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2024/12/2 - 비엔나1900, 꿈꾸는 예술가들(2)
비엔나 분리파 화가들의 퍼레이드가 계속됩니다.
1900년 전후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미술의 황금기가 전개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요?
하지만 역사는 항상 순환되어 왔습니다.
이태리가 천년만년 미술의 종주국으로 군림한 것도 아니고,
네덜란드 화가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 꾸준하긴 했지만 세계 미술의 종주국으로 등극하지는 못했죠.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주름잡던 시절도 한때였습니다.
파리에서 인상주의가 태동하며 세계 미술사에 경천동지할 이야기가 만들어졌지만
바로 이어서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이 만들어낸 역사입니다.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박정희 시대의 풍운아로 불렸던 인물을 기억하십니까?
JP(김종필)가 주인공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두말하면 잔소리이니 생략하고 1900년 비엔나 분리파가 태동하였을 때 오지리 미술계의 풍운아였던 인물,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를 소개합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명 미술대학 교수로 일하던 중 37세에 16세 연하의 오스트리아 재벌가문 딸이었던 여제자 디타와 결혼하고(그 때문에 비난도 많이 받았고, 분리파 공방을 떠나는 계기가 되죠), 비엔나 분리파 운동에 합류하였을 때는 잡지 <성스러운 봄>을 태동시켰으며, 비엔나 분리파 예술운동의 범주를 공예부문까지 확장시키는 산파역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병(후두암)으로 인하여 50세의 이른 나이에 역사에서 사라졌던 인물, 그래서 클림트나 에곤 실레에 가려져 있던 화가였으니 비엔나 미술계의 풍운아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으며,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던 아티스트였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도 많이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의 회화작품을 감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미술사가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에 대하여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콜로만 모저는 빈 공방을 떠난 후 마흔다섯 살이던 1913년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위 작품이 제작되던 시기와 맞물리는군요.
<산맥>에서 콜로만 모저는 먼 곳까지 여러 겹의 산을 그렸지만, 지형을 충실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노란색 하늘 아래로 푸른 선을 그어 산맥을 구분했고, 옅은 색과 어두운 색의 대비를 강조한 것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모저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간결한 구성과 색의 강한 대비는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습니다. 수공예와 장인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빈 공방(Wiener Werkstätte, 빈 베르크슈테테)을 떠납니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제작에 전념하게 되는데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위 작품은 아마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 속의 비너스>는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장면을 그린,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화면에서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에서 각기 노란색과 옅은 보라색을 띠고 있습니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도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떠난 코로만 모저는 1913년 제네바에서 스위스 상징주의 화가 페르디낭 호들러를 만납니다. 호들러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단순한 형태와 선명한 색채는 모저의 화풍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모저는 이러한 테크닉을 기초로 1916년까지 <구름습작>을 포함해 볼프강 호수를 그린 여러 점의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하겐 클럽(The Hagen Society)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Albin Egger-Lienz)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를 느끼게 하는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깊은 숲>이라는 작품을 봅니다. 울창한 숲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기 때문인지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여 차가움이 느껴집니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습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인데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습니다. 이 작품은 1809년 베르기젤 전투라는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종교적 주제를 결합해 그린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었습니다.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 또한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여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결국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기꺼이 비엔나 예술계의 세대교체를 가시화시키는 불쏘시개가 되었던 것입니다.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 후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졌는데, 이는 클림트가 풍경을 그릴 때 즐겨 쓰던 방식이었습니다. 장식적으로 식물을 표현하고 배경을 거의 그리지 않은 것 역시 클림트 화풍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금색 배경을 깔아 놓은 것도 클림트로부터 온 것입니다. 깊은 보라색과 주황색으로 거의 단색 배경을 그린 듯하지만, 반짝이는 금색과 은색 안료를 사용해 구스타프 클림트식 장식 미술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실레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스승입니다. 당시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한 관계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실레에게 '은색의 클림트', '충실한 추종자'와 같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섬세하게 그려진 하얀색 국화는 비엔나 분리파가 지향한 장식 미술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공간감 없는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화의 구성에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도 엿보이고 있습니다. 19세기 유럽 화가들은 눈에 뭐가 씌었는지 걸핏하면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얼룩처럼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안톤 파이슈타우어(Anton Faistauer)는 와인 잔을 앞에 두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아내를 그렸습니다. 에곤 실레가 주도한 신예술가그룹의 창립 회원이었던 파이슈타우어는 유럽 예술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후기 인상주의자 폴 세잔의 구도와 구성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빈 분리파가 태동할 당시 프랑스는 미술 선진국이었으므로 안톤 역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물감을 두껍게 올려 붓이나 나이프 자국을 표면에 남기는 임파스토 기법을 작품에 활용했던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아내가 입은 옷의 질감과 명암의 대조를 강조하는 강렬한 붓 자국이 그 사례에 해당하는데 역시 인상파 기법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줍니다.
안톤 파이슈타우어(b.1887)는 농부 가문 출신으로 마이스호펜 근처에서 자랐으며, 원래는 성직자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볼차노 김나지움에서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Albert Paris Gütersloh)를 만난 후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그는 로베르트 셰퍼가 운영하는 빈 사립 미술 학교에 다녔고, 이후 빈 미술 아카데미로 전학하여 알로이스 델루그와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에게 사사했습니다. 하지만 1909년 아카데미를 사임하고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등과 교류하며 전통 예술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탐구했습니다.
한 여인이 편안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두껍게 칠해진 푸른색과 황토색은 소용돌이치듯 화면을 감싸고 있으며, 무릎 위에 올린 여인의 오른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어 마치 그림 밖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합니다. 한스 뵐러는 <스페인 여인>에서 밝은 색감과 역동적인 화풍으로 기품 있으면서도 쾌활한 여인의 성격을 잘 표현했습니다. 뵐러는 인물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화가인데, 특히 인물 내면의 감정과 자연의 생명력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아, 여성이었군요.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성별도 식별하기 어려워집니다. 작품 모델이 되어준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아마도 부유한 후원자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 화가로 전향했던 인물입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우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배우출신이라고 해서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찾아봤습니다. 잘생기긴 했네요.
내친 김에 관련 자료(초상화)를 하나 더 추가하여 살펴봅니다. 서로 교류가 깊었던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려주곤 했는데 에곤 실레가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사진과 비교해 보시지요.
평소 그냥 그림만 보고 지나가면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연결된 이야기를 매개로 그림을 보면 좀 더 오래 기억창고에 저장되는 이점이 있죠.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에곤 실레가 인물의 특징을 찾아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낸 능력이 특출 났던 사실을 재인식하게 됩니다.
허름한 회갈색 벽 앞에 앉은 소녀는 팔꿈치를 잡은 조심스러운 자세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소녀의 어두운 눈 주변은 방금 운 듯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네요. 아, 그런 표정이었군요. 허접한 이 아트 잡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 골이 난 것인 줄 알았는데 바로 직전에 울었던 거군요.
비엔나 분리파 화가 안데르센의 사진은 1912년에 찍은 것입니다. 위 여성 초상화를 그리기 1년전이니 거의 당시 모습인 셈입니다. 화가 안데르센의 사진을 보니 여성 초상화 주인공과 서로 어울리는 유형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네요. 순전히 저 혼자 생각인 거지만...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Robin Christian Andersen, 1890~1969)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녀(Girl in a Blue Dress)>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인물의 감정을 캔버스에 드러내게 했습니다. 미술을 대하는 태도면에서 볼 때, 그 역시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반발하여 에곤 실레와 함께 '신예술가그룹'의 설립에 참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성향에 반발한 화가들이 왜 이리 많았는지. 뭐, 그래서 비엔나가 새로운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순간적으로 번뜩였습니다. 동화작가가 아닌 화가 안데르센은 이처럼 새로운 예술 운동에 동참하여 개성 있으면서도 강렬한 감정 표현법을 연구했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톤 콜리히는 1911년 친분이 있던 예술가 단체 하겐 클럽의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 아홉 점을 출품합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던 표현주의 예술을 지지하고 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이 전시회로 신예술가 그룹이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콜리히가 당시 출품하였던 아홉 점 중의 하나인 이 작품은 어머니의 초상화입니다. 무더운 옷을 입은 화가 어머니의 모습이 밝게 빛나는 배경에서 돋보이며 실루엣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캔버스를 장식하며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녀>는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고등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줍니다.
Kokoschka의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의 초상>은 에곤 실레의 작품이 지닌 임팩트에 비견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활기찬 붓놀림이 돋보이는 표현력 넘치는 작품입니다. 그가 1914년경에 제작한 다른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파스토 기법의 물감 칠하기가 잘 드러나 보입니다. 모델의 밝은 살결은 어두운 배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그의 짙은 녹색 정장은 그 배경에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Kokoschka는 흰색, 밝은 노란색, 분홍색 선뿐만 아니라 짙은 녹색과 검은색을 사용하여 바우어의 얼굴 특징을 표현력 있고 각진 스타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회화 스타일은 1914년 그의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Kokoschka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 역시 돋보이게 표현하였습니다.
파스토(Pasto) 기법과 임파스토(Impasto) 기법의 차이
파스토 기법과 임파스토 기법은 모두 그림에 질감을 더하는 기법이지만, 파스토 기법은 유화 물감을 캔버스에 두껍게 바르는 기술을 지칭하는 반면, 임파스토는 주로 물감의 질감과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손 등으로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파스토는 넓은 의미의 물감 두께를 강조하는 것이고, 임파스토는 특정 질감과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칭하는 표현입니다.
코코슈카의 초상화가 완성된 지 4년 후, 에곤 쉴레 역시 빅터 폰 바우어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비교하기 위해 소개한 그림에 보는 바와 같이 에곤 실레는 완전히 다른 색채 팔레트를 선택하여 노란색 배경에 흰색 정장을 입은 바우어를 묘사했습니다. 이 그림은 현재 빈의 벨베데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914년 오스카 코코슈카의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의 초상>과 1918년 에곤 실레의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의 초상>을 비교하니 오히려 4년후 그린 에곤 실레의 작품 속 인물이 더 젊어 보입니다. 이거 어찌 된 일입니까?
1914년경 Victor Ritter von Bauer는 자신과 동향(브르노) 출신인 건축가 Adolf Loos(아돌프 로스)에게 그의 설탕 공장을 위한 새로운 관리자 빌라를 짓도록 의뢰했습니다. Loos는 또한 브르노에 있는 Bauer 가족의 신고전주의 주거 궁전을 재설계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업가 겸 예술 후원자 폰 바우어는 혁신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당시 코코슈카의 후견인이던 로스가 자연스럽게 폰 바우어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05년 응용 예술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비엔나에 온 Kokoschka는 어린 시절부터 Adolf Loos의 영향을 받았던 처지였습니다.
헤르만 슈바르츠발트(1871~1939)는 빈의 정치, 경제,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부부는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돌프 로스(1870~1933)가 설계한 슈바르츠발트의 아파트는 비엔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특히 그의 아내 외제니 슈바르츠발트(1872~1940) 덕분이었습니다. 진보적인 교육자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였던 그녀는 1901년부터 프란치스카너플라츠에 있는 여자 중등학교를 운영하며, 1911년 이 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코코슈카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사상가들을 배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제작된 그의 많은 초상화에서처럼, 코코슈카는 인물의 손과 얼굴, 즉 신체에서 가장 표현력이 풍부한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투명한 물감 칠하기, 임파스토, 스크래치 기법을 활용한 특별한 기법을 통해 모델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 캔버스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습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색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입니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9년 비엔나 국제예술전람회에서 공연한 연극의 극본을 직접 썼습니다. 이 연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폭력과 욕망에서 비롯된 권력 투쟁으로 묘사했고, 강렬한 감정과 파괴적인 주제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코코슈카는 자신의 연극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도 직접 만들었는데, 피 흘리는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 도상이 그려진 이 포스터에는 애도하는 모습 대신 분노에 찬 야수 같은 성모가 등장합니다. 한편 작품 속에 삽입된 거친 글씨체는 이 그림과 연극에 담긴 잔혹하고 격렬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1912년 '비엔나 문학 및 음악 협회' 강연에서 '얼굴'이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습니다.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에서 벗어난 이 발언에 청중들은 충격을 받았고, 감정과 내면 상태를 어떻게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코코슈카는 당시 비엔나 비평가와 대중의 혹평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강연 홍보 포스터에서 자신을 고통받는 비탄의 에수를 상징하는 도상인 '에케 호모(Ecce Homo)'에 비유해 비엔나 예술계에서 느낀 고립감을 표현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1923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입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자신의 두 얼굴을 하나로 합쳐서 그린 이 작품은 입체주의와 비슷한 표현법을 보여 줍니다. 예술가로서 코코슈카의 정체성과 서로 다른 두 자아가 드러납니다. 1937년 나치가 개최한 '퇴폐 미술 전시회'에 전시된 이 작품은 나치 세력으로부터 강한 비판조롱을 받았으며, 코코슈카는 이 전시회의 영향으로 결국 오스트리아를 떠나 망명길에 오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1923년 가을, 취리히의 갤러리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자신의 단독 전시화 포스터를 같은 해 그린 자화상을 활용했습니다. 왼손에 붓을 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은 예술가이자 개인전을 개최하는 주인공인 코코슈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개인전은 코코슈카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1908)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클림트의 호감을 얻지도 못했고 비엔나 분리파에 참여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츠 쉰베르크와 깊이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2016년 비엔나 레오폴트 뮤지엄 관람할 때 이 자화상과 뒤에 나오는 <트라운 호수와 '잠든 그리스 여인' 산 풍경> 작품을 감상했던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는 게 없었고 그 이후로도 더 깊이 파고들지도 않았죠. 그런데 이번 국내 전시회 포스팅을 하면서 그에 관해 알아보니, OMG, 이거 깜놀할 만한 인물이네요. 국립중앙박물관측에서 제공하는 작품 해설에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전혀 언급한 게 없었는데 어느 칼럼에 그의 적나라한 사생활 이야기와 25세에 자살하게 된 사연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일단, 게르스틀은 인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사람 같은데 그건 가족 내 환경이거나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요인일 수 있을 듯싶습니다.
인성이 어떻게 좋지 않았는지는 아래 일화 하나가 다 설명해줍니다.
“당신 그림은 아주 좋네요. 뛰어난 화가의 소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 고치면 더 좋아질 수 있는 부분도 눈에 띄는군요.”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서 거장의 그림들을 따라 그리며 연습하는 20대 초반의 게르스틀에게, 한 노신사가 말을 걸었습니다. 미소를 띤 노신사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게르스틀이 구겨진 표정으로 툭 하고 말을 내뱉었습니다.
“제가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댁에게 부탁이라도 했나요? 그냥 가던 길이나 가시죠.”
저 일화에 등장하는 노신사의 정체는 사실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의 관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않았어도 게르스틀은 관장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그에겐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르스틀은 그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까칠하고 오만한 성격 때문에..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파란색에 가까운 청록색 배경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어쩌면 정면이 아닌 더 먼 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머리 주변을 빙 둘러 빛나는 파랑으로 칠해 후광의 효과를 냈습니다. 엄숙하고 침착한 표정, 강렬한 눈빛 등 세밀한 표현을 담은 얼굴에 비해 손을 포함하여 신체의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게르스틀은 1883년 비엔나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명문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부적응으로 학교를 그만둡니다. 다만 그림 재능만큼은 뛰어나서 15세에 최고 권위의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죠.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던 지도교수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은 탓에, 17세(3학년)에 학교를 때려치웁니다. 그 후 게르스틀은 독고다이 마냥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서 거장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여러 전시회를 다니며 미술을 독학했습니다. 위에 소개한 일화가 바로 이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쌓아나간 그의 작품성향은 빈 세제션(Art Nouveau)이나 클림트의 장식적인 스타일과는 다른, 강렬하고 감정적인 표현이 특징이었습니다. 그의 자화상과 초상화는 인물의 내면을 심리적으로 탐구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에드바르트 뭉크나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독고다이로 전전긍긍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에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의 하인리히 레플러 교수의 눈에 띄어 3년 만에 고립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23세 때인 1906년, 교수의 소개로 현대음악의 혁신자이자 작곡 거장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쇤베르크의 가족과도 가까운 관계를 맺는데, 아뿔싸.. 쇤베르크의 아내 마틸데와의 불륜으로 갈등이 발생합니다. 2년 지난 1908년 여름, 마틸데와 게르스틀의 관계가 은인이자 큰 형님 같았던 쇤베르크에게 발각되었던 것이죠. 게르스틀은 쇤베르크의 예술가 집단에서 배제되었고 마틸데과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자식을 챙기려는 마틸데가 변심하면서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1908년 11월 4일, 게르스틀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과 편지들을 불태운 후, 거울 앞에서 자살했습니다. 게르스틀은 생전에 전시회를 열지 못했으며, 그의 작품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1년, 미술상 오토 칼리르에 의하여 첫 번째 전시가 열렸고 이후 그의 작품은 재조명됩니다. 지금은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에서 그의 주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상류층 집으로 보이는 공간에 한 여인이 밝은 빛을 받으며 거실 의자에 앉아 관람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공간은 점묘법을 활용해 표현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스마라그다 베르크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비엔나 분리파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음악가들과 깊이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받았고, 격렬하고 힘 있는 붓질로 감정을 표현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던 화가였습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1907년 여름을 보낸 트라운 호수와 그 주변의 자연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에 그린 에를라코겔 산은 트라운 호수 동쪽의 높은 산으로, 그 능선이 여성의 옆모습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잠든 그리스 여신'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작품에서 게르스틀은 세심하게 표현할 부분과 넓은 붓으로 활달하게 표현할 부분을 구분했습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바위와 숲을 매우 빠르고 격렬한 붓질로 칠한 것에서 이 시기 게르스틀이 신인상주의에서 자유로운 표현주의 양식으로 전환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발데마어 웅거의 초상 Ⅱ>은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1901년 비엔나 미술아카데미를 떠나 인상주의를 탐구하며 나홀로 새로운 시도를 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게르스틀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변호사 지망생이던 발데마어 웅거의 진지한 모습을 검은 재킷과 넥타이, 높은 흰색 칼라로 표현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마와 눈 아래를 흰색으로 덧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밝은 얼굴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자신감 있는 표정과 눈빛에 야망을 품은 명석한 주인공의 성격이 잘 표현된 초상화입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자이지만, 그가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앞선 때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 속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자신만의 표현 방식을 찾아 나갔던 화가였습니다. 그의 후기작들은 세부 묘사 없이 형상만을 남긴 추상화에 가까운 것들인데, 어쩌면 이것은 그의 사생활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게르스틀은 당시 미술계에서 왕따 비슷한 존재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불륜을 저지른 과오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묻혀 있었던 인물이지만 위대한 수집가 레오폴트의 뮤지엄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사후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오늘날 그의 성정과 사생활은 제쳐놓고 그 작품만 볼 때 한 마디로 시대를 앞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열었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07년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자신이 직접 본 장소에서 받은 영감을 활달한 붓질의 풍경화로 그려 냈습니다. 세로로 긴 이 작품의 오른쪽에는 가느다란 나무가 높이 서 있고, 나무의 위아래는 그림의 가장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공간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화면 구성은 역시 고정된 레퍼토리인 일본 목판화의 영향으로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짧고 강한 붓질로 들판과 나뭇잎을 그렸는데,
이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이 색채의 질감 표현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막스 오펜하이머(Max Oppenheimer)
막스 오펜하이머(Max Oppenheimer)는 1908년과 1909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에 참여하면서 문화, 예술계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그림 주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회색과 갈색계열 색채를 주로 사용하면서 얼굴과 손의 독특한 묘사로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슈니츨러의 초상화를 작업하며 느꼈던 점에 대해 "초상화를 그릴 때는 시간을 초월하는 특징을 표현해서 그 인물이 사라지더라도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이네요.
비엔나의 초기 표현주의자 막스 오펜하이머가 마른 손을 들어 올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화상 속 오펜하이머는 의심이 많은 눈빛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손은 고뇌하는 예술가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색채로 표현했고, 표정과 동작을 강조하여 긴장감을 극대화했습니다. 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동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이후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
관람에 지친 저를 향하여
오스트리아 미술의 신성(新星) 에곤 실레가 텔레파시를 송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