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2024/12/2 - 비엔나1900, 꿈꾸는 예술가들(4)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Mother and Child : The Absence of Ideal Motherhood
1904년 새해 전날,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14세의 에곤 실레는 가장이 됩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으며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 형성의 여파로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어머니와 아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작품은 성화 성모자상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 작품 속에는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뭉크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사뭇 다릅니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레오폴트 뮤지엄 홈피에 소개된 해설에 따르면,
에곤 실레는 1910년부터 어머니와 아이의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탐구하여 가장 표현력이 풍부하고 수수께끼 같은 창작물 일부를 개발했는데 그 창작물 리스트에 포함되는 작품으로 1910년의 <Dead Mother I>, 1914년의 <Blind Mother>, 1915년의 <Mother with Two Children II> 등이 있다고 합니다.
1912년의 소규모 패널 그림인 <Mother and Child>는 중세 종교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성모자 아이콘과 비슷합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연속된 흰색 칼라로 하나의 개체처럼 융합되었는데, 파스토스 붓질(Pastose Brushstrokes)로 그려진 불특정한 어두운 배경 앞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고흐가 Impasto기법으로 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란 페인트를 표면의 한 부분에 두껍게 칠하는 것으로, 보통 붓이나 그림칼의 획이 보일 정도로 두껍게 칠해지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페인트(물감)를 캔버스 위에서 바로 섞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임파스토기법을 사용하면 물감이 마르면서 질감을 제공하여 페인트가 캔버스에서 나오는 것 같은 입체감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럼 레오폴트 뮤지엄에서 기술하고 있는 파스토스 붓질도 같은 의미로 씌인 것이 아닐까요? 이 작품을 보면 붓질의 결이 눈에 바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아이의 모습을 보면 자꾸 감정이입이 됩니다.
둘째 딸이 낳은 손녀가 이번(2025년 7월)에 첫돌을 맞이하는데 꼭 이 아이처럼 표정 지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동그렇게 눈을 뜨고 살펴보듯 쳐다보는 모습이 영락없이 닮은 꼴입니다. 제가 오버하는 걸까요?
손녀딸 사진을 한 장 투척해 보겠습니다.
작품을 보면, 어머니가 시선을 낮추고 절제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아이는 밝고 크게 뜬 눈으로 그림 밖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은 이러한 상반된 역동성을 제스처 수준에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실레는 2년 전에 그린 패널화 <죽은 어머니 1>처럼 다시 한번 불협화음적인 모자 관계를 묘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얼굴과 맨발을 제외한 몸 전체를 초록색 천으로 가리고 있는데 어머니의 움푹 꺼진 눈과 입은 마치 해골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 어머니의 무릎 위에 누운 아이 역시 죽어 있는 듯합니다.(실제로는 잠자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실레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피에타>에 빗대어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왼쪽에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어린아이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줄무늬 옷의 다채로움은 순수함과 희망을 상징하지만, 얼굴에서는 절망감이 엿보입니다. 이 작품은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였던 실레의 불안과 상실감, 그리고 내면의 갈등을 보여 줍니다.
두 아이를 둔 어머니를 묘사한 이 대작은 "눈먼 어머니"가 나온 지 1년 후에 만들어졌습니다.
무릎에 누워 잠자는 아이는 부분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채색으로 인해 어머니의 부재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을 반영한 것입니다. 실레는 의도적으로 피에타의 고전적인 구성 방식을 선택했는데, 어머니 왼쪽에 있는 아이만이 깨어 똑바로 서 있고 이상하게 공중에 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피에타의 구성 방식에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색 줄무늬 옷을 입은 아이는 이 암울한 환경에 희망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무력함으로 더욱 우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어머니와 아이 Ⅱ> 역시 사랑, 보호적인 친밀감, 부드러운 보살핌에 뿌리를 둔 관계의 이미지와 단절된,
'불안한 어머니와 자식 묘사'라는 실레의 전범(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따르고 있습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Black Landscapes of Loss and Isolation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크루마우)와 자연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글쎄요, 시대적 불안이라 함은 지금 2025년 6월 7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지 싶은데.. 암튼,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검은 풍경화, 이 표현 맘에 듭니다.
에곤 실레(1890~1918)가 1911년 8월에 크루마우에서 노이렝바흐(Neulengbach)로 이사한 것은 그의 작품에서 지금까지 종속적인 역할만 하던 풍경화에 대한 재인식의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실레는 동료 화가이자 장래 처남이 되는 안톤 페슈카(Anton Peschka, 1885~1940)에게 "노이렝바흐 근처의 부흐베르크 언덕(Buchberg hill)은 내가 아는 들판의 가장 멋진 풍경을 보여 줍니다. 크루마우의 탑에서 볼 수 있는 집들, 거기의 들판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작품 <갈보리>는 자연의 분위기와 영적인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적 요소의 재현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약에 페인트를 칠하면 초원의 모든 실체가 사라지고 시선이 수평선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갈보리의 세 개의 십자가가 바람에 흩날리는 벌거벗은 나무와 기둥의 행렬에 합류하여 그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있는 십자가의 길로 이어집니다. 그 위로는 어두운 구름 띠가 하늘을 가로질러 뻗어 있어 일몰의 마지막 순간에 빛나는 장면이 펼쳐져 갈보리와 자연을 종교적 경건의 장소로 극화시킵니다.
에곤 실레는 자신이 살았던 노이렝바흐 근처 들판을 그리면서 이 들판의 풍경을 골고다 언덕으로 치환시켜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 요소를 활용해 자연을 종교적 숭배의 장소로 만들어낸 실레의 초기작이지만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십자가 옆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색색의 띠로 묘사된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어, 지는 석양과 함께 골고다 언덕 풍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어머니의 출생지인 남부 보헤미아 도시 체스키크룸로프(예전에는 크루마우)에서 자신이 방문한 다른 어떤 도시보다 더 큰 연관성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실레는 반복적으로 그곳을 자신의 풍경화 주제로 삼았습니다. 초기 소규모 패널 몇 점을 그린 후, 그는 블타바 강의 굽이에 있는 중세 도시를 계속해서 재 방문합니다. 예를 들어, 1911년의 <Dead City III>나 1915년의 <Crescent of Houses II> 등도 그때 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시된 그림은 현장에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기억을 바탕으로 지역 지형을 자유롭게 해석하여 재구성한 풍경입니다. 부분적으로 식별 가능한 개별 건물을 수평으로 그룹화된 모티브로 묘사하였는데 이들은 그림 평면의 장식적 특성을 향상하는 방식으로 어두운 수면의 기슭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아마도 1912년 하반기에 그의 불안정한 재정 상황 때문에 실레는 두 조각을 꿰매어 만든 캔버스를 사용해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건물들은 여러 색을 띠고 있지만 지붕과 길, 강은 검은 색조로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실레는 자신이 머물렀던 도시의 암울한 분위기, 스스로 느꼈던 고립감과 소외감을 검은색으로 표현해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로 그려 냈습니다.
1913년, 에곤 실레는 다뉴브 강에 있는 중세 도시 슈타인을 모티브로 한 일련의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그는 반대편 강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나 이 경우처럼 뒤편에 솟아오른 크로이츠베르크 언덕(Kreuzberg hill)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선호했습니다. 구성과 관련해서는 흑백 수면 앞에 있는 도시의 실루엣을 자유롭게 하여 최대한의 대비를 이루게 했습니다.
실레는 마을 건물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슈타인의 특징적인 건물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선택하고 재배치하여 수정함으로써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마치 콜라주 작업처럼 도시의 요소들을 다시 조합하여 본인이 원하는 풍경으로 새롭게 그려낸 것이죠. 모티브가 집중된 대표적인 예는 전경에 있는 미노리테 수도원(Minorite Monastery)의 정사각형 구조인데, 실제로는 프라우엔베르크 교회(Frauenberg church) 바로 옆이 아니라 동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었던 건축물 입니다.
<블타바 강의 크루마우(작은 마을 IV)>은 에곤 실레의 1913년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평면 구성 스타일의 대표적인 예로 여겨집니다. 그는 극단적인 위치에서 크루마우의 슐로스베르크 언덕(Schlossberg hill) 맞은편 주택 풍경을 포착하여 수평 및 수직선을 따라 구성된 도식적 구성으로 표현했습니다. 채색과 관련하여 그는 <작은 마을 III>(1913)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상을 다시 사용하여 갈색 유약 지붕 아래의 외벽과 창문을 부분적으로 순수하게 상상적인 밝은 노란색, 파란색 및 흰색 음영으로 빛나게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 마을 집들은 모두 실레가 상상하여 그려낸 것입니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둡게 묘사되어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어머니 마리 실레(Marie Schiele)의 고향인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Krumau), 오늘날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지역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크루마우의 중세적인 도시 분위기에 매료되었는데요, 이 작품에서는 작은 탑이 있는 집과 울타리가 있는 풍경을 일그러진 형태로 그렸습니다. 특히 오른쪽 톱니 모양의 벽은 실레가 크루마우에서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뒤쪽으로 울타리가 뻗어 있거나 언덕이 있는 그림 속 풍경은 사실과 달라 실제 장소를 그대로 그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마주하면 그것이 인물화이든, 풍경화이든, 정물화이든 또 누드화이든 모두가 기존 화가들의 표현법과 다르게 전혀 독창적인 방법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드로잉(크로키 작품)들 조차 그것 자체로 하나의 작품으로 대접받을 만큼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천재성과 끊임없이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탐구하여 나갔던 '공부하는 자세'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짧은 인생을 살면서 평생 그림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터치방법과 색 사용에 대해 고민했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람에 휘날리는 벌거벗은 나무가 하늘의 회색 면으로 뻗어 있습니다. 하얗게 칠해진 줄기가 배경과 어우러져 거의 추상적인 선처럼 그림 평면을 가로지르며 자라는 신경질적인 가지의 고립을 강조한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가 보는 시각에서는 나무가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끈질기게 가지를 뻗어내는 모습이 느껴져 안쓰러우면서 경이로운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림 아래쪽 가장자리의 수평 줄무늬는 토양을 약어로 나타낸 것입니다. 먼 지평선의 언덕도 똑같이 양식화되어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풍경 묘사방법론에서 마치 초상화와 자화상과 맞먹는 강렬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듯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양과 감정을 대자연에 새긴 그의 미학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Nude Drawings by Klimt and Schiele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인데요, 이들이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을 사용하여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한 경향을 보입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틀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실레 회화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팔, 몸통을 본 대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하지만 양팔의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턱 부분을 생략하는 등 실레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 위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은 장식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이 시기에는 몸의 구조에 집중한 것이 나타납니다. 팔과 몸통의 윤곽선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을 들어 올린 몸의 안정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고 표현한 것이 보입니다.
에곤 실레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보여 주는 이 그림에는 섬세하게 교차하는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여인은 손에 턱을 괴고 안정된 자세로 엎드려 있는데, 기울어진 머리나 표정과 눈빛에서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을 엿보입니다. 그냥 복사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실레의 미술철학이 발도안 것인가요?
실레는 흔들리는 듯한 선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무언가 불안한 여인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옷의 주름은 그냥 막 쓱쓱 그어댄 것 같지만 실레의 섬세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그는 짧고 뾰족한 선들을 사용해 옷의 질감과 무게를 나타냈습니다.
에곤 실레는 '폴디'라는 소녀를 모델로 삼아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폴디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 AI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와 그의 어린 모델 '폴디(Poldi)'의 관계는 실레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일화 중 하나입니다. 폴디는 본명이 알려지지 않은 로컬 소녀로, 실레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네우렌바우어(Neulengbach)'에서 잠시 체류하던 시기(1912년 무렵)에 모델로 등장했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는 단순한 예술적 협업을 넘어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폴디(Poldi)는 누구였는가?
정확한 본명이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대 초반의 소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레는 빈에서 네우렌바우어로 이주한 후, 여러 지방의 어린 소녀들을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폴디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실레의 그림에서 종종 노출된 상태로,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포즈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이미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레와 폴디 사건: 체포와 재판
1912년, 실레는 이 관계와 관련된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체포 이유
미성년자 유괴 혐의: 한 소녀(일반적으로 폴디로 여겨짐)가 실레의 아틀리에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부모가 고소했습니다.
외설적인 작품 보유: 실레의 아틀리에에서 노골적인 누드 드로잉 수십 점이 발견되었고, 그중 일부는 미성년자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아동에게 대한 외설물 노출 혐의도 함께 제기되었습니다.
재판 결과
실레는 유괴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외설적인 예술 작품을 아동에게 보여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21일간 수감됩니다. 법정에서는 그의 드로잉 중 한 장이 재판관 앞에서 불태워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실레의 작품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충격을 주었는지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그냥 현장에서 관람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저도 관람 당시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듯 그림만 보고 사진에 담아 오는 정도로 끝냈으니까요. 암튼, 이 작품에서 섬세한 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폴디의 얼굴은 실레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보여 줍니다. 특히 그림 속 선의 명료함이 돋보입니다. 명료한 동시에 앉아 있는 자세를 표현할 때는 윤곽선 외에 모든 세부 요소를 생략해 버렸습니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잚은 아티스트였던 거죠. 실레는 폴디의 표정을 탁월하게 묘사했는데, 오랜 시간 특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모델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 살짝 비칩니다.
저는 생식기와 함께 거웃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누드화는 블로그에 올릴 때 상당히 조심합니다. 미성년자 유해 자료 게시라는 혐의로 1주일간 징계를 먹은 이력이 있기 때문이죠. 이 작품도 살짝 고민했다가 과감하게 올리기로 결정 내렸습니다. 오, 신의 가호가 함께해 주길...
이 드로잉을 그리면서 클림트는 여인이 침대에 푹 파묻힌 느낌을 주기 위해 길고 날씬한 비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리된 윤곽선 대신 불규칙하게 겹친 선들을 사용하여 불안한 느낌을 부여했습니다. 거칠게 떨리는 선은 익숙하지 않은 펜과 잉크로 그렸기 때문이지만,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형태를 간략하게 암시하듯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낸 클림트 말년의 경향을 잘 보여 줍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작품으로 독특한 코의 곡선, 도톰한 아랫입술, 윤곽을 강조해 우울해 보이는 눈 등 여인의 신체 특징을 자세히 관찰하여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이어지는 정교한 윤곽선에서 클림트가 몸의 조화로운 형태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곤 실레는 이 그림에서 '위에서 바라본 누드'라는 어려운 구도를 능숙하게 표현했습니다. 여성은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안정적이고 명확한 몸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관객의 시선은 여성의 척추가 보이는 곡선에 집중되는데, 윤곽선을 따라 칠하거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색, 명암을 나타내는 선의 활용으로 인체 표현에 생생한 입체감이 더해졌습니다. 여인의 몸은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라 있는데요, 실레에게 있어서 마른 몸은 고통과 고뇌에 빠진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수채화로 그려진 생동감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입니다. 그녀의 붉은 머리와 발그레한 뺨이 짙은 회색 망토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망토의 주름에 마치 위에서 빛이 떨어지듯 명암 효과를 주어 질감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원래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는 클림트의 허락(대여?)으로 1911년부터 실레의 모델이 되었고, 누드 드로잉 등 많은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실레는 중산층 집안의 딸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결심하면서 1915년 발리와 헤어졌습니다.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실레를 지지하였습니다. 아마도 일편단심형의 여성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합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실레가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것일까요? 전시회의 구성은 그런 의도를 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의 기본 줄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 작품도 포스팅하면서 살짝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모든 관람객에게 오픈한 작품이고, 여성 생식기 부분은 천 쪼가리로 살짝 가린 포즈이므로 용기 있게 올립니다.
이 적나라한 누드화는 에곤 실레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를 위에서 내려다본 구도로 그린 작품입니다.
오메나.. 아내 누드화라고요?
에곤 실레 앞에 서면 자기 아내라 할지라도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단 말입니꽈!(안철수 버전)
생뚱맞은 외침이라 그분 스타일을 차용했습니다.ㅋㅋㅋ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양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의 자세 때문에 몸의 형태가 대칭적으로 보입니다. 1918년 실레는 포스터를 디자인했던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 이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 전시로 그는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그해 오스트리아에 덮친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먼저 숨을 거두었고, 3일 뒤인 10월 31일 실레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오, 오지리의 천재화가 에곤 실레가 10월의 마지막날에 세상을 하직하였었군요..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성의 투사는 에로티시즘, 관능미, 욕망을 똑같이 직접적이고 장식 없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황금빛 노란색의 무정형 배경이나 흰색의 부풀어 오른 시트는 서사적 맥락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리비도에 대한 초점은 신체 중앙을 덮고 있는 직물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사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은 모양입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인상입니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