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읍 성공회 한옥성당에서 고려궁지로 가는 길목에
진무영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강화성당이 세워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진무영 순교성지
19세기 후반, 강화도에서는 신앙문제로 첨예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1866년 병인(丙寅)년부터 시작한 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합니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로는 1868년 5월 22일 진무영(鎭撫營)을 필두로, 최인서(崔仁瑞, 요한, 애오개 회장, 59세), 장치선(張致善, 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 59세), 박서방(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서방(趙參奉의 부친, 50여 세) 등이 있습니다. 최인서와 장치선은 병인박해(1866-1871)로 성직자 12명중 9명과 신자 1만여 명이 처형되자 생존 성직자 중 한 분인 리델(Ridel) 신부를 배로 천진(天津)까지 탈출시킨 인물입니다.
고려궁지
입장료 1200원입니다.
승평문
계단을 올라가야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승평문은 고려궁지의 남쪽 문이자 정문입니다.
조선으로 보면 경복궁의 광화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모두 3개의 문으로 되어 있는데, 오직 왕이 행차할 때 사용했던 것은 가운데 문이고 양쪽의 문은 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의 승평문은 고려 시대에 건물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세운 것입니다. 승평문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정원이 펼쳐집니다. 즉, 고려 시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데, 이는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강화도 침략으로 전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강화유수부 동헌
조선 인조 때 고려궁지에 남아 있던 건물을 수리해 동헌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이 건물은 고려 궁지 안에 있는 조선 건축물인 셉입니다. 동헌은 조선 시대에 지방 관청 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강화도의 행정과 군사를 책임지는 유수가 이곳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인조 16년(1638)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하였습니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입니다. 건물 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 때 잠시 ‘덕이 밝고 성의가 있는 집’이라는 뜻의 <현윤관(顯允館)>이라고 불렸습니다. 그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당시 명필 윤순이 쓴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이 걸렸습니다. 명위헌은 ‘위엄을 밝히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화유수부 동헌 건물은 녹색과 붉은색으로 구성된 단청이 칠해져 있으며, 서까래는 이중type인 겹처마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궁궐 건축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양식입니다. 이는 강화유수부 동헌이 고려 시대에 궁궐의 일부였다고 짐작하는 근거가 됩니다. 단순한 동헌이 아니라 과거 궁궐건물이었다는 반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강화동종
강화 동종은 옛 남문터 동편, 지금의 김상용 선생 순절비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후 1977년에 고려궁지 보수 공사를 하면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이 종의 표면에는 1688년(숙종 14)에 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 후종에 금이 가고 소리가 고르지 못해 18세기 전반 강화유수 민진원이 큰 규모로 다시 주조한 것이 지금의 동종입니다. 1999년 균열이 생겨 더이상 타종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은 복제본을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에 있습니다. 아, 복잡합니다.
강화 동종은 강화산성(읍성)의 4대문을 열고 닫는 것을 알릴 때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이 종을 훔쳐가려고 갑곶으로 운반하다가 너무 무겁고 조선군의 추격을 염려하여 결국 갑곳리 중도 토끼다리 근처에 종을 버리고 철수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유수부 이방청은 원래 강화유수부 안에 있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 건물 중 이방의 집무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강화유수를 도와 마을을 다스리는 여러 사무를 맡아보았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후기 효종 때 강화유수 정세규에 의해 건립된 것입니다.
이후 정조 때 부속 건물이 더 만들어졌으며, 여러 차례 추가 건립이 되었습니다. 정조 7년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친 다음 '괘홀당'이라 불렀습니다.
1층의 목조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은 팔작지붕형태입니다.
외규장각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1782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입니다. 정조는 외규장각을 설치한 후 궁궐에 있던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이라 칭하며, 외규장각과 내규장각에 의궤를 비롯해 여러 왕실의 기록을 담은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병인양요'를 일으키고 강화도를 점령합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분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한 후, 장녕전과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퇴각합니다.
병인양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는 5,000권 이상의 책이 불탔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책과 문서 및 은괴 수천 냥이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의궤를 포함한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는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한 채 약탈해 간 프랑스인들 조차 잊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후,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씨가 우연한 기회에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합니다. 이때 그녀가 발견한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가 294권이나 되었는데, 289권이 어람용일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었고, 일부는 국내에 없는 유일본이었습니다.
박병선은 의궤를 포함한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우리 정부는 프랑스에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우여곡절 끝에 2011년에 294권의 조선의 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영구 임대 형식으로 국내로 반입시켜줍니다. 현재 외규장각 도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한편, 외규장각 건물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 조사하여 2003년에 복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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