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朴壽根) / 2 - 빨래터, 농악, 귀로
(전회에 이어서)
빨래터
사진은 작게 나왔지만 <빨래터> 중에서 사이즈가 크게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려진 시기도 아래에 소개된 다른 작품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왼쪽 끝에 있는 여인이 다른 증장인물들과 달리 일어 선 자세로 빨래를 시도(아마도 헹구는?)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수근은 대표작이 된 빨래터 그림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중 한 점 <빨래터(1950년대)>는 2007년 당시 한국 작가 중 경매 최고가(45억 2000만 원)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빨래터를 자주 그린 것은 아내 김복순을 처음 본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각선 구도에 각기 다른 여인들의 뒷모습에 노랑, 분홍, 옥색 등 색을 입혀 생동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아래엔 소개한 4호(15.8 ×33.4cm) 크기의 <빨래터>는 1975년 문현화랑에서 열린 ‘박수근 10주기 기념전’에 나온 것으로 개인이 75만 원에 구입하여 당시까지 보유해 왔던 작품입니다. 빨래하는 여인들의 옷에서 보이는 파스텔 톤의 분홍 노랑 파랑 빨강 등 비교적 밝고 선명한 색깔로 그려져 있습니다.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는 6점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분위기의 <빨래터>가 많은 것은 박수근 화백이 좋아하는 소재를 몇 번이고 다시 그리는 취향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서양의 대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흔한 일입니다.
창신동
작품 <골목안>은 제가 경험했던 왕십리 행당동에서 지낸 유년의 골목 풍경과 조금 다릅니다. 골목 안에 나무가 들어서 있는 풍경이라서 그렇게 여겨지는 듯합니다. 나의 추억 속에 존재한 서울 변두리의 골목은 그림 속의 모습보다 많이 좁아서 두세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와집이 들어서 있는 골목 안에서 아이들이 노니는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그래도 많은 사람이 지나간 추억을 소환하는데 유용한 듯합니다.
박수근이 살던 창신동 기와집을 그린 작품입니다.
연필 드로잉과 부분적으로 칠해진 크레용의 효과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고목과 여인
1968년 어느 가을날, 남편 공장 인부들의 밥을 해 나르던 주부 박완서는 `박수근 회고전' 신문 기사를 보고 전시장으로 달려갑니다. 그날 박완서는 철없던 시절에 무시했던 한 예술가의 집념과 자신의 처지였습니다. 철없던 시절 예술가를 무시했다는 것은 무슨 내막을 말하는 걸까요? 박수근이 박완서를 처음 본 것은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주부 박완서는 무명화가 박수근을 깔보았던 것일까요? 내막은 잘 모르지만 암튼, 박완서는 그 전시회에서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이라는 작품을 보고 그것을 모티브로 장편소설 <나목>을 썼고, 그것이 공모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됩니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고목과 여인>, <나무와 두 여인>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나무와 두 여인>은 비슷한 구도로 그린 세 가지 작품이 존재합니다. 어느 작품에서건 아기 업은 여인,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여인과 함께 나무 한 그루가 등장합니다. 정중앙에 자리 잡은 나무는 마치 세상으로 나온 듯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여기서 아기를 업은 엄마와 머리에 뭔가를 이고 가는 여인은 시대의 생활상을 엿보게 합니다. 한편, 이 그림에서 아이에게 등을 내어 주는 어머니는 박수근의 아내라고도 합니다.
<고목과 여인>은 커다란 고목을 전면에 대담하게 배치하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인물들을 그린 구도의 작품입니다.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표현에 따르면 “박수근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한 구도의 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박수근 전성기의 작품에 해당하는 <고목과 여인>은 가장 큰 특징으로 화강암 표면에 새긴 마애불을 보는 질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사실 한국의 전통문화는 돌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국을 흙의 문화라 한다면, 일본은 나무의 문화라고 보입니다. 같은 탑을 가지고도 중국은 흙으로 만든 전탑(塼塔)이고, 일본은 목탑의 나라입니다. 반면 한반도는 석탑의 나라입니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이 상징하듯 한국 미술은 석조 문화의 전통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박수근은 화강암 파편을 매만지면서 캔버스 위에 돌의 질감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화가는 실제로 경주 답사를 하고, 마애불 탁본도 하고, 이를 미국의 후원자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석조 문화 전통을 터득한 박수근은 돌의 질감을 구현해 낸 회화작법으로 한국화단에서 유일무이한 독창성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윤범모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이렇게 하여 한국 전통 석조문화를 터득한 그는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을 상징하는 고목과 생활력을 드러내는 여인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는 작업을 즐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1964년 제작된 <고목과 아이들>은 박수근 화백의 말년 제작 기법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2014년 1월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린 ‘박수근 화백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대중에게 알려지기 이전인 2012년 12월 서울옥션에서 이 작품은 6.5억에 낙찰되었으며 다시 2016년 5월 29일 홍콩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제19회 홍콩경매에서 480만 홍콩달러(한화 약 7억 3500여 만원)에 낙찰됨으로써 낙찰가를 경신시킨 바 있습니다.
<두 나무와 두 여인>은 박수근 화백 작고 직전인 1964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특유의 제약된 색채와 50대부터 나타나 60년대 초반에 이르러 완숙하게 표현된 특유의 입체적 마티에르(질감)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박수근의 <나무아래(37.5×26.5㎝)>는 작가의 회화적 기량이 절정에 도달한 1961년 작품입니다. 앙상한 나목(裸木)을 전면에 내세워 공간감을 만들고, 명암과 원근감이 거의 배제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의 저고리는 붉은색으로 칠해 전반적으로 단조로운 색감 안에서도 변화를 줬습니다. 일하는 여성을 주로 그려온 작가가 밭갈이를 하는 세 명의 농부를 통해 일하는 남성들의 역동적 모습을 담은 것이 특징입니다.
작품 <나무아래>에는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 아래에는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 오른쪽 아래에는 휴식을 취하는 듯 보이는 두 여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인과 나무는 단순한 형태와 굵은 윤곽선으로 묘사하고 갈색조의 색감과 거친 질감이 강조되어 작가 특유의 화풍을 잘 보여줍니다. 우뚝 선 나무에서 뻗어 나온 잔가지들과 연두색 잎은 삶에 대한 단단한 의지와 희망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크레용으로 그려진 박수근 화백의 보기 드문 작품으로
은은하면서 투명한 색채로 나무의 생명력을 표현했습니다.
농악
<농악>은 박수근이 농악을 소재로 그린 작품 중에서도 대작(?)에 속합니다. 작품 <농악>은 농악대 4명의 움직임을 간결하고 소박한 선으로 그려낸 10호 크기 작품으로 인물을 상하 2단으로 배치하되 상하 인물들의 움직임을 반대로 향하게 하여 화면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박수근 특유의 질감을 내세운 화풍 탓에 육안으로 인물들을 식별하기가 용이하지 않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그림의 배경이 생략되어 있고 인물 사이의 원근감이나 입체감을 배제하였으며 인물들은 간략한 선묘로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거칠게 다듬어진 질감, 단단한 바위에 새겨 넣은 듯한 선묘는 마치 풍화된 암각화와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귀로
<귀로>는 여느 그림처럼 어두운 잿빛, 회색이 배경입니다. 행상을 마치고 귀가하는 3명의 여인을 담은 작품입니다. 낡은 시멘트 바닥의 느낌에 평면 위의 침잠한 백색과 회색의 굵은 톤, 박수근만이 낼 수 있는 색깔에 한국인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여인들의 머리 위 함지에는 하얀 것이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쌀인지 보리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담겨있을 테고, 여인의 등에 업힌 아이는 잠이 든 듯합니다. 세 여인은 무심히 서 있는 듯하면서도 삶을 응시하는 태도에는 진지함이 배어나옵니다. 검정 고무신과 흰 버선이 겨울나무가 단단히 뿌리박은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엔 얼굴표정이 없습니다. 때로 눈, 코, 입도 생략됩니다.
패사디나 소재 USC 퍼시픽아시아뮤지엄(PAM)은 오랜 후원자 허브 눗바(Herb Nootbaar) 옹으로부터 박수근 작품 <귀로(Homeward Bound)>를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습니다. 기증자의 작고한 아내 도로시 눗바(Dorothy Nootbar)는 약 40년 전 뉴욕에서 박수근의 작품을 구입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화강암 같은 질감으로 서민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박수근의 수작입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상징되는 가난한 시대의 일상을 황토색 짙은 질감으로 표현했습니다. 신작로에 늘어선 나무를 따라 보따리를 이고 귀가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비교적 따뜻한 기운으로 가식 없이 담아냈습니다. 나무와 여인을 배치한 아주 단순한 설정이지만 어려운 시절의 삶, 그 속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풍경이 묘한 울림을 줍니다.
박수근은 <귀로>에서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해 대상의 본질을 어루만지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 민족적 정서를 거친 듯 소박하게 빚어냈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선, 원근과 명암이 배제된 대담한 구성, 은은하고 투명한 색채는 질박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경매에서 6.8억에 낙찰된 작품입니다.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화가마다 나름대로 꽂히는 주제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 경우 동일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긴 화가들이 많습니다. 박수근의 경우 <귀로>가 그런 사례에 해당합니다.
<귀로>를 제작한 1964년은 그가 작고하기 한 해 전이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하직할 때 고향을 그리워하는 예가 있죠. 어쩌면 박수근이 세상을 등지기 1년 전에 <귀로>의 주제로 여러 편의 작품을 남긴 것도 그런 관계가 숨겨져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는 지병으로 인해 심각한 고통이 따랐으나 작품 제작을 강행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박수근은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동생과 누이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전면에 고목을 크게 배치하고 좌측 하단에 길을 걷는 어린 동생과 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화면 상단 끝까지 나뭇가지를 시원하게 뻗은 높다란 고목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 아래로 한 손에는 어린 동생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함지를 받치고 발걸음을 옮기는 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구성은 고목나무와 인물로 매우 단출합니다.
화면의 무게중심을 잡거나 좌우, 상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밑동이 굵은 나무를 취한 듯합니다. 중심이 되는 굵은 나무줄기의 자의적 형태에서 강하게 내재된 생명감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의 표상에서는 가난과 고뇌를 이겨내며 좌절하지 않았던 작가의 자화상이 오버랩됩니다. 어린 동생과 누이의 상의를 푸르고 붉게 물들여 채색이 절제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습니다.
노인
<노인들의 대화>는 미국 미시간대학교 교수인 조지프 리(1918~2009)가 1962년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구입해 갔던 작품입니다. 그동안 작품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조지프 리가 타계한 후 미시간대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공개되었습니다.
<할머니와 손자>는 유화 반세기만에 공개된 작품입니다. 1960~1964년 캔버스 유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작품에 손자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미소가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박수근 화백이 타개하기 1년 전인 1964년에 제작되어 제13회 국전에 출품되었습니다. 화단에서 특별한 학연이나 지연이 없었던 그에게 있어서 국전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 의식해야 하는 유일한 발표의 장이었습니다.
그처럼 국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라서 그런지 <할아버지와 손자>는 비교적 큰 사이즈의 탄탄한 구성력과 빼어난 조형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품의 소재는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다운 이웃들입니다. 주제는 조손 간 끈끈한 혈육의 정과 함께 이웃 간의 구수하면서도 훈훈한 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수근 화백은 작품에서 비현실적인 소재나 과장된 주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흰 무명 치마저고리나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의 서민층의 인물이며 그 외 다른 요소들도 모두 그가 생전에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입니다. 같은 해에 <할아버지와 손자>와 한 세트처럼 여겨지는 <할머니와 손자>라는 작품도 제작되었습니다.
소녀와 아이들
작품 <길가에서>는 화가가 1952년에서 1963년까지 거주했던 창신동에 살면서 제작한 것으로 아기를 업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향토색 짙은 색감과 또렷한 윤곽선, 특유의 우둘투둘한 질감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세상 근심걱정 모르는 갓난아기 동생은 포대기에 폭 싸여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습니다. 단발머리 소녀는 누군가를, 아마도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아비나 어미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림에 담긴 소녀의 눈빛과 표정, 자태에서 고단한 삶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폭에는 고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강렬한 의지와 희망이 화강암처럼 스며 있는 듯합니다. 단순한 설정을 통해 시대적 감성을 집약하는 것은 박수근 미술의 전형입니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박수근 화백은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화폭에 담아 시대적 감성을 자극하는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오~ 이 작품은 색감이 칙칙하지 않고 화사해서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그릴 수 있는 데 왜 단색으로 거친 질감화만 고집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후 서울에 자리잡은 서민들의 일상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길가나 시장, 노점 등을 배경으로 삼은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에 반하여 작품 <유동>은 아이들을 둘러싼 농가의 집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 전체에 풍기는 온화한 색조,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감, 그리고 아이들 간에 오가는 시선 등에서 대상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애정이 감지됩니다.
<줄넘기하는 아이들>은 2018년 3월 경매를 거쳐 고향인 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이 4.6억 원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습니다. ‘줄넘기하는 아이들’로 알려진 이 작품의 원제는 <유동>입니다. 여자아이 3명과 남자아이 4명이 줄넘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6호(41.3 x 31.8㎝) 크기의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렸습니다. 박수근 화백 특유의 요철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밝은 색채로 경쾌함을 살린 작품입니다.
작품 <줄넘기하는 소녀들>은 박수근 화백의 최말년기인 1964년에 제작된 것입니다. 당시 박수근 화백은 한쪽 눈 실명과 백내장 등으로 시력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작품이 흐릿하게 묘사된 것은 그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는 골목을 누비는 순수한 소녀들의 이야기가 독특한 조형성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박수근 작품에는 아기를 보는 소녀가 자주 등장합니다.
소녀는 흰색 포대기로 아기를 둘러업고 아기를 받치기 위해 손은 뒷짐을 진 채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둥근 얼굴에 앞 머리카락을 눈썹 위로 가지런히 자른 단발머리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흰색 상의와 거무스름한 긴치마, 치마 아래로 드러난 가냘픈 종아리, 그리고 검정 고무신의 코가 살짝 들려 있는 것까지 시니어들에겐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60년대와 70년대 초까지, 그림 속의 풍경이 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큰언니가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젖먹이 동생을 키웠던 것이죠. 사실 아이 보는 일은 쉽지 않은 것임에도 소녀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박수근의 표현,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녀의 해맑은 표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검고 가는 선으로 단순화시켜서 그린 소녀의 표정이 무척 다정해 대상을 향한 화가의 따뜻한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박수근 작품 속 소녀들은 대부분 단발머리입니다.
실제 당시 소녀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1990년대 후반 개최된 한 미술 전시회에서 이 작품을 본 화가 한젬마가 자신의 머리를 소녀와 똑같은 모양으로 바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림 속 포대기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요즘 엄마들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지만 과거에는 무명천 하나로 아기를 둘러업고 두 손으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네, 포대기라고 하는 아기띠가 요즘은 선진국에서 인기라고 합니다. 엄마와 아기가 정서적으로 교감하기 쉽고, 휴대하기 간편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림 속에서 소녀의 등에 업힌 젖먹이 동생은 머리 윗부분만 살짝 보입니다. 누나 또는 언니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궁금했던 걸까요.
(계속)