일어난 또 다른 비극으로 뭉크답지 않게 강인해 보였던 남동생 안드레어스가 30세에 갑자기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오직 그의 막내 여동생 잉거(Inger)만 천수를 누렸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뭉크 역시 그의 가족내력이나 시원찮았던 건강에도 불구하고 80세가 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파란만장하면서도 참 묘한 인생이었습니다. 만약 에드바르 뭉크의 삶과 인생에 감정이입하려면 시도하는 사람 역시 감정의 근육이 강인해야 합니다.
여기 이상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마주 앉은 남녀를 묘사한 작품인데 여성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90도 각도에서 나이가 더 먹어 보이는 남성이 담배연기를 피우며 실눈을 뜬 채 여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마주 앉아있다고 말할 수나 있는 형국인가요?
단지 마주 앉아 있기는 하지만 순도 100%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은 아니라는 점이 팩트인데,
왜 뭉크는 '마주 앉아서'라는 제목을 뽑았을까요?
참 이상합니다.
이번에는 술잔을 앞에 둔 오슬로 거주 보헤미안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보헤미아인은 체코공화국의 한 지역인 보헤미아의 거주자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옛 체코슬로바키아 보헤미아 지방에 살았던 사람들로 유랑 생활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예술가·문학가·배우·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습니다.
위 작품은 아마 실제의 보헤미안을 지칭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부류를 그려낸 것으로 보입니다.
술 마신 후 그다음 날 아침까지 뻗어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쳐다보니 여성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합니다.
오~ 그래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마돈나>의 모델과 거의 흡사해 보입니다.
같은 모델을 세우고 그린 작품일까요?
무대에서 공연 중인 여성은 공연에 최선인 모습을 보이는데,
뒤에 앉은 무희들로 보이는 여성들 표정은 하나같이 야리꾸리합니다.
이쪽 편에는 공연에 몰입한 남성들이 무대에 고개를 빼내 밀고 있으며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무대 위의 무희들 표정과 자세가 가관에 가깝습니다.
뭉크에게 감정이입할 준비가 되셨나요?
이제 예열을 시작합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병든 아이는 뭉크의 누나 소피에이고
손을 잡으며 애끓는 제스처를 취하는 여인은 뭉크 가족을 돌보아준 이모 카렌입니다.
뭉크는 누나가 병으로 아파하는 모습, 그리고 죽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는데 소피에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뭉크 역시 어린 때에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겪음이 너무나 강열한 하였던지 그 충격파는 그의 영혼에 깊숙이 파고들어 뭉크는 평생에 걸쳐 <병든 아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고 천착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기가 고쳐주고 치료해주지 못한 회한일까요? 속죄일까요?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종교의식이었을까요?
뭉크는 대략 6번에 걸쳐 <병든 아이>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병든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리는 과정을 통해 뭉크는 마음의 짐, 고통을 내려놓거나 경감되는 위안을 얻었던 것일까요? 어떤 때에는 그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생에 대한 해탈, 혹은 도를 닦는 과정을 묵묵히 겪어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갈파한 '연단'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작품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 <유령>의 공연을 위하여 제작된 세트 디자인을 담은 것입니다.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뭉크의 흔적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런대로 봐 줄 만한 작품이고 해변의 색감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close up 하여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도무지 얼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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